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의 원 글자는 ‘灋’(법)이었다.
이는 “외뿔 짐승 ‘廌’(치, 豸)가 어떤 갈등(葛藤)이나 분란(紛亂), 송사(訟事), 시비(是非), 범죄(犯罪), 다툼 등이 있는 곳의 옆에 있다가, 이들의 논쟁이나 변론을 듣고, 잘못된 자를 물(氵)로 씻어내듯이 제거(去)해버리다”라는 매우 상징적이며 소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廌’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성수(聖獸)였으니, 참으로 동화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법이 있음에도, 좌우로 갈려 싸우고, 진영으로 나누어 서로가 투사가 되어 다투고, 규정을 어겨놓고도 힘으로 덮어버리고, 죄악을 저지르고도 돈으로 무마하고, 온갖 비리를 모아서 해 놓고도 거짓말을 하고, ……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장자(莊子)는 와각지쟁(蝸角之爭)이라 하였다.
달팽이 뿔 위의 그 좁은 공간을 중국 중원(中原) 대륙(大陸)인 줄로 알고 모두가 내땅 네땅하며 다투는 전국(戰國)시대 상황을 두고 한 말이다.
이처럼 시공(時空)으로 보아 영원하지도, 한없이 광활하지도 않은 사람 일생에, 무얼 그리 이름을 남기겠다고 경쟁과 침략, 탈취와 갈취가 횡행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외치는 자일수록, 자신의 범법은 법 밖의 일이라고 우기고, 그 우기는 것이 버젓이 통하기도 하며, 법 뒤에 숨거나, 법 위에 군림하거나, 법 옆 옷자락에 자신을 감추어, 법이 도리어 자신을 대신하여 화살을 맞도록 한다. 참으로 신기한 세상이다.
국민(초등)학교 어릴 때 아동용 <중국고사집>을 읽으며 ‘상군지법’(商君之法)이라는 부분을 본 기억이 난다. “자신이 만든 악법에 자신이 걸려든 사례”라 하였으며, 힘센 소가 코에 김을 뿜으며 수레에 실린 죄수를 당겨 찢는 모습에 섬짓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림처럼 참혹한 형벌을 받을까라는 불쌍함과 무서움이 어린 나이에 품었던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 ≪상군서≫를 접하고 보니 과연 잔인하고 지독한 신념에 가득 차 냉혹한 법치만을 실행에 옮기고자 했던 인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아가 사람의 본성을 이렇게 역(逆)으로 잣대를 세워 권력이라는 칼자루로 온 백성을 부릴 수 있을까?
“통치의 마지막 목적은 형벌을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엄혹한 형벌로 더는 그러한 형벌이 없도록 겁을 주는 것”이라는 ‘이형거형(以刑去刑)’의 등식을 세워놓고 백성은 아무것도 모르도록 우민화한 다음 그들을 사육(飼育) 대상으로 삼는 것이 통치하기에 가장 쉽다는 생각!
상앙은 그러한 원칙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옛 성현들의 인의도덕도 폐기하고, 당시 살아있는 지성조차 무시하고 그 어떤 망설임이나 의혹도 갖지 않은 채 오로지 실행을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나서야 한다고 “疑行無成, 疑事無功”을 외친 특이한 신념의 그러한 세상.
아무리 전국시대 특수 상황이라 해도, 나아가 해결할 수 없는 그 시대의 얽힌 실타래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라 해도 그 출발이 위악(僞惡)이요, 그 방법이 불선(不善)이라면 차라리 유보(留保)함이 옳았지 않았겠는가?
사마천은(司馬遷)은 제자(諸子)들 중 법가(法家)는 잔인(殘忍)함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는 하였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니 통치를 위해서는 인간성 말살과 같은 주장도 서슴지 않음을 보고 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과연 역사 속에 상앙만 그러했을까?
근대 전제국가들 중에는 역시 그러한 통치자가 있었고, 근래 대량학살과 혁명을 위해서는 공포 조성을 통한 인간 생명의 고귀함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내팽개쳐진 일이 있었으며, 나아가 오늘날 지금도 그와 유사한 사례는 지구상에서 단속적(斷續的)으로 벌어지고 있다.
나아가 ‘균부정책’(均富政策)이 아니라 균빈정책(均貧政策)으로 해야, 백성이 지도자를 따른다는 극단의 생각은, 현대 지구상 일부 남미의 어떤 전제국가나 우리 곁의 독재국가, 그리고 백성을 사육대상(飼育對象)으로 하여, 경제적으로는 나라에서 주는 균등한 목숨 유지비로, 험한 일에는 영웅 칭호를 주어 목숨을 기꺼이 내놓도록 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서 사상을 통제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라고 말로는 내세우고 있는 인권은 독자재의 손에 달려있는, 그러한 예가 지금 이 대명천지에 버젓이 인류가 개명한 이 시대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음은, 일찍이 2천년 전 상앙이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니, 인류는 발전이나 퇴보라는 역사 자체가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렇다면 인간은 본성이 악한 것이 아닌가?
법은 통치자나 엉뚱한 신념을 가진 자를 위해 있는 것인가?
지금 법치국가의 법도 아무리 긴밀하고 세밀히 제정한다 해도, 구멍이 있게 마련이며, 이를 피해 얼마든지 법망을 빠져나가는 예는 눈앞에 버젓이 벌러지고 있다.
일반 소시민으로서 ‘법 없이도 산다’는 것을 지선(至善)의 소박함이요, 지고(至高)의 양심으로 여겼으나, 그 법이 무서운 억압과 살상의 칼날이 되어 가슴 앞에 번뜩이는 것임을 알게 된다면 참으로 비정한 것이리라.
그러나 결론은 있다.
악법은 언젠가는 심판을 받으며 그 악법을 만든 자는 그 악법에 의해 결말이 나고 만다는 대원칙은 분명 적용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같은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나아가 잘못된 생각, 비뚤어진 신념, 인류 보편의 상식에 어긋나는 극단주의자가 통치를 담당하여 잔혹한 법을 제정할 경우, 그 피해와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다. 하물며 자신의 목적만 성취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에 저지른 오류는 긴 세월을 두고 상처를 덧나게 한다.
지도자들은 이 책을 일별(一瞥)하여 반면교사(反面敎師)를 삼을 만하다.
그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결국 덕을 이기지는 못한다는 ‘요불승덕(妖不勝德)’의 대원칙을 품고 살았으면 한다.
그것이 살아있음의 가치이며 주어진 직책의 임무임에랴?
이 책은 이미 출간된 적이 있다. 그런데 마침 나의 일생 작업 역주 성과를 삼호재(三乎齋) 박노일(朴魯一) 대표가 전체를 총서로 재출간하면서, 이 책도 함께 수록하기로 하여, 일일이 수정하고 보완하였으며, 편집의 통일성을 기하고 완성도를 높이려고 애를 써 보았다.
참으로 특이한 내용과 사상이기에 이 시대 작금의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통치의 사례에 경종을 울렸으면 하는 심정에 그냥 역주해보았다.
참고하는 이들의 질정과 사교(賜敎)를 기다린다.
2025(乙巳年) 정월 20일 대한(大寒) 음력 臘月 廿一日에
林東錫이 負郭齋에서 수정하고 몇 자 덧보태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