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단계를 넘어, 인류는 “기록(記錄)한다, 고로 영속성(永續性)을 갖는다”라는 논리 때문에 그 정체성의 연결고리가 존재해왔는지도 모른다.
인류는 지구상에 살았던 흔적을 끊임없이 기록해 왔다. 초기에는 바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또는 유물을 남겨 그 시대 삶의 편린(片鱗)이나마 복원하여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뒤에 작은 공간일지라도 거기에 무언가 그리고, 파고, 새기고 하여 남겨주었고, 더러는 무덤에 이를 넣어 내세를 꿈꾸기도 하였다.
뒤에 초보적인 문자를 만들어 단순한 메모나 키워드로 사용하다가, 드디어 언어를 문자화하는 단계에 이르자, 드디어 내용을 알 수 있도록 된 것이다.
언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가지고 있고, 문자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음을 알고 나서, 기록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후대를 위한 전수용이 되기도 하고, 공간적으로는 먼 곳에 있는 이에게 이를 전달해 소통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기록의 현실성은 교육에도 효용성을 가지고 있어, 교재나 지혜와 경험의 전달용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이처럼 인류는 끊임없이 무언가 적고, 그리고, 파고, 새기고, 표현하고, 표시하는 기록 활동을 이어왔다.
기록이 없는 문화는 마치 격화소양(隔靴搔癢)과 같고, 간단(間斷)의 반복이 그 유형으로 나타나고 만다.
평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한 기록은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르고 삶의 방법이 달라진 이후에는 실로 엄청난 기록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그러한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인류 문화의 발전과 지속성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 이 ≪서경잡기≫도 그 내용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나 대사건(大事件)의 본말(本末)을 기사화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당시의 일상쇄사(日常鎖事)라 할 잡다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중국 학술사(學術史)는 물론 중국문학(中國文學), 제도(制度), 전장(典章), 속문학(俗文學)의 연구에 그토록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 ≪서경잡기≫는 중국의 서한(西漢, 前漢) 시대(B.C.202~A.D.8년)의 수도였던 장안(長安, 오늘날의 陝西 西安 부근)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한이 왕망(王莽)에 의해 일단락을 고하고, 다시 유수(劉秀; 東漢의 첫 황제, 25~57년 재위)가 나라를 세워 낙읍(洛邑, 지금의 河南 洛陽)에 도읍을 정해 동한(東漢, 後漢) 시대(25~220년)에 이르자, 한인(漢人)들은 자신들의 옛 서울인 장안을 서경(西京)이라 불렀다.
따라서 ≪서경잡기≫는 지역의 의미보다는, 전한 시대의 잡다한 기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특히 스스로 ‘雜記’란 이름을 택하여 기록의 채집범위에 제한을 두지 않았던, 필기 형식의 편한 기록체 문장임을 밝힌 것이다.
그 때문에 문자의 다소에도 구애됨이 없이 10여 자에서 길어야 천여 자를 넘지 않은 단편적인 기술로 되어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제왕(帝王), 장상(將相)과 왕공(王公), 대신(大臣), 비빈(妃嬪), 궁녀(宮女), 문인(文人), 학사(學士)는 물론, 공인(工人)과 시정(市井)의 평민까지 두루 그 대상으로 하였으며, 사물(事物)도 궁정의 일사(逸事), 전장제도(典章制度), 풍속과 절일(節日)의 유래, 원유(苑囿), 건축, 진기한 보물, 기인(奇人)의 절기(絶技), 무덤의 도굴 등 다양하기 그지없다.
특히 왕소군의 안타까운 고사는 뒤에 많은 문인의 제재로 널리 쓰여, 지금도 누구나 그에 관한 시 구절 하나는 입에 외울 정도이며, 사마상여(司馬相如)와 탁문군(卓文君)의 염정(艶情) 고사와 조비연(趙飛燕), 합덕(合德) 자매의 사치와 음란의 사건은, 정사(正史)에서 다루기 어려운 표현까지 구사하였고, 추호(秋胡)의 이야기는 ‘추호희처(秋胡戲妻)’의 최초 기록이기도 하다.
그밖에 희곡 연구의 중요한 전고(典故)가 실려 있으며, 문학사 연구의 중요한 일목인 ‘한부(漢賦)’에 대하여 창작과정과 그 작품이 적접 실려 있어, 이 방면의 연구에 귀중한 전거(典據)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당(唐)나라에 이르러 이선(李善)의 ≪문선주(文選注)≫와 서견(徐堅)의 ≪초학기(初學記)≫에 이 ≪서경잡기≫의 내용이 대량으로 채록되어 용전방법(用典方法)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 대본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한 기록의 찬집자(撰集者)에 대하여는 오히려 지금까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기록에 따라서는 서한 말 유향(劉向)의 아들인 유흠(劉歆)이 찬(撰)한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진(晉)나라 때 ≪포박자(抱朴子)≫로 유명한 갈홍(葛洪)이 집초(輯抄)한 것이라고도 하며, 또는 양(梁나)라 때 인물인 오균(吳均)이 찬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에 우선 여기서는 ≪사고전서(四庫全書)≫본에 근거하여, “劉歆(撰)·葛洪(輯)”으로 하였으나, 이는 후인의 연구를 기다리는 의미일 뿐임을 밝히며 자세한 것은 해제 및 부록 서발과 여러 연구 기록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제 우리는 외국, 특히 중국의 문학과 문화, 학술에 대하여 좀더 넓은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근까지만 해도 책 이름이라도 널리 알려져야만 겨우 단편적인 방법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정도였으나, 지금은 보편적 가치를 지닌 동양의 고전이라면 적극적으로 번역과 역주 과정을 거쳐 수요를 창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곧 이제껏 “쪽박으로 바닷물 측량하기나 대롱으로 하늘 쳐다보기”(以蠡測海, 以管窺天)식의 남의 문화 엿보기로 큰 고통에 빠지고만, 오늘날의 오류를 반성하고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몇몇 알려진 문적(文籍)만이 곧 그들 문화의 전부인 양 여겨, 그것만 천착하면 곧 그들 문화를 이해한 것으로 만족하거나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펼쳐 보여 다양한 정보와 필요한 요소를 적출, 오늘의 우리에게 맞게 활용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 ≪서경잡기≫는 비록 많지 않은 양에다가 더욱이 정통의 근간(根幹) 기록이 아니지만, 도리어 고대 중국인의 의식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자료라고 여기며, 문세(問世)에 만시지감(晩時之憾)까지 느낀다.
이 책은 이미 출간된 적이 있으나, 시간이 흘렀고, 번역 문체도 달라져, 늘 안쓰러워하고 있던 터에, 삼호재(三乎齋) 박노일(朴魯一) 대표가 나의 기존 작업 전체를 <한전완역총서(漢典完譯叢書)>로 재출간하겠노라 제의하여, 다시 일체를 수정하고 보완하여, 그나마 어느 정도 오류와 미진함을 덜어낼 수 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2024년 正月 5일(음력 甲辰年 臘月 6일) 小寒에 茁浦 林東錫이 負郭齋에서 다시 일부를 고쳐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