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영님의 북피아 첫 전자책.
서로 끊어질 수 없는 민준, 창현, 연화, 세 젊은이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
제 두번째 완결작입니다. 예전에 완결했던 것을 설정을 약간 바꾸고 한 3분의 1쯤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읽으셨던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지만, 끝은 해피엔딩으로 바꾸었답니다.^^
- 프롤로그
눈부신 햇살이 마당 가득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이제 막 가을내음이 나기 시작한 정원은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무로 인해 온통 연노랑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닥을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을 바라보며 민준과 창현은 한숨을 쉬었다. 화창하게만 보이는 날씨인데, 김회장의 명령 아래 차나 닦고 있어야 하는 신세였던 그들은 답답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나마 혼자 닦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벌써 네 시간째 차를 닦고 있었는데, 그걸 혼자 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던 것이다.
“ 우리 그냥 그만 둬 버릴까? ”
“ …… ”
“ 야, 우리 아버지가 보시든 말든 그만두고 가서 농구나 하자! “
“ …… ”
“ 민준아, 내말 안 들려? ”
“ …하고 싶으면 너나 해! ”
한참만에야 민준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대꾸할 수가 있었다. 그는 화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창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이 자꾸만 그의 신경을 거슬려서 화를 부추기고 있었다.
“ 너 도대체… ”
“ 도련님, 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
윤비서가 부르는 소리에 창현이 노려보던 눈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창현이 걸레를 당연하다는 듯 민준에게 건넸다. 마지못해 받은 민준의 얼굴이 화가 난 사람처럼 벌겋게 변했다.
“ 창현아! ”
“ …… ”
“ 미안해, 화내서… 좀 있다가 농구하자! ”
하지만, 다음 순간 민준은 표정을 바꿔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미칠 것 같은 화를 억누르고 그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김회장에게 학비를 받아야 하는 처지인 그가, 창현과 싸워서 득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창현의 얼굴에 의심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지만 민준은 그가 자신의 사과를 거절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고, 민준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차를 닦기 시작했다. 창현이 한참동안이나 그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민준은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차를 닦았다.
잠시 후 발소리가 멀어지자, 민준은 고개를 돌려 창현의 뒷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민준의 눈엔 창현이 그를 보았을 때처럼 순수한 우정이 아닌 증오의 빛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처음엔 작고 옅은 빛깔에 불과했지만 해를 더해 갈수록 크고 짙게 변해 지금은 민준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겉으론 둘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다. 순수한 열정이 살아있는 얼굴에다 귀티가 줄줄 흐르는 모습을 하고 있는 창현과 차가운 눈을 가지고 있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분위기에 서툰 말솜씨를 가진 민준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짝이었지만, 오래전부터 누구보다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창현은 자신을 입양한 아버지의 기대를 부담스러워 하며 고민하고 있었기에 마음을 터놓을 누군가가 필요했고, 민준은 고아로서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못했던 외로움을 덜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절실한 필요성으로 인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아주 좋은 짝이 되어, 민준이 윤비서에게 끌려 이곳에 들어왔던 11살 때부터 20살이 된 지금까지 우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친하고 비슷한 처지라고 해도 창현은 김회장의 아들이었고, 민준은 고아일 뿐이었다. 그 변할 수 없는 사실이 민준의 마음을 점점 창현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창현이 곱게 앉아 공부하고 도장을 돌아다니며 태권도부터 온 종목을 섭렵하고 있을 때, 민준은 김회장이 장학금을 주는 대가로 저택 잡일에다 집을 지키는 사내들의 싸움상대까지 하며 수도 없이 맞아야 했다. 처음엔 그저 자신과 달리 창현이 편안히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을 부러워했지만, 그것이 반복될수록 부러움이 끝없는 질투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민준이 갖지 못한 것을 모두 가졌지만 정작 잘난 데는 한군데도 없는 창현은 부잣집에 입양되어 이렇게 잘 사는데, 그는 회장에게 빌붙어 살면서 학비를 구걸해야만 하는 처지라니! 그는 그것이 생각할수록 억울하게 느껴졌다. 민준은 요즘 그 감정이 쌓일 대로 쌓여 곧 터져버리고 말 것만 같은 느낌에 자제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의 웃음, 말 하나 하나에 모든 신경이 곤두서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지만, 창현의 앞에서 끝없이 솟구치는 질투는 도저히 자제할 수 없는 본능이었다.
“ 민준오빠! ”
명랑한 음성이 그의 귓가를 스치고 상큼한 사과향이 밀려왔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손이 멈추어졌다. 보지 않아도 향기로 느껴지는 그 아이, 연화가 가까이에 있었다.
“ 또 차 닦는 거야? ”
“ …… ”
“ 내가 도와줄까? ”
“ …… ”
“ 치, 또 말하기 싫다 이거지? 알았어, 알았다고. 가면되잖아!“
연화는 새침한 표정으로 그를 지나쳐갔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뒷모습을 넋 나간 것처럼 바라보며 남은 사과향을 들이마실 뿐이었다. 그가 지금 연화를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게 전부였다.
“ 민준아! ”
잠시 동안 넋이 나갔던 민준은 그에게 다가오는 윤비서의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안쓰러운 눈으로 보는 윤비서를 외면하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 왜요, 윤비서님? ”
“ 회장님께서 오라고 하신다. 그만하고 올라와! ”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걸레를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걸레를 깨끗하게 빨아 널어놓고 옷매무새를 점검한 그는 회장의 서재로 향했다. 그가 막 문을 노크하려고 손을 들어올렸을 때였다.
“ 언제까지 저렇게 내버려 두실 겁니까? 누가 뭐라 해도 민준인 회장님 자식입니다. ”
“ 내 자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최선을 다했네. 내 그늘에 거둔 것만도 난 할 일을 한 걸세! ”
갑자기 김회장의 음성이 민준의 머릿속에 커다란 울림이 되어 날아들었다. 그리고 김회장과 윤비서의 말이 쏟아져 나올수록 처음엔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던 말의 조각들이 점점 맞춰져갔다.
“ 하지만 회장님… ”
“ 글쎄 그만하라니까! 난 그 아이를 한 번도 내 아이라고 인정한 적이 없어. 내 생각으론 지금도 과하다고 여기네. 그나마 거둬주었으면 됐지! ”
“ 하지만… ”
말들이 더 오갔지만, 민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문을 향해 뻗었던 손을 황급히 거둬들인 그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 민준아,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해? ”
멍해져 있던 민준의 눈에 한없이 맑고 깨끗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손을 꼭 잡고 민준을 응시하고 있는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잠깐잠깐 다른 사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눈을 맞추는 모습이 그가 앞에 있음에도 의식하지 않고 계속 이어졌고, 민준은 어떤 사람이라도 침범할 수 없는 그들만의 아름다운 세계를 훔쳐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그들의 아름다움은 민준에겐 쓰디쓴 독이 될 뿐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민준의 가슴엔 절대 꺼질 수 없는 불길 하나가 빠른 속도로 타올랐다.
“ 어, 잠시 다녀올 때가 있어서… ”
“ 어디 가는데, 민준오빠? 나도 같이 가자, 응? 창현오빠 지금 서재에 들어간다는데 기다리면서 혼자 있기 싫어. 회장님 서재에만 들어가면, 창현오빠는 감감무소식이잖아! 회장님은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으신지… ”
“ 빨리 나올 테니까 여기 있어, 연화야! 민준이한테 방해되잖아! ”
“ 아니야, 상관없어. 같이 가자, 연화야! ”
창현은 민준이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렸지만, 민준의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게다가 묘한 미소가 민준의 입가에 걸리는 것을 본 창현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 와… 정말? ”
연화는 다른 때는 말도 안하고 고개만 저으며 거절하던 그가 선선히 승낙하자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워낙 거침없이 사람들을 대하는 연화였지만 항상 민준만큼은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았기에 그녀가 이젠 반쯤은 친하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냥 말이나 한번 꺼내본 것이었지, 실제로 그가 승낙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연화가 거침없이 창현의 손을 놓고 민준에게 가서 팔짱을 끼자, 민준은 그녀를 향해 웃으며 장난스런 말을 속삭였다. 민준은 밝게 웃는 연화의 얼굴을 바라보며, 멍한 얼굴로 서있는 창현을 뒤로 한 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의 인생은 그렇게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