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초겨울, 도연명(陶淵明) 국제학술회의(國際學術會議)에 참가하러 혼자 상해(上海)를 거쳐 중국 국내선을 갈아타고 강서(江西) 남창(南昌) 창북공항(昌北空港)에 내렸을 때 부슬부슬 비가 오고 있었다. 이곳에는 세 차례 오는 여행이었지만 느낌이 남달랐다. 선뜻 외로움과 여수(旅愁)에 젖는 것이 마치 하늘 끝 어디에 홀로 와서 비를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중 나온 성자현(星子縣) 인민위원들의 차를 타고 멀리 구강(九江) 여산(廬山) 아래 용만온천도가촌(龍灣溫泉度假村) 호텔은 만족할 만큼 훌륭했다.
이틀의 회의를 마치고 도연명 발자취를 샅샅이 훑어보는 답사가 나에게는 훨씬 설레임과 가치를 더해주었다. 날씨는 쾌청하여 겨울인데 여산은 마치 우리의 가을처럼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여름에 두 번 여산을 오르내리며 살펴보았던 그 많은 풍광과 역사, 고적, 문학, 신화, 전설은 이 겨울에 산 둘레 유적지를 보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았다. 드디어 다시 오로봉(五老峯) 밑을 돌아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향했다. 강서사범대학 교수 한 분과 셋 만이 일정을 달리 잡아 다시 찾았는데 그는 서원의 산장(山長)을 겸하고 있어, 그와 함께 설명을 들으면서 훑어본 서원은 지난날 한국 교수들과 답사팀을 이루어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송나라는 어떤 시대였기에 이토록 이학과 문장으로 풍미하였고, 당시 학생들은 지금의 대학생과 같았을 텐데 어떻게 모여 이렇게 공부를 했을까하는 생각에 교실 의자에 앉아도 보고, 조상(彫像)으로 만들어 놓은 주희(朱熹)의 가르침을 받아 적는 시늉도 해보았다.
이곳 배록동서원은 바로 송대 사대서원(四大書院)의 하나이다.
“이곳을 세 번이나 찾아올 수 있었으니 나도 시대를 잘 타고 났고, 전공을 잘 택한 덕분에 복을 받은 셈이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미치자 그동안 해오던 고문 역주작업도 나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일거리인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귀국하면 책상머리에 앉아 일상대로 하던 그 일을 무념 상태에서 계속하리라 상상에 젖었다.
≪도연명(陶淵明集)≫ 완역상주(完譯詳註)본은 아예 마침 미리 역주해 놓은 덕에 이곳 회의에 참가하면서 영광스럽게도 도연명기념관(陶淵明記念館)에 기증하는 즐거움도 맛보았으니, 그 외 여산이나 구강, 남창, 강서, 도원동(桃源洞)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작품이나 고문이라면 겁 없이 눈에 보는 듯이 주석을 하리라 자신감도 가졌다.
그리고 돌아와 미루던 ≪고문진보(古文眞寶)≫ 역주를 끝내었는데, 이는 내 평소 즐겨 외우던 동파(東坡)의 그 <이군산방장서기(李君山房藏書記)> 여산 오로봉 때문이었다. 물론 여산에 얽힌 수많은 작품들, 이를테면 이백(李白)의 “飛流直下三千尺”이며, 동파의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이며, 구양수(歐陽修)가 자신이 지어놓고는 “평생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을까?”라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던 <여산고(廬山高)>, 그런가 하면 현대 모택동(毛澤東)이 짓고 강택민(江澤民)이 글씨로 써서 남긴 여산식물원(廬山植物園)의 “陶令不知何處去, 桃花源裏可耕田?”, 그 외 수없이 많은 문인묵객의 작품들, 그리고 팽려호(彭蠡湖, 鄱陽湖)의 수많은 신화와 전설, 여기에 매료되어 힘든 줄 모르고 많은 책의 역주 작업을 이어갔다.
그런데 ≪진보≫ 뒤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문장궤범(文章軌範)≫이 늘 마음에 걸렸다. 송대 말 사방득(謝枋得, 疊山)이 편집한 과거 응시자의 교과서인데 이를 제대로 읽어놓지 않은 채 고문을 운운하는 것이 내심 불편하였다. 마침 사방득이 증보했던 몽학서 ≪천가시(千家詩)≫는 일찍이 출간을 해 두었던 터라 겁날 게 있으랴하고 다시 덤벼들었다. 69편의 문장은 아주 긴요하고 매끄럽고 표준적인 문장들이었다. 게다가 그 중 42편이 이미 ≪진보≫에 들어 있어 다룬 것들이라 27편만 잘 정리하면 되리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작업에 임해보니 이미 ≪진보≫에서 다루었던 것조차 미진하였구나 하고 도리어 불안감과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활자로 인쇄되어 흩어진 것을.
이에 ≪진보≫에 미진했던 것은 다시 이 ≪궤범≫에서 보충하는 길로 용서를 받는 길 밖에 없을 듯하다는 생각에 반은 속을 끓이면서 결국 작업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 책을 나의 전체 ‘동양사상총서’에 넣어 출간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정이 있어 더는 출간할 수 없게 되자 삼호재(三乎齋) 박노일(朴魯一) 대표가 총서는 양으로 보나 질로 보아 정말 아까운 자료이니 다시 <수정본>으로 출간하였으면 한다고 하여, 이에 선뜻 응하여 보완하고 수정을 가하였다.
독자나 연구자 제현들께서는 이에 유의하여 살펴주고 가르침을 내려줄 것을 빌 뿐이다.
2024 甲辰年 寒露에 負郭齋에서 茁浦 林東錫 다시 고쳐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