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전가 교리는 구원의 뿌리가 되는 교리다. 전가 교리는 종종 불필요하거나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가 교리가 없으면 구원은 자동적으로 우리 자신의 행위에 의존하게 되고 구원의 확신은 돌연 확실하지 않게 된다. 존 페스코는 이 교리의 오랜 교회 역사, 주석적 토대, 교리적 정립을 다루면서 이 교리를 살펴본다. 이 책은 첫 아담의 전가된 죄책과 둘째 아담의 전가된 의를 함께 탐구하면서 이 교리에 대해 균형 잡힌 설명을 제공한다.
[추천사]
전가 교리에 대한 역사적 논의를 보면, 비록 세밀한 석의를 보여 주는 경우도 있지만, 전가에 대한 대화와 논쟁을 거의 다루어 주지 않는다. 페스코는 우리에게 전가 교리의 발전 과정에서 종자적 역할을 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페스코가 원죄나 칭의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그의 세심한 작업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이클 호튼
캘리포니아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그레셤 메이첸 조직신학 및 변증학 교수
종종 전가에 대한 책은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고백적 설명이나 역사적 개관 또는 석의다. 존 페스코는 고전적인 개혁주의 방식으로 우아함과 품위를 갖추어, 세 요소를 함께 다룬다. 이 때문에 이 책은 확실히 다음 세대를 위해 남겨진 전가 교리에 대한 표준적인 개혁주의 작품이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안셀무스, 롬바르두스, 루터, 칼빈, 개혁주의 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페스코는 독자들에게 전가 교리의 중요한 역사와 발전을 주로 일차 자료에서 제공하고 있다. 페스코는 많은 저자와 독자가 간과하거나 알지 못하는 현대적인 논의와 논쟁의 핵심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그 풍부한 역사를 현재에까지 끌어온다. 그가 다루는 역사와 신학의 중심에는 일반적으로 전가와 관련된 일부 본문들을 넘어서는 신구약에 대한 신중한 석의의 견고한 기초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전가 교리에 대한 철저하고 접근하기 쉬운 언약 신학적 진술로 수렴된다.
브라이언 비커스
서던 침례 신학교 신약 해석 및 성경신학 교수
[서문]
1990년대에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 책장에는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무언가를 알려 주는 신학 교과서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 책들의 책등에서 월보드, 라이리, 펜티코스트, 체이퍼와 같은 저자의 이름이 대문자와 굵은 글씨로 빛이 났다. 이 책들은 수천 시간의 노력의 산물이었고,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집합적으로 이 책들을 읽었다. 이 신학자 저자들은 종말론, 즉 ‘마지막 때’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들은 또한 기독교 사상의 구석구석까지 폭넓게 다루었다. 이 책들은 세대주의로 알려진 신학 전통의 최고의 학술적 업적이었다.
이 책장은 세대주의와 평생의 관계를 시작했다. 2010년대 초에 위스콘신 대학교(매디슨)의 대학원생이었을 때, 나는 자주 메모리얼 도서관의 방대한 장서, 특히 미국 의회 도서관 주제 BT(교리 신학)로 표시된 서가를 훑어보았다. 내가 펼쳐 본 거의 모든 책에는 페이지 사이에 삽입 종이가 들어 있었다. 3×5인치 종잇장에 “휴거는 없다!!⋯⋯언약은 두 가지뿐이었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속적인 언약이며, 우리는 이 땅에서 환난을 견뎌야 한다”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익명의 저자는 “스코필드와 다른 세대주의자들의 많은 오류”를 ‘퇴치해야 할 오류’로, 이 경우에는 책에 삽입 종이를 넣는 게릴라 전술로 맞서 싸워야 할 오류로 식별했다.
셋째 만남은 2018년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인 마블의 최신 출품작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본 것이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타노스라는 악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계획에는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인류의 절반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마법의 장갑을 조립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타노스가 마침내 영화의 벼랑 끝에서 이것에 성공할 때, 상징적인 슈퍼히어로들은 팬들과 비평가들이 ‘스냅처’(Snapture)라고 부른 것의 희생자가 된다. 스냅처는 휴거에 대한 세대주의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용어다. 내가 처음으로 ‘스냅처’를 보았을 때, 어린 시절의 친숙한 ‘휴거 불안’의 물결이 나를 잠시 엄습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창작자는 휴거 교리에 관심이 없었지만, 원래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 교리의 정제된 이미지는 그래도 미국 대중문화의 상업적 정점에 도달했다.
넷째 만남은 2022년 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92세의 성경 예언 예측가 팻 로버트슨이 은퇴를 앞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쟁을 하도록 “신의 강요를 받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는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더 큰 공격을 위한 ‘준비 단계’고,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결국 예언된 아마겟돈 전쟁으로 확장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었다. 하루 후에 한 기자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로버트슨의 논평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자가 나에게 물었다. “이것이 세대주의자들이 믿는 것입니까?” 나는 너무 복잡한 답변을 했다. 로버트슨의 발언 중 일부는 지정학적 행위자로서의 러시아의 중요성, 이스라엘의 중심적인 위치, 아마겟돈 전쟁의 장소와 같은 전통적인 세대주의적 종말 시나리오와 비슷했다. 이런 맥락의 이야기는 적어도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가 있다. 동시에 자존심이 강한 세대주의 학자라면 아무도 로버트슨처럼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 대한 자세한 시나리오를 그렇게 성급하게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기자는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내 대답이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로버트슨은 서류상으로는 분류될 수 없지만, 실제로 그는 세대주의적 관점에 대한 저명한 대변인이었다.
종합해 보면, 이 순간들은 현대 미국에서 세대주의의 삶의 일부를 보여 준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학적 유산의 일부로 세대주의와 함께 성장했다. 이 그리스도인 중 다수와 다른 많은 미국인은 아마도 종이쪽지나 온라인 메시지 게시판에 나타나는 세대주의에 대한 격렬한 논쟁의 증거를 접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미국인은 휴거의 문화 적응 때문에 휴거에 대해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그 가르침이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으로 식별되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신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다.
다음 페이지들에서 나는 세대주의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대주의의 다양한 궤적과 표현을 설명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 나는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세대주의를 구축한 사상, 제도, 개인의 이야기와 20세기와 21세기에 세대주의가 미국 대중문화의 주류에 진입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한 다음 세대들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본다.
당신이 설령 세대주의적 가르침을 접하며 성장하지 않았어도, ‘스냅처’와 같은 세대주의의 파편을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적그리스도가 이끄는 다가오는 단일 세계 정부에 대해 추측하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들었다면, 종말론적 세대주의를 조금 더 많이 접한 것이다. 당신이 디스토피아(반이상향) 소설이나 프리미엄 TV를 본 적이 있다면, 휴거와 비슷한 사건의 생존자들을 중심으로 한 HBO(미국의 케이블 방송 채널) 드라마 <레프트오버>(2014∼2017)부터, 자신의 넷플릭스 특별 프로그램 <마크 매런: 빌어먹을 종말 따위>에서 “사람들이 병 로켓처럼 하늘로 솟구친다”와 같이 마치 휴거가 상식인 것처럼 언급하는 코미디언 마크 매런에 이르기까지 세대주의 주제의 대중적 흔적을 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세대주의 신학과 그것의 광범위한 유산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당신이 성경의 가장 권위 있는 해석으로서 성경의 ‘평이한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세대주의가 깊이 영향을 미친 논쟁을 접했다. 당신이 성경 예언의 해석을 바탕으로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났다면, 당신은 세대주의 신학이 영향을 준 지정학적 문제 중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다. 당신이 지구가 멸절로 향하고 있다거나, 교회가 쇠퇴하는 세상의 전초기지거나, 사탄의 권세의 음모가 세계 단일 정부를 가져오고 있다고 가르치는 연사들을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세대주의가 깊이 영향을 미친 사고 패턴을 접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 페이지들은 미국 종교와 문화를 더 광범위하게 재고하는 입구이며, 신학 체계의 강력한 힘을 포착하고 그것의 궁극적인 운명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 분명한 영향을 추적하려는 노력이다. 이 책은 그 자체로 세대주의 및 미국 역사를 형성하는 데 있어 세대주의의 독특한 역할에 대한 긴 담론의 또 하나의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