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갓 스물이 된 예은은 세희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상심에 빠진다. 감쪽같이 사라진 세희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고 시름에 잠긴 예은은 그날도 억지로 오지 않는 잠을 청한다. 그리고 눈을 뜬 세계. 평소 읽던 로맨스 판타지의 악녀 로젤리아의 몸속이었다.
예은은 12살 나이의 악녀 로젤리아로 빙의한 자신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하루라도 빨리 현실 세계로 돌아가려 모든 궁여지책을 쏟아낸다. 그중 가장 빠른 방법은 또 하나의 여주, 성녀 매그놀리아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원작에서는 악녀 로젤리아가 성녀 매그놀리아를 곤경에 빠트리고 황태자를 가로채는 것이 목표였다면 예은이 빙의한 현재의 로젤리아는 매그놀리아를 도와 황태자와의 결혼을 이루어 주는 게 목표였다. 그래야만 자신이 빙의한 로젤리아의 존재가 희미해지며 원작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
예은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매그놀리아에게 친구가 되자 제의를 하고 착하기만 한 매그놀리아는 악녀인 로젤리아의 청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예은은 귀엽고 아름다운 매그놀리아에게 묘한 호감을 느낀다. 비록 소설 속의 성녀로 지칭되는 매그놀리아였지만 예은에게는 왠지 모를 친밀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은은 향수병 비슷한 마음의 병을 느끼며 한국에서 먹던 음식이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 그리움과 외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예은은 깊은 밤 엄마와 한국을 그리워하며 테라스로 나간다. 휘황한 밝은 달을 보며 눈물을 삼키려는 찰나 옆 테라스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
“엄마 보고 싶어. 엄마가 해 준 김치찌개 먹고 싶어…….”
뭐어? 김치찌개?
예은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며 방금 목소리가 들려온 옆 테라스를 보는 순간.
“정은이 이모가 해주셨던 강된장도 되게 맛있었는데……. 여기서 한국 음식을 요리할 수 있을까?”
“허억……!”
매그놀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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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코르셋을 조일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귀족 영애니까. 사교계라는 게 원래 그렇지…….”
“거참 이상한 곳이네, 여기. 고귀한 아가씨라면서 아가씨의 건강을 다 망쳐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이 세계가 원래 이런걸.”
“원래 이렇다니. 난 이해할 수 없어, 로즈. 어떻게 넌 이 모든 걸 그냥 다 받아들일 수 있어?”
“그러니까 소설 속 캐릭터에 빙의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거야. 특히나 우린 레이디로 빙의했잖아. 이걸 거부하고 싶다면 가장 최선의 방법은…….”
하루라도 빨리 이 세계를 벗어나는 것.
“최대한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거네? 그렇지만 아직 방법을 못 찾았잖아.”
내가 말하려던 대답을 세희가 먼저 했다.
“그래. 우리 말 나온 김에 생각 좀 해보자. 대체 어떻게 해서 소설 속 인물로 빙의를 하게 되었고, 어떻게 한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지.”
“음, 우리 그냥 가출해서 이 작품 완결 날 때까지 우리끼리 여행을 다니는 건 어떨까?”
와 그거 되게 신박한 아이디어이긴 한데.
“우리가 누구인지 잊었어? 소설 속 여주인공 로젤리아와 그녀의 철천지원수인 성녀 매그놀리아야. 매그놀리아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우리가 이 소설 속의 주요 전개를 다 이끌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그래? 처음부터 도망칠 수 없도록 주인공 몸에 빙의된 거라고.”
래퍼가 가사를 속사포로 내뱉듯 빠르게 팩트를 짚어낸 나와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세희는 동시에 우울해졌다.
나 또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우리는 주인공이다. 이 소설의 주요 전개를 이끌어 나갈 의무가 있는.
“두 달 뒤면 황태자가 저택에 올 거야. 그리고 원작대로라면 황태자는 이곳에 오자마자 매그놀리아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리고 끝까지 매그한테 집착을 하는데 너 진짜 어떡하지…….”
나도 나였지만 세희가 매우 걱정스러워졌다.
생각해보니 이 소설 속 남주인 황태자는 어마무시한 폭군에 집착도 쩌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우리 세희는 얼마 안 가 이 황태자에게 시달리게 될 테고.
“우웩, 정말 싫다. 극혐. 나 그럼 그날은 꽁꽁 숨어 있어야지.”
세희가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채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럴 수 없을걸? 원작 전개를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 똑같은 결과가 나오도록 또 다른 상황이 일어날 테니까.”
“아무리 꼭꼭 숨어도 어떻게든 황태자를 만나게 되겠네.”
“진짜 뭐 같긴 하다, 그렇지?”
“그래도 일단 최대한 잘 숨어 있어야지. 아, 그날 황태자가 따로 나를 만나게 되는 장면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아.”
“그때 너도 같이 있으면 되겠네. 황태자 앞에서 너랑 키스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푸웁. 나는 몇 숟가락 남지 않은 된장찌개를 삼키려다 도로 뿜어버리고 말았다. 으, 아까운 내 된장찌개.
“방금 잘못 들은 거지?”
“제대로 들었을걸? 황태자 앞에서 우리…… 입 맞추자고.”
세희는 ‘키스하자고’라는 멘트에서 제 입술을 내 귀에 최대한 가까이 댄 채로 작게 속삭였다. 왠지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