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내 살던 동네는 깊은 산촌으로 사방이 높은 산으로 막혀 다른 동네와는 아주 단절된 곳이었다. 그런데 30호도 채 되지 않은 좁은 마을에 온통 순흥안씨(順興安氏) 집성촌으로, 타성은 우리 집과 그 외 몇 집이 뿐이었다.
그리고 동네 내 또래는 成洙, 成寬, 成祐, 成元 등 모두가 ‘성(成)’자 돌림이었고, 그 아래 항렬로 昌鎬, 正鎬, 仁鎬 등 모두가 ‘호(鎬)자 돌림으로, 그들의 삼촌, 사촌, 오촌, 8촌으로 그를 통해 나는 누가 누구와 몇 촌이며 그 할아버지는 같은 사람이었고, 그 고모는 어떻게 가계가 얽혀있으며, 어디로 시집을 간다더라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영주 줄포(茁浦, 上茁)를 떠나 유랑을 하던 우리 가족은 내가 6살 때쯤 버려진 움막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자리를 잡았는데, 그곳 망골산 끝자락 우리 집은 그저 부모님과 우리 3남매가 오롯이 별세계에서 온 이방인처럼 느끼곤 하였다.
이에 아버지가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던 집안 임씨대동보(林氏大同譜)와 蔚陵君派譜를 펼쳐놓고 설명을 듣고는, 비로소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고 우리 할아버지는 형제 중 몇째이며, 당숙 집 누구의 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의 아우이며, 나아가 우리 집에 드나들던 작은 아버지는 셋째 할아버지가 아들이 없어 양자로 가서 아버지와 형제지만 족보에는 달리 올라갔다는 등 내력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백부, 숙모, 고모, 이모, 당숙, 이종, 고종, 외조모, 외당숙이 무슨 관계인지 헷갈릴 때면 어머니는 땅에 계보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설명해 주곤 하셨다.
세월이 흘러 사회가 급격히 변하면서 친척도 제 살길 바빠 흩어졌으며, 나아가 핵가족이니 외아들 외딸이니 하는 시대 흐름에 따라 도시 생활, 산업화의 바쁜 일상으로 점차 소원해진 혈족 관계는, 이제 내 딸에게 아무리 그런 관계를 설명해 주어도 그저 이는 학습 요소일 뿐, 현실적으로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사어(死語)로 묻혀가는 것이 아닌가 허망할 때가 있다.
이러한 현상 속에 건조함을 넘어 ‘한 다리 건너 천 리’요, ‘원친불여근린’(遠親不如近隣)의 안타까움 속에 그저 결혼식이나 경조사에 마지못해 가야 하는 부담감으로 다가오고 있으며, 눈에 멀어 마음에도 멀어지는 세태를 힘겹게 살고 있는 군상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농업 사회의 정착민이 아니라, 도시 속의 유목민을 넘어, 세계를 향한 신유랑민(New-Nomads)이 되어 뿌리 없는 부평초가 된 채, 박제의 족보를 껴안고 있는 셈이 되고 만 것이 아닌가 한다.
민족 전체의 역사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오류나 한 줄이라도 잘못된 서술이 있는 역사 교과서가 나타나면, 온 국민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반응을 보이면서 어찌 내 핏줄의 내력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로 생육을 이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누구나 성씨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 뿌리에 대하여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이 성씨가 어떤 연유를 가지고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화 속의 일처럼 여기며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가끔 보게 된다. 현실이 급하고 그저 생업이 바쁜 때문이리라.
이에 나는 우선 고전 역주의 한 작업으로 중국 ≪백가성≫을 들여다보았다.
중국 송(宋)나라 때 나온 것으로 504개의 중국 성씨를 운(韻)에 맞추어 정리한 지극히 평범하고 하찮은 아동용 몽학서(蒙學書)이다.
중국은 지금도 책방마다 이 책이 ≪삼자경(三字經)≫, ≪천자문(千字文)≫과 함께 소위 ‘삼백천’(三百千)이라 하여, 어린이 도서 첫머리에 진열되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나아가 중국 어린이라면 누구나 “趙(Zhào), 錢(Qián), 孫(Sūn), 李(Lǐ)”하고 운에 맞추어 입에 줄줄 외우며 다닌다.
그리고 어린 시절 이를 통해 주위 사람의 성씨를 익히고 아울러 한자도 자연스럽게 익히는 이중 소득을 얻고 있다.
지금 만나는 중국인에게 이 ≪백가성≫ 이야기를 꺼내면 즉시 “아, 내 어릴 때 외우느라 고생했지요. 趙錢孫李……라구요”하며 입에 한참을 쏟아낸다.
우리도 중고등학교 때는 교복 가슴에 한자 명찰을 달고 다녀 이를 통해 한자도 알고 성씨도 알았다.
지금 기억에도 그 흔한 金, 李, 朴이 아닌 ‘南宮, 簡, 甘. 都, 諸, 賈, 表’ 등 몰랐던 희귀한 성씨도 있구나 하고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중국에는 지금 성씨를 통한 뿌리 찾기에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고 있다.
몇년 전 여름 중국 산서성(山西省)을 여행할 때 교가대원(喬家大院), 거가대원(渠家大院), 왕가대원(王家大院), 삼다당(三多堂, 曹氏豪宅) 등을 둘러보며 자료를 모을 기회를 얻었었다.
그 외 그곳에는 온통 성씨별 장원(莊園)과 항진(巷鎭)이 즐비하였는데, 모두가 자신의 성씨 뿌리 찾기인 ‘심근려유(尋根旅游)’ 팀을 만들어 찾아온 탐방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멀리 운남(雲南) 루구호(瀘沽湖) 나시족(納西族) 모쏘인(摩梭人)의 모계사회 원형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때의 느낌은 오히려 관광지처럼 변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우리나라 성씨도 중국에 연원을 두고 있는 성씨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필자만 해도 평택임씨(平澤林氏) ≪大同譜≫에는 “우리 임씨의 득성에 대한 설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唐堯 때 어떤 神人이 冀州 太原縣의 雙木 아래로 내려왔는데, 모습이 위대하고 재지가 뛰어나 임씨 성을 하사하였다는 것과, 또 하나는 殷나라 왕자 比干의 아들이 자가 堅으로 長林山에 은거하여 林자를 성씨로 삼았다는 것이다”(吾林得姓之源有二說: 一唐堯初, 神人降于冀州太原縣雙木下, 容狀甚偉, 才智過人, 因以賜姓林氏云. 一殷王子比干之子諱堅, 隱於長林山, 故以林字爲姓云)이라 하여, 아예 중국 성씨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한국에서의 평택임씨가 있게 된 <還貫事由>에는 “팽성은 평택의 옛 이름으로 翰林學士를 지낸 휘 林자 八자 及자이라는 분이 당나라에서 참훼를 입어 쫓겨나 팽성의 용주방에 정박하게 되었다. 뒤에 평택백에 봉해졌으니, 이가 바로 우리 동방 임씨의 시조이다”(彭城, 平澤古號. 翰林學士林公諱八及, 自唐被讒見逐, 來泊于彭城龍珠坊, 後封平澤伯. 卽東方吾林之始祖也)라 하여,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낸 휘(諱) 임팔급(林八及)이라는 분이 중국에서 핍박을 받아 한반도로 건너와 지금의 경기도 평택에 자리를 잡고 뒤에 평택백으로 봉을 받아 첫 임씨 시조가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중국에서 와서 귀화하여 동방의 성씨가 된 내력으로부터, 아예 중국 지명을 본관으로 그대로 쓰는 예도 있으며, 중국 성인이나 귀인의 성씨라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 ≪백가성≫은 우리 성씨를 연구하고 득성의 내력을 밝혀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임에도 틀림이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성을 모두 한글로만 표기하고 나아가 원음도 지키지 않음으로 해서, 성씨의 구분이 어렵고 변별지표(辨別指標)로써의 기능도 퇴색되어 가고 있다.
나아가 경우에 따라서는 부계중심에서 모계까지의 선택도 가능하여, 이제 이름 앞에 붙는 대단위 포괄적 성씨로 의미가 확대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물론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법률 문서에는 한자로 병기하여 그 뿌리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나’(我)라는 한 사람의 ‘座標’(정체성)는 人種→國籍→姓氏→貫籍→派→行列→이름이며, 이를 표기(한자)함으로써 명백히 ‘우주 만물 속의 유일한 하나’로 시공 속에 존재한다. 이는 세계 유일의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우리나라만의 성씨 지표(指標) 공식이다.
그런데 성씨, 관적, 항렬은 이제 희미해지고, 나아가 이를 한자로 표기하지 않음으로 해서, 지표는 사라지고 주민등록번호나 휴대폰 번호, 혹은 공인인증 번호, 아이디(ID)와 비밀번호의 디지털 숫자가 대신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 ≪백가성≫은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성씨에 대한 선행 연구 자료로 우선 초보적인 해석서를 내놓게 되었다.
물론 중국 성씨학이나 보학(譜學)에 깊은 연구나 견식이 있는 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그저 중국의 자료를 모아 번역 역주한 정도에 그친 정도임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이 책은 이미 출간되어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여러 사정으로 나의 일관된 고전역주 작업이 중단되어 안타깝게 여기고 있을 때, 마침 제자이며 출판업에 널리 활동을 하고 있는 박노일(朴魯一)군이 너무 아까운 학술 자료가 끊어질 수 없다 하여, 이제껏 출간했던 모든 책을 전자책과 종이책으로 함께 재출간하겠노라 제의해왔다. 하늘의 뜻이 아닌가 한다.
이에 출판사 이름도 ≪論語≫ 첫구절에서 취하여 삼호재(三乎齋)라 하여, <한전완역총서(漢典琬譯叢書)>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래도 계속하던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春秋繁露)≫ 역주작업을 중단하고 기출간의 모든 책을 재정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2025(乙巳)년 음력 정월 元宵節 대보름(2월 12일)에
茁浦(줄포) 임동석(林東錫)이 부곽재(負郭齋)에서 다시 고쳐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