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鳥獸哀鳴海嶽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揜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이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런가 하면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秋夜述懷>에서
“孤燈耿耿伴人愁, 燒盡丹心不自由.
未得天戈回赫日, 羞將禿筆畫靑丘.
殊邦十載霜侵髩, 病枕三更月入樓.
莫說江東鱸膾美, 如今無地繫漁舟.”
라고 망명지에서의 가을밤 고국의 운명에 대한 애절함을 읊었다.
어느 시기에나 정권의 교체기나 왕조(王朝)의 전환기에는 지식인이라면 많은 고통을 느낀다.
더구나 전왕조에 충성을 다하였거나, 혹 전혀 다른 이민족에게 국운(國運)이 넘어갈 때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명분과 현실 속에 목숨 자체의 선택을 강요받는 절박한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학문이나 고집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판단도 철칙(鐵則)으로 세우기에는 망설여지는 사안이 눈앞에 가로놓이는 경우도 있다.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에 의해 다시 건국한 유씨(劉氏) 왕조 東漢은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2백여 년을 군림하다가, 후기에 이르러 환관(宦官)의 발호로 1차 당고지화(黨錮之禍)라는 전대미문의 옥사를 치른 뒤, 영제(靈帝: 168~189)가 들어섰으나, 그 역시 두무(竇武)를 기용하여 환관을 제거하려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이응(李膺) 등 1백여 명이 처형되고 7백여 명이 체포되는 2차 당고지화를 맞게 된다.
이로써 환관의 득세는 더욱 기승을 부려 정치는 암흑기로 들어선다.
그리하여 사회는 들끓게 되었고, 경제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민생은 나락으로 떨어져 각지의 농민들은 기아에 벗어나지 못하게 되자, 드디어 반기를 들게 된다.
영제 때 장각(張角)은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라는 기이한 책을 만들어 이를 경전으로 삼고, ‘태평도(太平道)’라는 종교를 설립, 자신이 교주(敎主)가 되어, 184년 신도들을 이끌고 정식으로 난을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모두가 머리에 누런 두건을 둘러 자신들 표지로 삼아, 흔히 이를 ‘黃巾賊의 난’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1년이 되지 않아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그 잔여 세력은 20여 년을 황하(黃河) 유역에 버티기도 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중앙정부에서는 각지방의 변란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 군수와 주목(州牧)에게 권력을 대폭 가중시켜, 그들로 하여금 재정권, 군사대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뒷날 한제국(漢帝國)을 무너뜨리는 가속도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역사란 언제나 흥성의 단서는 그 이전에 이미 조성되는 원칙은 여기에도 적용되고 말았다.
즉 少帝(189년 1년 재위)가 즉위하자, 기주(冀州)를 담당하고 있던 원소(袁紹)는 권력의 빈약한 틈을 이용, 궁중 권력구조를 개편한다는 구실 아래 환관 2천여 명을 살해하였다.
그러자 양주(涼州)의 동탁(董卓)은 원소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낙양으로 밀고 들어와,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獻帝: 189~220)를 옹립하였다.
원소는 자신의 근거지 기주로 돌아온 다음, 동방 각 주군(州郡)과 결탁하여 동탁을 토벌한다는 기치를 세우고 스스로 맹주가 되었다.
세에 밀린 동탁이 헌제를 위협하여 장안(長安)으로 옮겨갔으나, 얼마 뒤 부하 여포(呂布)에게 피살되자, 헌제는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조(曹操)가 헌제를 허창(許昌)으로 옮기도록 하여, 허수아비로 만든 채 자신이 천하 제후에게 호령을 하는 형국을 만들어 버렸다.
이처럼 동한의 황제는 이름뿐이었고 나라는 사실상 망한 상태였다.
서기 200년 조조는 드디어 원소와 관도(官渡)에서 결전을 벌여, 7만여 명을 섬멸한 다음 중원(中原)을 장악하게 된다.
뒤이어 조조는 남방(東吳 지역) 세력인 손책(孫策)의 아우 손권(孫權), 그리고 서부(四川) 세력인 유비(劉備)의 강력한 반발이 시작되었으며, 조조는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에 그의 아들 조비(曹丕)는 드디어 220년, 헌제를 폐위하고 선양(禪讓)이라는 미명으로 나라를 이어받아, 아버지와 자신의 작호(爵號)인 ‘魏國公(魏公)’에서 ‘魏’자를 취하여 국호로 삼고,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그러자 이듬해 유비도 황제를 칭하고 자신의 혈통을 내세워 국호를 한(漢, 蜀漢)으로 하여 성도(成都)를 도읍으로 하였고, 손권은 국호를 오(吳, 東吳)라 하며, 건업(建業, 지금의 남경)에 건국하여 삼국정립(三國鼎立)의 시대를 맞게 된다.
≪신감≫의 저자 순열(荀悅: 148~209)은 바로 이러한 동탕(動蕩)의 시대를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헌제 밑에서 직접 시강(侍講)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황제의 부탁으로 서한(西漢)의 역사를 재정리 한 ≪한기(漢紀≫)를 짓기도 한 사람이다.
기울어져 가는 왕조의 원인을 찾고 다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온갖 구상을 다하였지만, 권력은 이미 신하에게 넘어가 있었고, 천하는 기근과 변란으로 도탄에 빠져 있음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에게 올린 글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나 울분에 처한 글이라기보다 오히려 건의에 그친 느낌을 지을 수 없다.
그리고 고고한 유가사상(儒家思想), 즉 인의(仁義)와 덕치(德治)로 나라를 다스리기를 주장한 내용은, 마치 전국(戰國)시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안위(安危)가 눈썹을 태우는데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부르짖은 맹자(孟子)와 같다는 생각도 든다.
좌우간 이 책은 혼란의 가마솥 속에 살던 한말(漢末) 철학자, 정론가, 사학자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 고민의 일부를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이 책은 이미 출간되어 널리 퍼졌으나, 역자의 일관된 작업인 ‘한전완역총서’(漢典完譯叢書)가 중단되어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마침 삼호재(三乎齋) 박노일(朴魯一) 대표가 고전을 함께 모아, 전자책과 종이책으로 온전하게 출간하여, 고전읽기가 희미해지는 이 시대에 그래도 ‘하나의 몫’으로 자취를 정리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목탁(木鐸)은 될 수 없을지라도 족흔(足痕)은 될 것이라 여긴다. ‘不知老之將至’의 기쁨으로 모든 책을 몰입하여 재정리하고 수정보완하였다.
역자의 총서를 활용하는 이들에게 성원(聲援)과 사교(賜敎)를 함께 기원한다.
2025(乙巳)년 3월 1일, 봄을 기다리며
줄포(茁浦) 임동석(林東錫)이 부곽재(負郭齋)에서 다시 덧붙여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