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페스티벌에서 3D영화까지,
리얼리티 TV에서 인터넷 댓글까지
대중문화의 현장에서 발견한
64가지 사유의 씨앗
개념의 예술가가 안내하는 대중문화‘와’ 철학하기
‘개념의 예술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철학자 김용석이 철학과 대중문화의 만남을 주선하는 책, <철학 광장>을 내놓았다.
‘철학’ 하면 가장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말 ‘어렵다’. 그래서 ‘어려운’ 철학을 ‘쉽게’ 전달하고자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를 ‘활용’하는 시도들이 계속된다. 하지만 그런 유의 책이 하나 더 나왔다고 오해하지 말기를. 저자 김용석이 <철학 광장>을 통해 펼치는 것은 대중문화‘로’ 철학하기가 아닌 대중문화‘와’ 철학하기이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 ‘대중문화로 철학하기’에 머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대중문화를 철학적 사유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것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대중문화와 철학이 함께 사유와 해학과 소통의 즐거운 축제를 벌이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중문화와 철학하기’인 것입니다. 글을 써나가면서도 대중문화의 각 작품들이 나 자신을 삶과 앎의 무도회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 ‘여는 말’ 중에서
철학을 학습하지 말라, 철학과 춤추라
<철학 광장>의 부제(대중문화와 필로소페인)를 보다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필로소페인?” 필로소페인은 ‘철학하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표현이다. ‘철학하기’라는 말을 두고 굳이 ‘필로소페인’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우리말 ‘철학하기’에는 ‘학습’의 의미가 강하게 배어 있는” 것 같아서다. 저자는 ‘철학하기’는 ‘학습’을 넘어선 ‘춤추기’라고 말한다. ‘필로소페인’은 학습으로 철학하기가 아닌 ‘춤추듯 철학하기’를 가리킨다.
언젠가 나 스스로 ‘철학하기는 춤추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춤은 아무렇게나 출 수 없습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울려 춤을 추는 한 쌍은 바로 그 자연스러움을 이루어내기 위해 치밀하고 치열한 준비 과정을 거칩니다. 춤의 황홀은 고통을 기반으로 합니다. 대중문화의 각 작품과 철학하기의 관계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대중문화와 철학이 함께 애지愛智의 무도회를 펼치도록 말입니다. - ‘여는 말’ 중에서
철학은 남달리 생각하는 기술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공연이나 방송을 비롯해 광고, 문자,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의 7분야에서 펼쳐지는 총 64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가 말한 ‘필로소페인’이 어떤 것인지 체감하게 된다. 저자는 “철학은 남달리 생각하는 능력이자 기술”이며, 나아가 “상식의 권력이 무시하는 대안들을 보존하고 선택하며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월.E>를 보며 모두가 그 앙증맞은 로봇의 모습에 빠져 있을 때, 지구를 쓰레기더미로 만들고 우주로 도망쳤던 인간들이 은근슬쩍 지구로 다시 돌아오는 상황에 대해 되묻는다. <아바타>에 대해서는 3D기술과 반성적 서부극 유형의 서사, 영혼과 육체의 문제 등과 더불어 자연 친화적인 나비 족이 왜 하필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아니 인간보다 더 뛰어난 모습으로 직립하고 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난타>가 매력적인 이유에 대해서 모두가 시선을 붙들어두려고 할 때 오히려 ‘시각의 분산화’를 통해 관객의 긴장을 풀어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이은결의 <마술 콘서트>를 보면서는 위기의 상황을 연출하는 ‘마술’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결국 ‘안정감’과 ‘편안함’이라는 점을 밝힌다. 비보잉을 보면서 명상을 떠올리고, 뉴스를 보면서는 ‘극단의 패션’이라 말한다. <스팀 보이>와의 만남에서는 과학-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양날의 칼’임을 이야기한다.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 탄생한 휴대전화가 나르시시즘을 충족시키는 ‘애완 기계’가 됐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몸은 곧 ‘나’이지만 살은 결코 ‘나’가 아닌 다이어트에 얽힌 현대인의 비애를 살펴본다.
또한 패션쇼가 ‘허영의 관리’라는 측면에서 윤리적으로 필요한 이벤트라는 관점이나 만화가 문자문화의 마지막 보루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은 그동안 외면해온 ‘패션의 철학’, ‘만화의 철학’이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함을 역설한다.
문자문화 역시 대중문화임을 잊고 있진 않았나
이 책의 또 하나 남다른 점은 바로 ‘문자문화’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문자문화가 대중문화임을 잊고 지낸다. 하지만 베스트셀러에서 인터넷 댓글까지 그 무엇보다 대중문화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 문자문화다. 저자는 ‘자기치유’, ‘자기계발’, ‘설득’ 등 주요 출판 트렌드를 따라가며 문제점을 짚어낸다. 그렇다고 인문학의 권위를 내세우는 건 아니다. 오히려 ‘고전 읽기’라는 트렌드를 경계하며 인문 권위주의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 문자문화 자체가 결국 암호와 해독의 문화임에 착안하여 암호 체계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장르인 추리소설의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한다. 인터넷 댓글 문화와 관련해서는 원고료도 받고 사회?문화적 인정도 받는 기존 필자들이 어드밴티지라고는 ‘익명성’밖에 없는 누리꾼들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인다며 일침을 가한다.
철학의 ‘부챗살 사유’에 문화는 깊어간다
저자는 대중문화와 철학을 ‘깊이와 넓이’라는 기본 아이디어로 서로 연계하고자 한다. 철학의 깊이와 대중문화의 넓이가 아니라, 대중문화에서 깊이를 탐색하고 철학에게는 넓이를 부여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제 ‘개념의 예술가’ 김용석이 기다리는 철학의 ‘광장’에서 ‘대중문화의 깊이’를 만나보자.
하지만 나는 ‘대중문화의 깊이’를 탐색하고 싶습니다. 대중문화 속에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고뇌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미의 깊이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삶의 고통과 희망이 담겨 있고, 비인간적 공동체 안에서 몸부림치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있으며, 과학의 진보와 원시의 향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의외로 ‘오만한’ 현대인의 모습이 있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 본성의 먼 원인에 대한 탐색이 있습니다. 대중문화는 바다와 같습니다. 얼른 수평의 넓음이 눈에 들어올지 모르지만, 그 깊은 심연을 보아야 한다고 깨닫는 순간 확 다가오는 존재의 섬뜩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 ‘여는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