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무거운 자에게 길은 멀어라.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어라. 생사의 바른길을 모르는 자에게, 고해(苦海)의 이 생(生)은 멀고 길어라.”(≪法句經≫)
2005년 6월 말 찌는 듯한 더위에 서울을 떠나 태국 방콕에서 밤 비행기를 갈아타고 파키스탄 라호르로 향하였다.
긴 일정이 시작되었다.
종림(宗林)스님(달마사, 지금은 咸陽 考槃齋), 선우스님(당시 보광사, 현등사를 거쳐 다시 보광사 주지), 오윤희 諺解佛典硏究所 소장, 이규갑 교수, 김상익 교수, 오제중 교수, 민재홍 교수, 곽재창 교수, 허인섭 교수, 그리고 간사를 맡은 최재준 박사, 그리고 대학원생 들 등 18명이 단체를 이루었다.
온통 스탄(Stan)이라 불리는 지역의 날씨는 그야말로 더위에 이글거렸고, 지형은 메마름 속의 먼지로 피어올랐으며, 그 먼지 속을 달각거리며 가는 말 없는 눈빛의 당나귀가 지금도 가슴에 멍을 지운다.
그리고 수없이 사람을 매달고 가는 파키스탄 특유의 온갖 장식을 해서 현란하게 꾸민 트럭형 버스는 빛바랜 원색이 어떤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는 흙벽 단층이 끝없이 펼쳐졌고, 가끔 그 담장 틈새로 우리를 신기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희잡(Ḥijāb) 쓴 여인들이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신기하게 느끼게 하였다.
가는 곳마다 도시 명에는 ‘바드’(bad)가 붙어 있고, 그곳의 주식 식빵 ‘난’과 양젖을 넣은 차, 보라색 양파와 거친 닭고기가 여행을 견디기 위한 먹을거리 전부였다.
이슬라마바드(Islamabad)를 거쳐 한창 세계 뉴스 속에 등장하던 아프칸과의 국경 고개 카이버 패스(Khyber Pass)에는 꽤 비싼 돈을 주고 군인들의 경호 속에 짚 차로 가야 했다.
고개에 오르자 저 또 다른 이국 아프카니스탄 쪽의 검은 돌산이 그들 생명력이 어떤 것이며, 인간이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만의 특유한 사상과 이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마다 아니하는 이유에 대하여 잠시 생각에 젖었다.
간다라(Gandara) 미술로 유명한 곳에 이르자, 박물관 전시품은 정말 중고등학교 때 미술책에서 본 그대로였다.
북으로 향하자 본격적인 불교 관련 유적과 고대 천축국(天竺國)의 모습이 수천 년 세월을 정지시킨 듯 아직도 그대로인 듯하였다.
페샤와르(Peshawar)를 지나 불교 유적지를 일일이 돌아보고, 다시 북으로 향하여 드디어 훈자(Hunza)왕국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카라코름 하이웨이와 우리 한국 기업이 건설했다는 도로, 눈앞에 그대로 다가오는 설산과 실낱같은 검으면서 회색을 띠는 강물들, 쳐다보면 뒤로 넘어질 것 같은 검고 높은 산, 그리고 멀리 구절양장보다 더한 산길을 가끔 꾸역꾸역 따라오는 희한한 원색의 트럭형 버스, 무섭기 그지없는 아스라한 낭떠러지, 고개를 넘으면 또 고개, 마침 어느 고개에 이르러 잠시 멈춘 우리 여행 소형 버스 앞 언덕 위의 초라한 휴게소 가게에는 느닷없이 한글 현수막이 차양막으로 걸려 있었다. 그것도 글씨가 거꾸로 뒤집혔고 위치도 위아래가 바뀐 상태였다.
고개를 거꾸로 하여 읽어보았더니 “서울 ○○구 부녀바자회 행”이었다. 뒤에는 떨어져 나간 부분은 아마 ‘행사장’이었을 것이다.
원조품으로 멀리 보낸 것에 딸려간 것이 돌고 돌아 그곳까지 이른 것이었으리라.
“무엇인지 모르고 그 천을 이렇게 사용하고 있다”는 주인 중년 남성의 눈빛이 참으로 순박해 보였다.
“이것도 한글의 연(緣)이리라”하며 눈을 돌렸더니, 사방이 또다시 만년설, 희고 옥같이 빛을 발하여 눈이 부셨다.
원생(原生)의 자연은 이토록 마치 당나라 때 서행구법(西行求法)에 나선 순례자를 내려다보고 있고, 우리는 시간을 거꾸로 옛사람들처럼 말도 없이 덜컹거리는 소형 버스를 당나귀로 삼고 있었다.
힌두쿠시산맥(Hindu Kush Mts.)과 히말라야(Himalayas)산맥, 카라코름(Karakoram)산맥 등 셋이 합치는 곳에는 기념탑이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카라코름의 이름을 중국에서는 곤륜산(崑崙山)이라 번역했다니, 나로서는 지도를 보고 전체를 구분할 뿐, 높고 아득한 하늘 아래 그 험한 원시 지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기가 질려 더는 알고자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세계 장수 마을 훈자 왕국은 너무 소박하였다.
궁전이었다고 하는 것이 나무로 얽어 지은 원시 유소씨(有巢氏) 구조 정도, 언덕과 좁은 터에 지어져 그곳에 올라갔다 오는데도 다리가 아파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으며, 당시 사용하던 나무 숟가락과 원시적 가구와 각종 목재 가구가 신기할 뿐이었다.
가까이 손에 잡힐 듯 가깝던 설산(雪山)을 직접 보겠다고 찾아가는 길은 뜻밖에 멀고도 멀었다.
“아니 눈앞에 보이는 산인데…….”
가까이 다가가 마주친 빙벽은 수십 미터의 얼음 두께에 자갈과 모래가 얼음 속에 층을 이루었고, 전혀 한기(寒氣)는 느낄 수 없었으며 그토록 기대했던 순백(純白)의 정취란 전혀 아니었고, 뚝뚝 수적(水滴)을 이루며 떨어지는 빙천(冰川)의 물은 탁하고 거진 회색 흙탕물이었다.
흘러 흘러 이루는 강물은 마치 양회(洋灰) 가루를 풀어놓은 듯이 탁하고 검었으며, 열악한 숙소 호텔의 세면기와 화장실 변기 물조차도 그랬다.
밤에는 춥고 낮은 더우나 게다가 건조하고 하늘이 너무 투명하여 모두들 감기와 설사로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그곳부터는 중국의 영향으로 중국어로 된 지도를 구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이름만 호텔인데도 더듬더듬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젊은 안내원도 있어 그야말로 살 것 같았다.
인더스(Indus) 강의 발원지를 따라 카리마바드(Karimabad))를 지나, 중국과의 국경을 향해 갈 때는 5천 고지의 희박한 산소와 주위의 설산으로 인해 전혀 지구가 아닌 다른 세상에 온 듯하였다.
몸은 지쳐 준비한 도시락도 목을 넘어가려 하지 않았고, 버스에 내려 냇가 환기를 위해 몇 발자국 나서서도 어지러워 휘청거렸다.
드디어 중파(中巴) 국경 쿤자랍 패스(Khunjerab Pass. 紅其拉甫達坂. 해발4,693m)에 올랐다.
파미르(葱嶺. Pamir)고원이다.
눈에 익은 국경표시 석비(石碑)는 漢字 ‘中國領’에는 눈이 쌓인 자갈밭에 천지는 황량하였고, 안개가 덮여 천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녹색 제복의 중국 군인들이 우리를 맞았다.
말이 통했다. 인사와 덕담까지 주고받으며 사진도 찍고 내심 살았다는 안도감에, 다시 한번 눈 쌓인 산을 눈에 가득 넣었는데 사방이 똑같았지만 말이 통하는 중국이라니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카스쿠르칸(塔什庫爾干)에 여장을 풀 때는 추위와 감기, 설사로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밥도 죽도 중국식 거친 음식도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여행은 계속되었다.
길은 역시 포장과 비포장의 연속으로 앉은 좌석에서 머리가 튀는 소형 버스 지붕에 닿았다.
어떤 경우에도 말이 없으신 종림스님은 옛 고승들의 고행에 비하면 그래도 편한 길이라 하였고, 지형 지리에 밝은 이규갑 교수는 이제껏 온 길을 땅에 그림을 그리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의료 담당 허인섭 교수는 연신 아픈 사람을 찾아 물었고, 역사와 상식에 뛰어난 김상익 교수는 보는 것마다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였다.
다시 카스(喀什)를 지나 악소(阿克蘇) 등 소위 고대 서역삼십륙국(西域三十六國)의 본격적인 순례에 나섰다.
사실 신강위구르는 2년 전 우리 몇몇이 이미 난주(蘭州)에서 출발하여, 본격적으로 탐방을 시작하여 감숙의 하서회랑(河西回廊) 하서사군(河西四郡), 옥문관(玉門關), 돈황(敦煌), 양관(陽關)을 빠짐없이 다닌 곳이기는 하지만, 거꾸로 다시 한번 일정이 낱낱이 잡혀 있었다.
그리하여 고차(高車) 고성(古城), 선선(鄯善), 龜玆(高車), 투르판(吐魯番), 우루무치(烏魯木齊), 해발 –155m라는 아이딩(艾丁) 호수며, 쿠얼러(庫爾勒) 시에서 자고, 보스텅(博斯騰) 호수며,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하(內陸河) 타림(塔里木. Tarim)강을 따라 다시 타클라마칸(塔克拉瑪干. Taklamakan Desert) 사막으로 들어섰을 때의, 수박 맛은 천하일품이었다.
그리고 투루판의 4천 킬로미터의 불가사의한 지하수로(地下水路) 카르징(坎兒井)은 인간의 의지가 이런 경지에 이른다는 모습에 다시 또 찾아가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우루무치에서 천지(天池)에는 오르자 우리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한 젊은이(청소년)이 따라오는 것이었다. 말을 타고 산 중턱에 이르도록 따라 오기에, 물어보았더니 자신은 조선족이며 할아버지 때 경북 안동에서 연변을 거쳐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데, 말도 거의 잊었지만 우연히 이곳에 왔다가, 한국말을 하는 것 같아 혹시나 해서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카자크족 파오(包)에 말을 타고 오르는 길에 잠시 내려 바위에서 나눈, 더듬거리는 그의 말을 통해 그의 가족사를 들으며 발길을 돌리는 내 가슴은 이상한 서름에 젖고 말았다.
좌우간 이렇게 아스타나(阿斯塔那. Astana) 고분, 선선(鄯善), 화염산(火焰山), 작열하는 햇볕 아래 긴 눈썹의 낙타, 가는 곳마다 돈황(敦煌) 막고굴과 같은 불굴(佛窟)들, 구마라집이 머물렀다는 황량한 유적지, 순서도 기억하기 어려운 앞뒤 일정, 다시 명사산이며 막고굴, 백양나무 아오시스(綠洲), 포도구(葡萄溝)의 온갖 모습들, 오아시스 도시에서 몇 발만 나서면 풀 한 포기 없이 끝없이 펼쳐진 모래바람과 사막의 신기루, 고차 고성의 ‘이새기’(당나귀)와 춤을 추며 10원을 요구하던 황토 고성 그늘 아래의 위구르족의 인형처럼 생긴 소녀, 그곳을 돌아나와 옥문관이며 가욕관 앞의 기련산은 역시 설산의 아름다움을 눈앞에 펼쳐보이고 있었다.
주천(酒泉), 장액(張掖), 무위(武威)를 돌고 돌아 난주에서 비로소 비행기로 상해에 이르렀을 때는 옛 고승의 서역길을 다녀왔다는 것이 까만 옛날 같았다.
작년에는 다시 모든 것을 잊고 또 고행의 산서(山西) 여행에 나서서 춘추시대 진(晉)의 근거지이며 당(唐)나라 발원지 태원(太原)을 기지로 하고, 개자추(介子推)의 전설을 그대로 재현한 개휴(介休)의 면산, 행화촌(杏花村) 양조장에서 졸졸 나오는 뜨거운 원액 白酒를 마시고 속이 타는 듯함을 견뎌내고, 다시 북으로 오대산(五臺山)과 항산 현공사(懸空寺)를 넘어 대동(大同)을 향하였다.
바로 탁발씨 북위의 도읍이었던 옛 이름 평성(平城)의 운강석굴(雲崗石窟)에 이르렀다.
그제야 책에서 보던 탁발씨의 불교 문화가 사실로 여겨졌다.
다시 북으로 내몽골 왕소군(王昭君)의 청총(靑塚)에서 “春來不似春”을 떠올리며, 후허호트(呼和浩特)와 역사상 거란족(契丹族)이 집결하여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다는 시라무론(西拉木倫. Šira Mören) 초원의 기마 병사들의 펄럭거렸던 깃발을 상상하기도 했었는데, 이곳은 역시 몇 년 전 이미 답사한 곳이었지만, 그 사이 변한 것이란 없었고 다만 도로가 확장되었고 포장이 그나마 잘 되어 있었다.
그간의 모든 여행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바로 이 책 ≪낙양가람기≫에서 말한 모든 것이 시간 정지 상태로 화석화, 박제화된 채 지금 그대로인 듯하였다.
누군가 상상을 펴며 이 책을 읽고 그렇게 돌아볼 기회가 있으면,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1500년 전 기록이 지금 그렇게 신기하게 큰 차이가 없음에 놀랍기도 하고 불가에서 말하는 겁년(劫年)이라는 것도 찰나(刹那)가 아닌가 여길 것이다.
이 책은 이미 본인이 역주하여 출간되었다. 그러나 역주 당시 급한 생각에 속도만을 중요한 줄 알고 아주 거칠게 진행된 채 책으로 나왔다.
가끔 다시 훑어보면서 내자신에게 크게 실망을 안겨주어, 늘 “기회가 되면 다시 다듬어야 할 텐데”라고 짐을 진 채 20여 년을 보냈다.
그런데 마침 삼호재(三乎齋) 박노일(朴魯一) 대표가 내 작업 역주본 전체를 다시 전자책과 종이책으로 작업을 했으면 한다고 제의해왔다. 어쨌거나 고맙게 느낀다. 이에 다시 세밀히 교정하고, 보완하여 내놓게 되었으니, 그나마 내 짐을 조금 덜어준 것이다. 아마 불타(佛陀)의 가피(加被)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원작자 양현지(楊衒之)가 서문에 “余才非著述, 多有遺漏”라 했듯이, 나 역시 불교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불학(佛學)이 전공도 아니어서 누소(漏疎)함과 어로불변(魚魯不辨)의 지척(指斥)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긴다.
독자제현(讀者諸賢)께서 해량(海諒)해 줄 것을 바란다.
2024년 甲辰年 11월 7일 立冬에 茁浦 林東錫이 負郭齋에서 고쳐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