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권리: 흐릿해진 어제와 새롭게 피어나는 나〉
우리는 모두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간다. 젊은 날의 서툰 실수, 어설펐던 관계의 끝자락, 혹은 아프고 쓰라린 기억의 조각들까지. 예전에는 시간이 흐르면 흙이 모든 흔적을 덮듯, 자연스러운 망각 속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곤 했다. 상처가 아물어가듯 기억 또한 희미해지며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는 것, 이는 인간 삶이 지닌 고유한 움직임이었다. 가끔은 가혹하지만 망각은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는 너그러운 선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디지털 시대. 우리의 발자취는 더 이상 흙 위에 남지 않는다. 한 번의 클릭, 한 개의 게시물, 스쳐 지나가는 한 줄의 댓글까지, 모든 것이 원대한 데이터의 바다에 영원히 새겨진다. 사람의 뇌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지만 인터넷은 다르다. 그곳의 기억은 계속 쌓여갈 뿐,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알지도 못한 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정보의 한복판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절실한 질문에 마주한다. “내 지난날의 흔적이 영원히 온라인에 박물관처럼 보존된다면 나는 언제쯤 어제의 나를 벗어나 온전한 오늘을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인류의 대답이 바로 ‘잊혀질 권리’이다. 과거의 실수나 오래된 정보가 끊임없이 따라붙어 현재의 삶을 얽어매는 것을 막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지워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리. 이는 단지 사실을 감추려는 시도를 넘어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디지털 공간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지키려는 절실한 노력이 담겨있다.
어릴 적의 쓰라린 경험이나 한때 스치듯 번졌던 가벼운 이야기가 평생의 따라붙는 흔적이 될 때 우리는 미래를 자유롭게 만들어갈 기회를 잃게 된다. 온라인에 떠도는 지난날의 아픈 기록 때문에 직업을 구하는 일에 좌절하고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들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름에도 디지털 아카이브는 계속해서 “그때 그 사람”을 불러내 우리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잊혀질 권리는 한 줄기 희망의 빛과 같다. 디지털 공간이 개인의 삶을 영원히 가두는 교묘한 족쇄가 아니라 언제든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인류의 간절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권리는 인간이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흘려보낸 시간만큼, 혹은 그보다 더 절실히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날 기회. 그것이 바로 '잊혀질 권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이다.
스페인의 한 개인이 구글을 상대로 자신의 정보를 검색 결과에서 삭제해 줄 것을 요구했던 일련의 사건은 유럽사법재판소에 이르러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법원은 “검색 엔진 운영자는 제3자가 게시한 정보일지라도 관련 정보가 부정확하거나 부적절하거나, 유효하지 않거나, 과도하다고 판단될 경우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검색 결과에서 해당 정보를 지울 책임이 있다”고 선언하며 전 세계 정보 기술 기업들을 일깨웠다. 이 판결은 '잊혀질 권리'를 단순한 개념이 아닌 법적인 실체를 지닌 권리로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결정은 구글 같은 검색 엔진 사업자가 사용자 정보의 흐름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지닌 ‘정보 처리자’임을 명확히 했다. 이 단 한 번의 판결로 유럽은 ‘정보의 바다’에 커다란 등대를 세웠고, 그 빛은 곧 세계로 퍼져나가'잊혀질 권리'라는 새로운 인권 개념의 확산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판결이 없었다면 현재의'잊혀질 권리'에 대한 법적 논의는 훨씬 더디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후 유럽 연합은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발전시켜 2016년'일반 데이터 보호 규정(GDPR)'을 제정하고 2018년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GDPR은 디지털 시대 개인 정보 보호에 대한 유럽의 철학과 비전이 집약된, 인류 정보 법제사에서 기념할 만한 전환점이었다. “개인 정보는 오로지;개인의 것이다”라는 근본적인 전제 아래, GDPR은 적법성, 공정성, 투명성, 목적 제한, 정보 최소화, 정확성, 저장 제한, 무결성 및 기밀성 등 7대 원칙을 제시하며 정보 처리자가 개인 정보를 어떻게 수집하고 보관하며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마련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적용 범위였다. GDPR은 유럽 연합 내에 있는 개인의 정보를 처리하는 모든 기관과 기업에 적용되어 정보 처리자의 위치가 EU 역내에 있지 않더라도 EU 거주자의 개인 정보를 처리하여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그들의 행동을 모니터링한다면 GDPR의 적용을 받게 된다. 이는 '디지털 주권' 개념을 현실화하고 국경을 넘어 유럽 시민의 개인 정보를 보호하려는 유럽의 확고한 의지를 드러낸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정교한 연결망처럼, GDPR은 유럽 시민들의 개인 정보를 빈틈없이 보호하는 안전망을 구축한 것이다.
GDPR 제17조는 '잊혀질 권리', 곧 정보 삭제권을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개인이 자신의 개인 정보에 대한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유들을 제시한다. 정보 처리 목적 달성, 동의 철회, 반대권 행사, 불법적인 처리, 법적 의무 이행, 아동 정보 수집 등 특정 조건이 충족될 때 이 권리가 발동된다. 하지만 이 권리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 정보의 자유, 법적 의무 이행, 공중 보건 분야의 공익 등 다른 권리와 충돌하는 경우 삭제는 거부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알 권리 사이의 섬세한 균형점을 법률 조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서는 이러한 법적, 사회적 변화를 깊이 있게 조명하고 디지털 세상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들까지 안내한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올린 것이 아니거나 접근할 수 없는 웹사이트에 정보가 게시된 경우, 해당 웹사이트 관리자에게 삭제를 요청하는 방법이 먼저 제시된다. 요청 대상을 명확히 하고, 정확한 URL과 스크린샷, 그리고 개인 정보 노출, 명예훼손 등 삭제가 필요한 구체적인 이유를 상세하게 명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때 개인정보보호법이나 GDPR과 같은 법적 근거를 언급하여 나의 권리 행사가 정당함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고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정중하고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강조한다.
도서는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거나 사안이 복잡할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제시한다. '디지털 장의사' 또는 '잊혀질 권리 전문 기업'이라는 새로운 직업군은 의뢰인의 온라인 흔적을 찾아 삭제하거나 접근을 차단하는 전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고 전문적인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한다는 점과 서비스 내용 및 결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짚어준다.
궁극적으로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는 인류가 디지털 시대에 "과연 어떤 공동체를 지향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수렴된다. 과거를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열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진실을 통해 미래를 건설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는 쉽사리 해소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숙제다. 저자는 만약 사회가 '기억을 조작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유토피아적 환상과 디스토피아적 현실이라는 양면적 결과에 직면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고통 없는 삶, 무한한 재기의 기회, 화해와 통합, 효율적인 진보를 꿈꾸는 유토피아적 이상과 동시에, 진실 왜곡과 검열이 만연하는 디스토피아적 냉혹한 현실을 냉철하게 대비시킨다.
인공지능, 블록체인 등 급변하는 기술 발전이 기억과 망각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는 시점에서 저자는 기술의 편리함만을 좇지 않고 인간 존엄성과 사회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윤리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술이 인간의 주인이 되는 대신, 인간의 통제 아래에서 인간다운 삶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계의 심도 깊은 연구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열린 대화를 통해 유연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적 토대와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떤 인간적인 공동체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임을 깨닫게 하여 역사와 공공의 이익이라는 위대한 바위 앞에서 개인의 존엄이라는 작은 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