나는 일찍이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역주하면서 “과연 신선이 있는가? 중국에는 어찌하여 종교나 신앙보다는 민간 도가적 신선 세계에 그토록 매달려 살아왔을까?”하는 의문에 젖은 적이 있다.
그런데 갈홍의 ≪포박자(抱朴子)≫에 인용된 ≪선경(仙經)≫에 의하면 신선 도사도 세 종류가 있으며, 그 중 “상사(上士)는 자신의 육신을 마음대로 하늘로 들어 올릴 수 있고 결국 승천하니 이를 천선(天仙)이라 하며, 중사(中士)는 명산을 두루 다니며 땅에서 신선으로서의 지위를 다 누릴 수 있으니 이를 일러 지선(地仙)이라 하고, 하사(下士)는 먼저 몸이 죽은 다음 옷을 벗어놓고 몸은 감쪽같이 사라지니 이를 일러 시해선(尸解仙)이라 한다”(上士擧形昇虛, 謂之天仙; 中士遊於名山, 謂之地仙; 下士先死後蛻, 謂之尸解仙)라 하였다.
그러니 지금 나도 명산대천을 즐겨 다니며 신선처럼 살다가 가는 ‘지선’은 될 수 없을까 하고 은연중 기대를 걸어보기도 한다. ‘천선’은 엄두도 못 내며, ‘시해선’은 도리어 이를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한다.
중국 정사(正史)의 <독행전(獨行傳)>, <일사전(逸士傳)>, <일민전(逸民傳)>, <은일전(隱逸傳)>, <문원전(文苑傳)> 등에 올라 있는 인물들은 거의가 신선들이다. 그들의 삶은 방외지사(方外之士)로서 일반 속인과 다른 모습이나 행동, 지조와 철학을 바탕으로 이 한 세상을 살면서 전혀 불편함을 느끼거나, 자신에게 의혹을 가진 적이 없는 특이한 자들이다.
이들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당연히 ≪열선전≫에 실린 70여 명의 선인들이다. 물론 어찌 보면 황당한 일화를 사실인 양 천연스럽게 기록한 듯 보이지만, 실은 중국인의 사유 속에 우화등선(羽化登仙)이나 불로장생(不老長生), 나아가 행기도인(行氣導引), 연단지년(煉丹止年) 등은 결국 종교인 도교로 발전하였고, 지금도 가는 곳마다 도교 사원은 신비함을 넘어 현실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모습으로 명산대천 천하 명승지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역대로 천하 제왕들은 불사약을 찾고자 바다 가운데의 삼신산(三神山)을 찾도록 방사를 파견하였고, 서역(西域)으로, 동해(東海)로 신비한 선계를 직접 보고자 끝없는 방황을 하기도 하였으며, 문학 작품과 희곡 연극에 빠짐없이 서왕모(西王母)며 노래자(老萊子)며, 팽조(彭祖)며 왕자교(王子喬)를 합창하였다.
지난 날 중국 여행에 西域(新疆위구르)를 5번째 가보았다. 우루무치 창길현(昌吉縣)에 있는 천산(天山) 산맥의 천지(天池)는 똑같이 서너 번 오르게 되었으며, 그때마다 호수 북쪽 산 중턱 절벽에 매달린 하얀 양 떼 밑에 깎아지른 듯 세워진 서왕모 사당, 그리고 그 동쪽으로 멀리 한여름의 하얀 5445미터나 되는 설산 보그다(博格達)봉을 보면서 “이런 곳에 신화나 전설, 도가의 신선이 살지 않았다고 믿을 수 없다”라고 홀로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온통 변방 벽지 서역 대황원(大荒原), 끝없는 고비사막, 낮게 뜬 국내선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준게르 분지의 구르반퉁구터 사막, 타림분지의 타클라마칸 사막, 타림 하(河) 모래 속에 뿌리박은 수천 년 묵은 버드나무는 이 지역이 노자(老子)가 청우(靑牛)를 타고 지나 대진국(大秦國)으로 갔다는 유사(流沙)일 것이며, 알타이 산속 카나스 호수 위의 관어대(觀魚臺)에서 멀리 보이는 4374미터의 우의봉(友誼峰)과 그 아래로 내려다 본 초원의 도와족(圖瓦族) 마을, 다시 되돌아오는 먼 길 그 아름다운 야생화 풀밭에 그림보다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카자크 족 텐트에서 얻어 마시던 나이차(奶茶)는 옛 신선들도 이곳을 지나다 마셨을 것이라 여기며, 눈을 들어 산 중턱 위에 펼쳐진 삼각형 시베리아 소나무 숲에 시선을 멈추어보기도 하였다.
화염산 밑에 더위에 거품을 머금은 낙타, 고창(高昌) 고성의 흙벽 그늘에 우리를 기다리던 위구르 족 당나귀(이섹기)의 울음소리는 왠지 친근하기만 하였고, 교하(交河) 옛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자리에 작열하는 태양, 신강박물관(新疆博物館)의 그 뚜렷한 누란(樓蘭) 미녀로 이름지어진 미라(古尸)는, 죽음 이후의 시해(尸解)가 어떤 것인지 눈으로 보는 것과 같았다. 투루판의 포도와 카르징(坎兒井)은 갈 때마다 내 살아 있음의 더없는 기쁨과 동시에 내 삶의 더없는 슬픔을 함께 맛보게 하는 묘한 분위기를 안겨주었다.
그러니 신선이 행복한 삶이랴? 세속의 삶이 열악하니 그 때문에 신선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거꾸로 정의를 내려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신선은 현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삶을 그렇게 살았겠는가?
이러한 인간의 내면속에 잠재한 깊은 사유를 그나마 초보적으로 살피고자 이 ≪열선전≫에 손을 대어 보았으나, 속사정은 모른 채 단지 문자에 얽매어 자료 정리에 치중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울러 이 책은 이미 출간된 적이 있다. 그런데 여러 사정으로 인해 계속되던 필자의 동양고전 총서가 중단되어, 난감하게 여기고 있던 터에 마침 삼호재(三乎齋) 박노일(朴魯一) 대표가 너무 아까운 책들이니 다시 <수정본>으로 출간해 보자고 제의를 해 왔다.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원고를 새롭게 정리하였지만 역시 미진함을 금할 수 없다. 독자 제현께서는 그저 자료로 활용해 주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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