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향형 인간의 시대가 왔다”
은둔과 거리를 사랑하는
어느 내향인의 소소한 기록
이제 ‘내향형 인간’의 시대가 왔다. 첫 산문집 《우아한 가난의 시대》(2020년 문학나눔 선정도서)에서 MZ세대의 만성적인 빈곤감과 우아한 삶을 향한 욕망에 관해 이야기했던 김지선 작가가 이번 책에서는 내향인의 거리두기와 내밀한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지난 2년여간 코로나로 인해 생긴 물리적 거리두기는 사람 간의 심리적 거리두기로도 이어졌다. 그런데 작가는 그 사이에서 묘하고 은밀한 해방감을 느꼈다. 이 ‘떳떳하지 못한’ 감정의 실체는 무엇인가. 내향인에게 거리두기란 ‘국가가 허락한’ 세상과의 거리이자, 자유로움이었다.
원만함이 최고 미덕이었던 한국 사회에서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기적인 사람’ ‘타인과 잘 못 어울리는 사람’ ‘유난한 사람’ 등으로 치부되어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고통스러웠던 팬데믹 상황에서 그간 무시되기 쉬웠던 개인의 시공간이 확보됐다. 공간의 밀도는 낮아졌고 관계의 점도는 떨어졌으며, 홀로 있는 시간이 자연스러워졌다. 집단주의의 관성이 일시적으로 해체되었으며, 개인의 선택이나 행동이 별스러워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열렸다.
작가는 빠른 속도로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 앞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최소한의 거리가 존중되는 세계에 관해 지속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혼자 점심을 먹으며 회복하는 시간’ ‘수치심을 처리하기 위한 장소 마련하기’ ‘안 웃긴 말에 무표정할 권리’ ‘칠흑같이 어두운 시간 활용하는 법’ ‘간장 종지 크기의 사랑일지라도 여러 개 품는 사랑’ 등 한정된 에너지 속에서 작가만의 내밀한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책을 통해 들려준다.
“숨고 싶지만 돈은 벌어야겠고,
부서진 영혼도 수리해야겠고”
이 소란한 세계를 살아내는
‘I’형 인간의 비밀스러운 기쁨
작가는 약속이 취소되면 기뻐하는 사람, 주말에는 조용히 혼자 집에서 회복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사람, 식당이나 카페에 가도 가장 구석자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라면 특히 공감할 만한 내밀한 시간을 보내는 기쁨에 관해 이야기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에서는 내향인의 ‘비밀스러운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비밀이 하나씩은 꼭 필요하다. 작가는 혼자 있는 시간을 해독제로 쓰는 이들과, 소중한 것을 휘발시키지 않기 위해 ‘완전무결한 나만의 비밀’을 남겨두는 법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사무실에 육신을 고정시키고도 앉은 자리에서 정신을 유연하게 만드는 친구의 비결을 배우기도 한다. 때로는 단 한 사람이라도 함께 ‘낄낄’댈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하찮고 자잘하기 그지없는 행복과 불행과 기쁨과 울분을 나누며 힘을 얻기도 한다.
2부에서는 타인과의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며 나만의 온전한 소우주를 지키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한다. 스타벅스의 대형 테이블에 오버로크 패턴의 배열로 앉아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에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내가 지닌 사랑의 총량이 부족하여 힘에 부치더라도 작은 간장 종지 크기의 사랑을 여러 개 준비하는 행위, 좋아하는 가게를 찾게 되면 그 아름다운 장소의 일원이 되고 싶은 마음과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에 숨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는 순간, 주변 이웃이 가까이 다가오면 부담되면서도 환대하고 싶어 하는 감정 등. 누군가에게 섣불리 다가서는 대신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하는 감각에 관해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내향인의 방식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함께 사는 삶에 관해 들려준다. 먼저 다른 건 잘 못 챙겨도 이직하는 친구의 첫 출근 날에는 꼭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마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농담이라는 것은 필요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농담이 있으며 우리에게는 섬세하게 공들여서 설계한 농담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의전 중독’과 경비원·청소 노동자 등에게 향하는 갑질에 관해 꼬집으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감각은 예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배려, 거리감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존중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나의 우주를 지키며 그 우주의 일부를
타인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것”
내밀함이란 나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음을 이해받고,
각자가 원하는 정도와 방식으로
서로의 세계에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작가는 소위 MBTI의 ‘I’형이라 불리는 사람들, 즉 ‘내향형 인간’이란 사회성이 부족하다거나,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피하고 싶어 하는 소심한 부류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가진 에너지의 총량을 인지하고,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해 각자가 원하는 정도와 방식으로 타인과 교류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자기 자신과 더 깊이 만남으로써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와 동력을 얻고 자신의 에너지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재분배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러기 위해 내밀한 감정, 내밀한 시간, 내밀한 장소 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밀함은 타인과 나 사이에 널널한 거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반대의 경우를 만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밀한 대화’나 ‘내밀한 사이’라는 말에서는 나와 타인 간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고 각별한 사이로 만든다. 작가는 내밀함이란 결국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유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각자가 지닌 예민함만큼 거리를 두고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좀 더 많은 사람의 내밀한 기쁨과 행복이 지켜질 수 있기를,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이 존중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추천의 글
에세이스트·《가벼운 책임》 저자 김신회의 말
함께함이 미덕인 사회에서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I’로 일컬어지는 그들은 다 말하지 않는다. 속을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나를 지켜내는 힘이 있다. 자신과 더 깊이 만남으로써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들의 동력은 자기 안에서 나온다.
이 책은 내향성이란 연약함이 아님을, 모자람이나 부적응이 아님을 알려준다. 예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배려, 거리감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존중에 대해 이야기한다. 있는 그대로 편안해지길 원하는 저자의 진심은 나처럼, E로 보이려 애쓰는 수많은 I들을 위로한다. 내가 오해해온 이들에게 가만히 이 책을 건네고 싶다. 그저, 각자의 모양대로 자유로워지자고 속삭이듯이.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내향적이고 어느 정도 외향적이지 않은가.
작가·《아무튼, 잡지》 저자 황효진의 말
‘나를 혼자 좀 내버려둬’와 ‘아니, 혼자 두지 마’ 사이에서 자주 갈팡질팡한다. 나의 우주를 지키고 싶은 마음과 우주의 일부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모순이 아니라는 걸, 김지선 작가 덕분에 알았다. 혼자만의 세계를 가꾸고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은 고립되길 원하는 게 아니다. 모든 이에게 지키고 싶은 고유한 세계가 있음을 이해하고, 각자가 원하는 정도와 방식으로 서로의 세계에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김지선 작가와의 만남을 상상했다. 적절한 표현을 떠올리느라 말을 멈춰도, 그러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러도 초조하지 않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갈 때 같은 지하철을 타게 돼도 괜찮지 않을까? 그라면 내가 서서히 나의 우주로 돌아가고 있음을, 이제 그 우주에는 자신이 나눠준 조각도 있음을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덜 내뱉고 덜 뻗치고 덜 부대끼며 살고 싶은 사람의 소망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담긴 사회의 공기가 희석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고통스러웠던 팬데믹 상황에서 잠깐 그 문이 열렸던 것도 같다. 집단주의의 관성이 일시적으로 해체되었고 개인주의자의 선택이나 행동이 별스러워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열렸다. 빠른 속도로 예전으로 돌아가는 지금, 우리 앞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세계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사적 공간과 코로나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면 하는 최소한의 거리에 대해서 말이다.
점심에 사라지는 사람들은 홀로 있는 시간을 해독제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일과의 한복
판에 잠시 호흡을 고를 수 있는 여백을 만든 사람들이다. 일과 중 1시간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 에너지를 비축할 회복 환경을 구축한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사라지는 이들은 결코 외롭거나 지루해 보이지 않는다. 궁금하지만 들여다볼 수 없는, 결코 들여다봐서도 안 되는 그 세계를 즐거운 기분으로 상상한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1시간은 너무 짧다. 우리에게는 더 긴 점심시간이 필요하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오픈한 개인 SNS 계정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무엇을 노출하고, 무엇을 은폐하며, 무엇을 극적으로 드러낼지를 판단해야 하는 환경에서 누구나 어느 정도는 관종이 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우리는 오로지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나의 일상을 전시하고, 혼자 아는 편이 나은 진실을 털어놓는다. 이에 대한 해독제는 역시나 비밀이 있는 삶에 있는 것 같다.
불면증이 심해서 잠을 자지 못하는 날이 많다는 시인은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갔던 감각들을 예민하게 감지하며 밤 시간을 사용해보라고 권했다. 예를 들면 이불에 맞닿는 코의 감촉, 입안에서 느껴지는 맛, 방 안의 온도, 완전한 검은색도 아니고 선명한 파란색도 아닌, 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며 조금씩 변해가는 어둠의 팔레트들을 감상하면서 말이다. … 처음에는 밋밋하게 느껴지던 시간이 점점 더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낮 시간의 나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요즘 나에게 유용한 것은 에어플레인 모드의 시공간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SNS 포스팅을 보지 않기 위해, 이메일 피드백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타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고도 균열이 생기는 멘탈을 보호하기 위해 가끔 비행기 모양 아이콘을 클릭한다. 평상시에 걸려오는 전화가 많지 않고, 세상을 향한 소심한 거부를 해봤자 알아차리는 이도 없지만 일순간에 모든 것이 차단된 시공간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에어플레인 모드를 해제할 때쯤에는 모든 것이 한결 나아져 있다.
다만 이 사실은 기억해두기로 한다. 그것이 우울한 학교든, 미래가 없어 보이는 조직이든, 어떤 암담한 환경에서도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낄낄댈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씩은 꼭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를 찾아냈다. 함께 낄낄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 때, 그곳은 숨 쉴 수 있는 장소가 된다. 하찮고 자잘하기 그지없는 행복과 불행과 기쁨과 울분을 나눌 시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오늘의 할 일을 해치우고 에너지를 축적한다. 나라는 좁고 편협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낄낄의 힘에 기대 살아간다.
스스로 내향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어도 못 하는 것은 없으며(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노래방에 가서도 책자를 붙들고 어떻게든 버티는 것처럼), 받아들여줄 것 같은 사람에게만 본심을 털어놓는, 즉 발 디딜 곳을 보고 발을 뻗는 사람 정도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모습이 있고 한편으로는 저러한 모습도 있는 사람들의 의외성이 흥미로우며,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을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내가 가진 사랑의 총량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열자식은 거뜬히 거둬 먹이는, 퍼도 퍼도 솟아오르는, 무한한 어머니의 사랑은 환상이 아닐까? 쉽게 지치고 인내심은 곧장 바닥이 나고 하루 종일 허덕이다가 잠시나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간신히 찰박하게 차오르는 사랑도 있지 않을까? 자기애로 충만한 모성도 모성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그릇은 간장 종지 크기가 아닐까?
처음 사용해보는 무인 시스템 내부를 두리번거리다 창문에 붙은 메모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다녀간 사람들이 붙여놓은 포스트잇 조각들이었는데, 주로 ‘콘칩 골드’나 ‘파워에이드 큰 것’을 부탁한다는 요청이 주를 이루었지만 “완전 싸고 좋음!”이라거나 “부자되세요”라는 글귀도 있었다. “여기, 사람 있어요”와 같은 느낌이랄까. 가게에서 만나볼 수 없는 주인은 쪽지에 일일이 답변을 달아놓았다. 아직까지는 사람들이 물건을 사면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를 원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환대가 조금씩 사라져가는 시대에 잔존하는 환대의 조각들이었다.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비로소 지켜지는 세계가 있다. 전 세계가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물결 치고 있는 지금, 우크라이나의 이웃 국가들은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국경을 허물고 있다. 평화로운 한 세계를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 것도, 지지와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있는 것도 이웃이라는 당연한 진실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는, 가깝고도 멀고, 멀고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환경일까? 우리가 유지해야 하는 적절한 거리는 무엇일까?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도 유지됐으면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무언가를 하기 전에 잠시 망설이는 시간,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대신 물러나는 몸짓, 관습을 전복하고 하던 대로 하지 않아 보는 경험들이 귀하다. 무엇보다 잊고 싶지 않은 것은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유해할 수 있다는 사실의 자각과 그로 인한 배려의 감각이다. 원래 우리에게 필요했지만 우리 사회에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감각들이다. 그것은 정확히 각자가 가진 예민함만큼의 거리일 것이다.
유행은 바뀌고 유행을 둘러싼 풍경은 금세 변한다. 그런데 몸에 아로새겨진 감각은 잘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유행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리게 된 것은 나의 두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감각일 것이다. 사물을, 공간을, 세상을 피상적으로 보는 대신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적절한 거리와 여백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시시때때로 나와 세상 사이의 공간에 카메라를 끼워 넣는다. 스스로를 주체가 아닌 객체로, 그러니까 타인의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파티션이 사라진 공동 책상에서 커피를 손에 들고 훈훈하게 대화를 나누던 동료들의 책상에도 한두 권씩 책이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아슬아슬한 책과 서류의 탑으로 구획된 각자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 어렵사리 얻어낸 자기만의 공간에 취향껏 영역 표시를 해놓은 사람들의 책상이 귀엽게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파티션이 사라진다면 현대인의 정신 질환 종수가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모두가 벽을 허물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벽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나는 오래 보아도 알 듯 말 듯한 깍쟁이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 가끔은 자신이 한 말을 뒤엎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복잡성을 관찰하는 일이 흥미롭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단순하지 않은 아이러니를 품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언어가 필요할 때가 있고, 그들이라면 그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언어가 지닌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찬찬히 곱씹으려면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필수적이니, 너무 발 동동 구르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언제든지 나의 삶에 각색, 은둔, 은유의 자리를 남겨두었으면 한다.
사실 우리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것은 이보다 일상적으로 요구되는 의전이다. 배달 음식이 주문되고 도착하여 포장재가 벗겨질 때까지 우아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업무에 열중하는 자, 자신의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당연한 듯이 신입 직원을 부르는 자 등은 개체수가 크게 줄어들었을지언정 현대의 사무실에도 여전히 자리를 보존하고 있을 것이다. 신입 직원 시절의 나 역시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그래, 어찌됐든 저 사람은 어른이니까’ 하며 스스로 위계가 아닌 예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최면을 걸었던 것 같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나에게만 의미 있는 자잘한 성과와 실패가 있으며, 그에 따르는 만족감과 아쉬움이 있다면 매일 똑같아 보이는 하루도 스스로에게는 결코 똑같지 않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고통과 환희의 드라마에 휩쓸려 떠내려가기보다는 아주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는 일상의 결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그 결과가 지루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지루한 인간으로 남는 것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