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에서 기라성까지, 스펙트럼이 스펙터클이 되기까지
전작주의자 손정수가 소설로 지은 밤의 학교
문학평론가 손정수의 여섯번째 평론집 『소설, 밤의 학교』를 문학동네에서 펴낸다. 전작 『소설 속의 그와 소설 밖의 나』 이후 9년 만의 신간으로 2015년부터 10년간 써온 글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작가 저 자신보다 작가를 더 잘 아는 평론가로, 원작자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의미망을 연결해 촘촘하고도 핍진한 비평세계를 펼쳐 보인 지도 어느새 28년. 비평을 쓰는 창작자로서, 한국문학 연구자로서, 문예창작학과의 교수자로서의 면모를 한 권에 모두 녹여낸 『소설, 밤의 학교』는 한 전작주의자의 전면(全面)을 살피기에 모자람이 없다.
지독하리만치 꼼꼼한 그의 작업 방식은 보통의 비평가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공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를 망원경은 물론 현미경까지 챙겨 이 문학계라는 우주를 샅샅이 살피는 천문학자에 비유하고 싶다. 이는 출사표와도 같았던 첫 책 『미와 이데올로기』에서도 밝힌바 “짧은 서평을 쓸 경우에도 해당 작가의 작품 전체를 찾아 읽고 그 연속선상에서 새로운 작품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는 투철한 비평관에 입각한 것이다. 그로부터 사반세기에 이르는 지금까지도 그의 자세는 한결같아 한 작가를 다루고자 할 때, 발표된 모든 작품은 물론 언론사와 인터넷 서점의 인터뷰, 쪽글에 가까운 에세이, 코멘터리북이라 불리는 별책, 저본과 단행본을 낱낱이 대조하며 텍스트의 의식과 무의식 모두 철두철미하게 해부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샛별이라 불리는 갓 데뷔한 신인에서부터 기라성이라 불리는 거장까지 모조리 읽어내기. 천변만화하는 한국과 한국문학을 결결이 감각하고, 역사적 흐름 속에서 맥락을 파악하고, 결정적 순간에 닻을 내리는 작업은 물론 미래를 불러오는 돛을 펴기. 그렇기에 『소설, 밤의 학교』는 생동하는 비평이자 한국문학의 아카이브, 작가를 어루만지고 응원하는 편지로도 충실히 기능한다. 그는 고단함도 잊은 채, 오늘도 미시와 거시를 끝없이 왕복운동하며 굳건한 비평세계를 축성해나가고 있다. 그 누구가 따라 할 수도, 범접할 수도 없는 이 수고로운 창작을 그는 이제 ‘생활’이라고 말한다. 운명을 초과해버린 생활이 아니고서야, 생활이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이리라.
나는 나 자신이 표현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표현에서 늘 문제를 겪었던 쪽에 더 가깝다. 표현은 내 입과 손을 비껴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항상 표현과 싸워야만 했다. 그래서 글쓰는 일은 늘 힘겨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통한 대화의 과정에서 나 자신의 문제를 조금씩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내게 절실한 생활이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_‘책머리에’에서
“그때 나는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에 있었고
그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였다.”
한국문학의 결정적 순간에 내리는 닻과 펼치는 돛
『소설, 밤의 학교』는 총 4부로 구성되었다.
1부 ‘한국소설의 사건과 맥락의 현장’에는 한국문학의 현장과 공명하며 그 상황을 진단하는 주제론에 해당하는 글을 모았다. 용산 참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을 거치며 ‘무중력’이라 운위되던 2000년대 문학이 다시금 ‘현실화’되어가는 궤적들을 꼼꼼하게 분석했다. 페미니즘 리부트 국면을 통과하며 사회적 현실과 결합하는 소설들을 톺는 것은 물론, 특히 「진행중인 역사적 사건이 소설에 도입되는 방식들」 「바다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세계」에는 역사와 서사, 그리고 윤리에 관한 긴요한 통찰이 담겨 있어 2020년대를 살아가는 창작자, 연구자 모두에게 유의미한 지표를 제공한다.
정리하자면,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소설 속 인물들의 변화 과정은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 국면 이후의 새로운 통치성의 영향이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럼에도 그 소설적 반응의 구체적인 양상에서는 한국의 사회적 현실과 결합하면서도 새로운 소설적 문제들을 진전시켜나가는 독특한 활력의 궤적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바라보자면, 현실(이념)로 회귀하는 듯 보였던 200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소설의 흐름은 비대해진 허구 영역으로 인해 균형을 잃은 듯 보인 다른 측면, 그러니까 현실성의 문제를 보완하는 과정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국면까지 거치면서 공적인 현실성을 강화한 구도 위에 이제 새롭게 주체의 욕망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_「포스트모던의 새로운 표정」에서
2부 ‘작가와 대화하는 시간’에는 작가론에 해당하는 글들을 묶었다. 그의 압도적인 장악력은 특히 작가론에서 빛을 발하는데, 대상이 되는 텍스트는 이제하, 김원일, 윤흥길, 박솔뫼, 한강 등으로 이들은 모두 그가 직접 만난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의 전작주의자 진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이제하론, 윤흥길론, 박솔뫼론의 경우 한 작가의 반짝이는 소우주를 감상하는 듯한 감격을 안겨준다. 또하나의 한강론인 「픽션의 경계와 심연을 향한 원심의 궤적」은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쓰인 글로, 1부에 자리한 「The Vegetarian 이후, 한국소설 번역과 현지 수용의 현황과 문제들」과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마치 그의 염원이 긴 시간이 흘러 이루어진 듯한 느낌마저 선사한다.
3부 ‘작품을 음미하는 시간’에는 작품론으로 분류할 수 있는 글들을 모았다. 문학의 세계를 동경하던 시절에 읽은 작품들―황순원의 『일월』, 이문열의『황제를 위하여』, 김종삼의 「북 치는 소년」―을 반추하며 쓴 글은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예전의 자아를 이끌어내 지금의 ‘나’와 연결”(‘책머리에’)되며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씨앗과 시작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박민정, 조경란의 작품론을 통해서는 그가 천착하는 한 주제인 ‘소설의 안과 밖’을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는데, 텍스트와 파라텍스트가, 의식과 무의식이, 작품과 전기가 상호 교통하는 양상을 통해 한 작품-작가에 접근해 들어가는 그의 장기를 이 짧은 글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충격 속에서 나는 소설 속의 인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마치 나 자신의 일처럼 경험하고 있었던 것만은 뚜렷이 기억한다. 그때 나는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에 있었고 그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였다. 그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확인하고 있는 듯한 느낌 속에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나던 그 정신적 유아기가 그 절대적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기억으로부터 소거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_「밤의 학교와 『일월』」에서
4부 ‘문학과 창작의 교육 현장’에는 비평서에서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창작 (교육) 현장’을 다룬 이채롭고도 긴요한 글을 모았다.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오래도록 몸담으며 얻은 노하우로 하여금, 현장에서 직접 겪은 문제들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한국 소설창작 방법의 흐름’ ‘한국의 동시대 소설 읽기’라는 강의 속 학생들의 육성에 가까운 가감 없는 독후감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뿐 아니라 학계 밖 사람들에게 가닿으며, 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그것을 재정의하게끔 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가 읽어내는 ‘학생’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우리는 또 한번 배우고, 바뀌고, 희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