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왕조의 건설, 혹 새로운 정권의 창출에는 그 창출 과정에 못지 않게 성공을 거둔 즉시 정치 체제와 이념, 사상과 국시(國是), 시정(施政) 강령(綱領) 등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더없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어수선하고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뒤에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잘못 내렸다가는, 그 사직(社稷)이 천 년을 간다 해도 이상적인 국가가 될 수 없고, 나아가 잘못된 각도는 부챗살처럼 멀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특히 민심이란 쟁패의 순간에는 엄청난 지지를 보내다가도, 자신들을 통치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만약 고통을 준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고 말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荀子≫에는 “君者, 舟也; 庶人者, 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라 하여, “水可載舟, 亦可覆舟”의 논리로 경계하기도 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의 폭정에 시달리다 못한 진말(秦末) 민심은 새로운 반기를 들고나온 영웅호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으며, 뒤에 다시 초한전(楚漢戰)의 온갖 고통과 지모, 책략, 지루한 투쟁을 거쳐 천하를 덜컥 거머쥐게 된 자가 바로 유방(劉邦)이었다.
그러나 이들 승리 집단 유방의 무리들은 천하 통치에는 경험이 없었고, 준비도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민출신의 무례함을 버리지 못한 채 궁중에서 술에 취해 지나날 자신이 세운 공을 두고 다투며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궁궐 기둥을 발로 차고 칼로 치는 등 전혀 예와 질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더구나 유방을 황제(皇帝)로 옹립하고 나서도 자신들과 동등한 일개 인간으로 여겨, 전혀 형식적 의전(儀典)도 없이 대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유방 자신도 “천하를 휘어잡는 것은 칼과 말이지, 시서(詩書) 따위를 읽을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할 정도였고, 무엇이 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급히 서둘러야 하는 것인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해 질서와 의전부터 만들어야겠다고 나선 인물이 숙손통(叔孫通)이었다.
그는 제로(齊魯) 지역 유생(儒生)들을 불러 야외에서 훈련시킨 다음, 궁궐로 데리고 와서 유방 앞에 시범을 보였으며, 그제야 유방은 “황제가 이렇게 귀한 존재인 줄 처음 알았다”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무식한 집단을 깨우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선 자가 바로 육가(陸賈)였다.
그는 유방에게 “천하를 말 위에서 잡았다고 해서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라고 강하게 진언하면서, ‘시서(詩書)’와 ‘유가(儒家)의 사상’을 주입시키려 애를 썼다.
이 경우 지도자는 훌륭한 사상가를 만나야 한다.
나아가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빈 가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서민 출신의 유방은 과연 중국 역사상 위대한 왕조, 한나라를 세울만한 천운과 그릇됨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나를 위해 진(秦)나라가 천하를 잃게 된 이유와 내가 천하를 얻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고대 성패의 전고(典故)를 지어 보여달라”라고 육가에게 부탁을 하였고, 육가는 우선 급한 대로 대강이라도 글을 지어 바쳤다.
매번 한 편씩 올릴 때마다 고조는 훌륭하다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를 다 마치자 좌우 신하들은 만세를 불렀으며, 그리하여 책 이름을 ≪신어≫라 하였다는 것이다.
한나라 초기에는 아직 유가가 제대로 흥기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유가사상’은 태평한 시대에 기득권을 가진 안정된 학자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혼란기에는 ‘세상 혼란의 해결’이 초미의 관심사일 테니, 유방의 말대로 어찌 책상 앞에 앉아 ‘공자왈맹자왈’할 겨를이 있겠는가?
게다가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해 마땅한 교재도 없었다.
그 때문에 한초(漢初)에 그나마 유학에 관심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상과 생각을 중심으로 저술 활동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자료도 없이 개척해 나가는 길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중 거의 효시를 이루다시피 한 것이 이 ≪新語≫이며, 그 때문에 책 이름도 이렇게 ‘新’자를 넣어 지어진 것이다.
그러자 이에 영향을 받아 양한(兩漢) 시대에는 가의(賈誼)의 ≪신서(新書)≫,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유향(劉向)의 ≪신서(新序)≫, ≪설원(說苑)≫,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 중장통(仲長統)의 ≪창언(昌言)≫, 최식(崔寔)의 ≪정론(政論)≫, 두이(杜夷)의 ≪유구(幽求)≫ 등과 한말(漢末) 순열(荀悅)의 ≪신감(申鑑)≫ 등이 쏟아져 나왔다.
책 이름에서 보듯이 ≪신어(新語)≫와 유사한 제목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당(唐)나라가 들어섰을 때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바로 탄생 초기 국가의 기틀을 어떻게 이끌었는가 하는 내용은 ≪정관정요(貞觀政要)≫에 그대로 실려 있다.
그보다 앞선 대제국 한(漢)나라가 신왕조로 들어섰을 때, 그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한 이 ≪신어≫는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이미 상세한 역주를 거쳐 출간되어 문세(問世)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본인의 <漢典完譯叢書>가 더는 진전이 없이 중단되자, 마침 제자 박노일(朴魯一) 군이 계속되는 작업은 물론, 기간의 모든 책을 다시 전자책과 종이책으로 출간하여 진행했으면 하는 제안을 해왔다.
나에게 이는 바로 공자가 말한 “加我數年”의 염원을 이루어주는 천의(天意)였다. 이에 출판사 이름도 ≪論語≫ 첫구절에서 취하여 삼호재(三乎齋)라 하고, 새롭게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교정과 수정, 보완 등의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문의(文意)의 원만한 소통과 체제의 통일을 거쳐 완정(完整)하게 맞추어야 하는 기계적 작업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행복한 나의 일이어서 “不知老之將至”의 경지가 아닌가 하고 여길 때가 더 많았다.
2025(乙巳)年 雨水(2.18)에
茁浦 林東錫이 負郭齋에서 일부 고쳐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