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0년이 되어간다. 1976년 대만 유학을 가서 아직 학기가 시작되지 않아 미리 공부를 해두겠노라 오전에는 언어중심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국립 중앙도서관을 드나들면서 학문의 분위기를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무심코 그곳 목록을 검색하다가 조선수초본 세설신어(등록번호 1908)라는 것이 보여 흥분을 감춘 채 대출을 신청했더니, 대출은 불가하고 대신 그 자리에서 볼 수는 있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심스럽게 건네받은 책은 한지에 아주 곱게 정성을 들여 손으로 베껴 쓴 ≪세설신어≫였다. 아직 빛도 바래지 않았고 먹물도 냄새가 배어날 정도로 단아하였다. 게다가 주석까지 아주 세밀하게 배꼈는데, 조선시대 누군가가 이를 귀중한 책으로 여겨 온 정성을 들여 단정하게 써내려 책으로 꾸민 것이었다. 책 내용이나 모습보다 우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바로 “어쩌다가 이 조선(朝鮮) 수초본(手抄本)이 흘러 흘러 이곳 대만 국립 중앙도서관에 소장되게 되었을까?”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를 복사할 수 없겠는가 특별 부탁을 하였지만 전혀 불가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좋은 연구로 보답하겠노라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사서(司書) 선생은 원문은 시중에 얼마든지 있으니, 대신 앞 몇 페이지만 복사를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선 ≪세설신어≫ 책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내친김에 한글로 번역을 해볼 참이었다. 유학 과정 중 수시로 이 책과 ≪전국책≫을 번역하였고, 그 원고를 가지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아직 출판 사정이 여의치 않아 재미있는 일부만 추려 책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1984년 출간된 ≪세설신어≫(초략)와 ≪전국책≫(초략)이었다. 그러나 당시 천학비재에 그저 의욕만 앞서 오류와 오역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
겁이 나서 그 뒤로 내 입으로 책 이름도 거론하지 못하다가, 아니다 싶어 다시 완역을 서둘러 원고를 완성은 하였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국 지금에야 비로소 교정을 보고 책으로 꾸미게 되었다. 물론 지금이라고 옛날보다 문장을 보는 실력이 는 것도 아니요, 더 완벽하게 하자(瑕疵) 없이 책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없다. 다만 인간은 완벽할 수 없으나 완벽을 추구하는 과정만으로도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으리라는 핑계가 무모하게 다시 덤비게 한 것이다.
일사(逸事) 문학의 백미(白眉)! 과연 읽어볼수록 가슴을 흥분시킨다. 중국 남방 문화와 사상의 정화이며 인간 한계의 모든 것까지 세세히 기록된 이 책은, 뒤로 나의 중국학 공부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사람으로서 감정과 행동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사람은 얼마나 해학스러울 수 있으며, 언어는 어느 한계까지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으며, 나아가 사람은 얼마나 악할 수 있으며, 사람은 얼마나 거칠게 행동할 수 있으며, 얼마나 화를 낼 수 있고 얼마만큼 지저분할 수 있으며, 얼마나 비열할 수 있으며 얼마나 인색할 수 있으며,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 수 있으며, 얼마나 남을 괴롭힐 수 있으며 자존심은 얼마나 엉뚱한 결과를 낳으며, 얼마나 교묘할 수 있으며,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인간군상의 처절한 밑바닥 행동이나 생각을 36부문을 나누어 거침없이,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때문에 살아있는 표현이며 소시민의 일상 감정과 행동이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결말을 맺을 수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쇄사쇄언(事碎言)이다. 그 때문에 ‘일사문학’이라 명명한 것이다. 여기서 ‘일사’란 무엇인가? 한자로는 “逸事, 佚事, 軼事” 등 여러 가지로 표기하며 ‘遺事’와 같은 뜻이다. 一然의 ≪三國遺事≫도 실제는 우리나라의 아주 훌륭한 일사문학의 기록이다. 뜻 그대로 “그대로 지나치면 그만인 일들”, “사라져 잃어버릴 일들”, “기록을 하지 않아도 편안히 여길 수 있는 일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기록해 두지 않는다고 해서 누가 안타까워하거나, 귀한 역사적 사실을 놓쳤다고 불안해 할 일들도 아니다.
한여름 수업을 하고 있는데 강의실 뒷문이 바람에 계속 열리는 것이었다.
자꾸 신경이 쓰여 뒤에 앉은 학생에게 ‘문을 닫으라’고 하였다. 그 학생이 일어나서 문을 닫고 돌아서자 다시 문이 열렸다. 학생은 다시 일어서 또 문을 닫는다. 다시 문은 바람에 열렸다. 이렇게 세 번이 넘어가자 지켜보고 있던 나는 참다못해 학생에게 한마디 던졌다. “머리를 좀 써라.”
그랬더니 그 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한 채, 자신의 책상을 문 가까이로 옮겨놓고 앉더니, 머리를 젖혀 그 문에 대고 열리지 않도록 버티는 것이었다. 한바탕 웃었다. “그래 머리는 그럴 때 쓰는 거야.” 물론 문을 닫으면서 종이나 얇은 무엇을 접어 함께 끼워 고정시킬 수 있는 머리는 그 머리가 아니었다.
이러한 것이 일사이다. 이를 기록한다면 그것이 일사문학이 될 것이다.
이처럼 굵은 역사의 큰 줄기나 고매한 사상의 ‘군자연(君子然)’, ‘학자연(學者然)’해야 하는 그런 일이 아니다. 그저 해프닝이나 일상 대화, 모임 속에 오가는 행동들 속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사안들이다. 조리나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훈이라고 못 박을 것도 아니며, 단편적이기도 하고 길 가다 마주친 사람이 툭 던진 그저 좀 특이한 편언(片言)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1,130여 가지 모아두겠다고 한 그 발상이야말로 참으로 중국 남방 문학다운 모습이며, 중국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거울이다. 이제 ≪세설신어≫를 편한 마음을 읽어보자. 그 속에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일상의 소중한 보물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로 부담을 갖지 않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일사가 내 주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고맙게 여기며, 기록에는 영 게으른 나의 안일함에 도리어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2024년 甲辰年 추분 줄포 임동석이 취벽헌에서 다시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