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漢文(中國古文)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것은 ‘≪史記≫를 원문으로 읽기’를 마친 20대 후반 雨田 辛鎬烈(1914∼1993) 선생님으로부터 「史記講讀」을 듣고 나서부터였었다.
그 동안 한문이 좋아 이것저것 보았으나, 이는 단편적인 조각들이었으며, 방바닥에 어지럽게 뿌려놓은 불규칙한 퍼즐 조각들이었다. 그나마 어릴 때 일찍 보았던 ≪十八史略≫이 대충 역사와 고사를 묶어 표현한 넉 자의 故事成語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사기≫를 통해 時間이라는 세로축을 이해하고 나서, 사건들의 퍼즐 맞추기에 접어들었고, 점차 나타나는 전체 그림에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다.
≪사기≫는 소설보다 흥미롭기도 할 뿐더러 내용도 풍부하고, 고사와 성어도 아주 재미있게 앞뒤 사정에 맞게 삽입되어 있다.
그리고 다루고 있는 역사의 시간적인 길이도 다른 정사(正史)에 비해 아주 장구하다. 즉 上古 오제(五帝)부터 漢武帝(劉徹), 즉 우리가 국사에서 늘 배웠던 한사군에 등장하는 B.C.100년대의 군주까지이다.
그런데 ≪사기≫는 역사 흐름을 시간에 맞추어 기술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부분만 읽고 이해하여 흥미를 만끽한다고 해서 덮을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
이 시간이라는 세로 기둥에 가로로 펼쳐져 있는 내용, 즉 ≪사기≫ 전체를 낱낱이 분해하여 다시 채워 넣어 재구성하기만 하면, 그 사이에 있던 어떤 인물이나 사건, 사상, 역사의 흐름을 한 눈으로 꿰어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작업을 스스로 해보고 나면 중국 역사의 실마리는 물론, 한문 문장의 해독까지 훤히 해 낼 수 있다.
나는 당시 따로 노트를 마련하여 내용을 적어가며, 옆에는 ≪중국통사≫와 ≪중국역사지도≫, ≪중국역사기년표≫ 등을 갖추어 놓은 다음, 큰 종이에 조대별로 표를 만들어 그 사이사이마다 읽고 난 본문 내용을 메모해 들어갔었다.
그리고 지도를 펼쳐놓고 한없는 상상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자 퍼즐은 하나씩 맞추어지기 시작했고, 큰 그림이 서서히 드러나더니 “아, 중국 역사가 이렇게 흘러왔구나!”하는 성취감에 하늘을 찌를 듯 환희감이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더구나 역사는 시간(시대)이 있고, 연고지가 있고, 인물이 있다. 즉 ‘時’, ‘事’, ‘地’ 삼요소가 연결되어 있다.
이 세 가지를 연계시켜 이해하고 정리하면 훨씬 이해가 빠르고 입체적인 구조가 보인다.
우선 ‘본기’는 그야말로 시간대를 기준으로 하기에 시간 순서에 맞다. 그리고 땅은 그 활동 무대이다. 그리고 인물은 그 무대 위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활약을 눈에 보듯이 하는 것은 역사를 시, 공, 배우, 스토리를 삼차원 입체적으로 상상하며 읽어가는 것이다.
나는 한창 젊을 때 서당에서 우전(雨田) 선생에게 ≪사기≫를 배울 때 너무 재미있고 너무 가슴이 벅차 큰 희열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원전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마음껏 다른 관련 자료를 구해 본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겨우 일본 판 <한문대계> ≪사기열전≫을 보며, 있는 대로 관련 부분을 찾고 교차해 맞추어보고 이를 정리하여 내 나름대로 노트를 마련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리고 천행으로 복을 받아 대만(臺灣) 유학길에 나서서 그곳에 닿았을 때, 그 많고 흔한 고전 원전과 전적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음껏 중국 고전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세상에 태어난 기쁨이었으며 공부를 한다는 그 이상의 행복감을 안겨다 주었다.
그리하여 없는 돈을 털어 우선 <二十五史> 전질을 사서 전체 목록을 보며 “아, 이런 이야기의 원전이 여기에 들어있구나!”라고 밤새는 줄 몰랐었다.
그것이 지금 내가 고전 역주에 매달리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벌써 이렇게 훌쩍 불유구(不踰矩)를 넘어 곧 기축(己丑)의 또 한 한 바퀴를 맞으면서 다시 그 젊은 날 고민도 걱정도 없이, 아니 앞으로 어떻게 살리라는 다짐도 없이 편하고 근심 없던 시절, 흥분에 차 읽던 ≪사기≫를 다시 접하게 됨에 여러 상념이 나를 사로잡는다.
물론 일일이 각주를 달고 관련 자료를 제시하는 나의 역주 방식과 달리 이 ≪사기≫는 우선 양도 많고 내용도 복잡하여 급한 대로 원문 해석만을 위주로 책이 이루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나마 조그만 결실은 맺었다고 위로하고 있다.
시중에 이미 ≪사기≫ 전체 번역도 나와 있고, 중국 본토에는 많은 역주서와 백화어 해석서가 있어 이에 관심이 있고 정밀하게 연구할 학자라면 그러한 자료를 활용하면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책임을 미루었다.
게다가 다른 고전들을 주석하고 번역하기에 시간이 흘렀다.
그리하여 지금도 그 옛날 젊은 시절처럼 부담 없이 다시 책을 펼치며 읽고 싶은 생각에 우선 재미있는 <열전>만이라도 번역하여 독자에게 읽도록 제공하고 싶었다.
≪사기≫의 가치나 내용, 그리고 사마천의 그 울분에 찬 일생, 史學으로서의 ≪사기≫와 중국 문학으로서의 위대한 학술적 내용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 널리 알려진 일화와 숱한 고사, 전고(典故),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마천과 ≪사기≫에 대하여 충분히 넘치도록 알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사기열전≫은 일반 독자들도 그저 눈길 가는 대로, 혹 아무 페이지나 넘기면서 익히 들어온 이야기의 그 내용과 깊은 맛을 느끼면 되도록 만들었다.
이해하기 위하여 읽는 것은 그리 감동을 주지 못한다. 느끼면서 그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항상 사람 가슴에 오래 남는 법이다.
乙巳(2025)년 긴 더위와 폭우의 夏節을 보내고 秋分에
茁浦 林東錫이 취벽헌(醉碧軒)에서 고쳐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