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무삭제 완전판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 <한국의 책 100> 선정
※ 이 책은 일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5세 이상의 구독을 권장하며, 미성년자는 보호자의 지도하에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 전자책은 2004년 애니북스에서 발행된 판본과 동일하며, 문학동네로 발행처가 바뀌었습니다.
한국 만화계의 거목 고우영의 『일지매』,
‘고우영체’를 덧입고 전자책으로 태어나다
2025년은 한국 만화계의 거목 고우영이 타계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70년대 한국 만화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고우영의 대표작 하면 『삼국지』와 『십팔사략』을 떠올리지만, 생전 그가 “다른 작품에 비해 훨씬 편애하는 책”이라고 밝힌 작품이 따로 있었으니, 바로 『일지매』이다. 역사서를 기반으로 그려진 다른 작품과 달리 『일지매』는 저자의 순수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인 까닭이었다. 6·25전쟁 이전 청계천 주변 시장에서 우연히 본 미남자의 그림을 마음에 두었던 저자는 그 기억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이끌어내었다고 한다.
1975년부터 약 3년간 <일간스포츠> 지면에 연재된 『일지매』는 1978년에 한차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나 군부 독재의 검열을 거치며 상당히 훼손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약 30여 년이 흐른 2004년, 만화전문출판사 애니북스에서 드디어 연재 당시의 원고를 되살린 최초의 완전판이 출간된다. 2025년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일지매』 전자책은 2004년 애니북스 판본에서 복원이 어려워 기성 서체로 대체했던 만화 대사들을 저자의 필체를 본떠 만든 ‘고우영체’로 바꾸어 재편집한 것이다.
70년대 연재 당시의 원고를 그대로 복원한
최초의 무삭제 완전판
2004년 당시의 복간 작업은 쉽지 않았다. 70년대의 연재 원고는 처음 단행본을 출판했던 출판사의 부주의로 모두 손실되었고, 신문을 원고로 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렵게 부천만화박물관의 도움을 받아 1978년 우석출판사에서 발행한 초판본을 구했지만 책의 상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군부 독재 정권의 무자비한 검열의 잣대는 원작을 만신창이로 훼손시켜놓았다.
이러구러 서른 해 가까이 지나서 다시 옛날의 원고를 꺼내놓고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이 많은 양의 내용들이 삭제되거나 수정, 또는 다른 의미의 지문으로 바뀌어서 독자들에게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통을 참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컷 한 컷을 최초에 그렸던 그림과 대사로 바로잡아나가면서 또다른 희열에 의해 그 분통을 잊을 수 있어 아주 행복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졸작이지만 훼손되지 않고 싱싱한 그대로를 보여드리는 데에 큰 의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초판본은 잡티를 일일이 제거하고 흐릿한 선은 최대한 손질하여 해상도를 높여 저본으로 사용하였다. 연재 당시의 신문을 구해 초판본과 대조 작업을 걸쳐 누락 및 훼손된 부분은 작가가 최대한 당시의 필치와 유사하게 다시 그렸다. 지문은 현대의 맞춤법에 맞게, 대사는 연재 당시 사용했던 사투리를 복원하여 새로 넣었다. 6개월이 넘는 시간과 많은 인력이 투입된 힘든 작업 과정의 결과물로 1975년 12월 17일부터 1977년 12월 31일까지 신문 지면에서 매일 독자들을 웃기고 울렸던 『일지매』가 연재 그대로의 모습으로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장길산』 『임꺽정』과 견줄 만한
역사만화로서의 『일지매』
뼈대가 되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어느 양반집 대감이 여종을 범하여 여종이 아이를 임신한다. 이 사실을 안 대감의 어머니는 갓 태어난 아이를 유기하고 여종을 내보낸다. 우연히 지나가던 걸인과 스님이 아이를 발견해 주워 기르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는 바람에 아이의 목숨이 위험에 처한다. 스님은 아이를 청나라로 데려가 좋은 가문의 양자로 들여보내고 아이는 ‘일지매’라는 이름을 얻는다. 한편 일지매가 조선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청나라 스파이는 조선에 잠입할 수단으로 일지매를 꾀어낸다. 핏줄에 이끌린 일지매는 청에서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따라나서지만,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찾아간 아비 김참판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만다.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상대인 삼꽃마저 처형을 당하자 그의 가슴속엔 양반에 대한 분노가 싹튼다. 조선과 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슬픔을 느끼면서도 일지매는 도적단을 소탕하고 탐관오리를 벌주며 민중의 편에 서는 의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고, 조선을 청나라에 넘기려는 음모를 막기 위해 다시 청나라로 떠난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고우영,
타계 20주년에 다시 만나는 『일지매』
『일지매』는 연재 당시의 독자뿐만 아니라 요즘 세대에게도 그리 낯선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의 배경인 조선시대의 어떤 사료를 뒤져봐도 ‘일지매’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이 만화 『일지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저자는 1권의 앞머리에 실린 「저자의 말」에서 그 사연을 이렇게 밝힌다. 70년대 초 「임꺽정」 연재를 마치고 「수호지」를 시작했던 저자는 어떠한 사정으로 연재를 중단해야만 했다. 이후 <일간스포츠> 사주였던 백상 장기영 선생의 의견을 받아 이성계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흥이 나지 않아 실패하고 만다.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물색하던 저자는 6.25전쟁 전 청계천 시장에서 봤던 『일지매』란 제목의 책을 떠올린다. 그 책을 찾아 뼈대로 삼을 요량으로 연재를 시작했지만 같은 책을 구할 수 없었고, 결국 3년간의 연재는 오로지 자료조사와 저자의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그런 연유로 저자에게 『일지매』란 그 어떤 작품보다 편애를 느끼는 작품이 된다. 2001년 만화 우표를 제작을 위해 대표 캐릭터를 고를 때도 저자는 서슴없이 ‘일지매’를 골랐다고 한다. 세상에 발표된 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읽히는, 진정한 시대 초월의 걸작을 남긴 이야기꾼 고우영. 2025년은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를 기리며 그가 가장 애정했다는 이야기 『일지매』를 만나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