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디자인이라는 그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세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티스트를 사랑하는 법
성실한 창작자이자 진지한 취미인인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 ‘재즈’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재즈’. 재즈 애호가이자 LP 수집을 진지한 취미로 삼고 있는 그가 소장한 재즈 레코드 188장의 재킷을 촬영해 싣고 글을 덧붙여 새로운 재즈 에세이를 선보인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번에 하루키가 본격적으로 엄선한 재킷들이 전부 전설적인 앨범 디자이너 ‘데이비드 스톤 마틴’(약칭 DSM, 1913~1992)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레코드 재킷의 역할이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시절, DSM은 신선하고 감각적인 재킷 디자인을 선보였고 재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그의 세계도 빛을 발했다. DSM이 디자인한 재킷은 여전히 재즈 팬 사이에서 사랑받고 있으며 세계적인 수집가도 많다.
『데이비드 스톤 마틴의 멋진 세계』에 담긴 다채로운 재킷 컬렉션 및 재즈의 세계를 통해, 음악과 디자인이라는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세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떻게 예술을 즐기고 어떻게 예술가들을 사랑하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레코드 재킷이 그저 포장지로 여겨지던 시절,
독보적으로 활약한 전설의 디자이너 데이비드 스톤 마틴
무라카미 하루키가 “DSM이 디자인한 레코드 재킷을 손에 들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왠지 인생에서 조금 득을 본 듯한 기분”이 든다고 호평한 디자이너 데이비드 스톤 마틴은 1940년대 무렵부터 재즈를 비롯해 클래식과 포크 송 등의 레코드 재킷에 이어 책과 잡지의 표지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감각적인 디자인을 선보인 인물이다. 레코드 재킷이 그저 포장지로 여겨지던 시절에 DSM의 신선하고 참신한 디자인이 재즈 팬과 아티스트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마침 재즈의 부흥기와 맞물려 그의 활약 역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뮤지션들과 개인적 친교를 맺고 녹음 스튜디오에 빈번히 드나들며 각 연주자의 성격과 습관과 표정 변화 등을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들의 모습을 그렸다. 재즈라는 음악을 좋아했고, 재즈 맨이라는 인종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재킷에서는 따스한 인간미와 재즈의 리얼한 실황감이 생생히 느껴진다. 또 여기저기 감도는 그의 유머 감각도 놓쳐서는 안 된다. (본문 13p)
찰리 파커의 별명이 ‘버드’였기에 DSM은 파커의 레코드 재킷에 많은 새를 그렸다. ❹에서는 파커의 발밑에 새 한 마리가 눈을 부라리고 드러누워 있는데, 죽었는지 마약으로 의식을 잃었는지, 아니면 연주가 훌륭해서 실신해버린 건지 잘 알 수 없다. 판단할 길이 없다. 그 옆에는 검은 새 한 마리가 무언가를 애도하는 듯 침사묵고沈思黙考하고 있다. DSM의 그림에는 이런 수수께끼 같은 디테일이 곧잘 등장해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보수적인 메이저 레이블이었다면 이런 유희는 ‘불건전한 것’으로 취급되어 결코 허용되지 않았을 테다. (본문 18p)
재즈의 한 세기를 이끌었던 음반 프로듀서 노먼 그랜츠를 필두로 주요 재즈 레이블에서 의뢰가 쏟아졌고, DSM은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창작의 시간을 누렸다. 특히 DSM은 직접 뮤지션과 친분을 쌓고 녹음 스튜디오에 드나들며 인물과 공간의 특징을 포착하는 작업 방식을 선호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현실감 넘치는 DSM의 재킷은 자연스럽게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고, 레코드에 담긴 음악에 대한 기대를 한층 끌어올린다. 더불어 레코드 재킷이라는 네모난 세상의 곳곳에 깃든 재즈와 뮤지션에 대한 애정과 위트를 발견할 수 있다면 DSM의 세계를 더없이 완벽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찰리 파커부터 빌리 홀리데이까지, 색소폰부터 드럼까지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재즈의 세계를 한눈에
DSM이 디자인한 레코드 재킷의 세계를 통과하는 건 재즈의 세계를 한눈에 담는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겸손한 취미인이라고 강조하지만 결코 그 내공이 범상치 않은 하루키의 글을 따라가다보면 색소폰과 피아노부터 비브라폰과 클라리넷에 이르는 다채로운 악기를 중심으로, 연주자와 지휘자와 보컬을 거쳐 다양한 규모의 그룹까지 아우르는, 그 화려하고 변화무쌍했던 재즈의 시대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춘 보여주기식 음악 틈바구니에서 레스터 영이나 찰리 파커, 콜먼 호킨스, 벅 클레이턴 등 성실한(진짜) 재즈인들이 참여한 연주에는 진지하게 귀기울여야 할 지점이 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자 타협 없이 전력을 다했다. 냇 콜이나 행크 존스 같은 피아니스트도 수수하지만 틀림없이 훌륭한 몫을 했다. 그런 기록이 레코드라는 형태로 후세에 남겨진 것이 재즈 팬에게 무엇보다 고마운 일이다. (본문 173p)
데이비드 스톤 마틴의 멋진 레코드 재킷의 세계를 찬찬히 음미해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안에 담긴 음악에도 귀기울여주셨으면 한다. 그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본래 혼연일체여야 할 존재이기에. (본문 16p)
더불어 열정이 빛을 발했던 전성기를 누리다 무대의 뒤로 사라져야 했던 아티스트들의 삶 이야기를 따라가며 하루키가 추천하는 재즈 명곡들을 찬찬히 음미해본다면 『데이비드 스톤 마틴의 멋진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