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맑은 샘 하나가 파였다
일상이 시로 바뀌는 특별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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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생을 압축하면 한 편의 시詩가 된다
이정록 시인의 첫 산문집 《시인의 서랍》 8년 만의 개정판 출간
“생의 구체적인 세부를 성찰하는 촘촘하면서도 그윽한 눈길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으며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이정록 시인이 그 사랑에 힘입어 첫 산문집 《시인의 서랍》을 8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한다. 3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시인은 시집 《어머니 학교》, 《정말》, 《의자》, 《제비꽃 여인숙》 등을 출간하며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어린이 문학으로 영역을 넓혀 동화 《황소바람》, 《십 원짜리 똥탑》, 동시집 《지구의 맛》, 《콧구멍만 바쁘다》 등으로 꾸준히 남녀노소 모든 이의 삶 구석구석에 문학을 전해왔다. 《시인의 서랍》은 엄혹하고 지난했지만 일면 따뜻하기도, 생기 있기도 했던 생의 기록을 이정록 시인만의 해학적이고도 그윽한 시선으로 담아낸 산문집이다. 시인은 시작詩作의 모태가 되었던 지난날의 빛과 그늘을 시인의 서랍에서 고이 꺼내 보인다.
어머니의 아궁이에서, 아버지의 술잔에서
웃음과 눈물이 뒤엉키며 시는 피어난다
1부 〈밥상머리〉는 시인과 시인의 가족 이야기다. 형제들의 죽음으로 평생 절망과 술을 달고 살았던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생의 궤도로 자꾸 끌어당기며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담겼다. 장남인 시인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누나를 향한 미안함, 반지를 팔아 피아노값을 대는 아내에 대한 애정은 시인의 개인사를 넘어 386세대의 애환을 드러낸다. 애증과 달관, 해학이 한데 섞인 이야기에서 독자들은 생이 주는 희로애락애오욕을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돈이니 여자니 술이니 화투니, 재밌고 따순 햇살만 좇아다니먼 패가망신 쭉정이만 수확허니께, 그늘 농사가 더 중허다고 말이여. 걱정거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겄냐? 그 그늘진 담벼락에서 고추도 나오고 취나물도 나오는 거니께 말이여. 어미 말이 어떠냐? 그늘 농사 잘 지어야 인생 늘그막이 방울토마토처럼 주렁주렁 풍년이 되는 거여.”
_〈세상 모든 말의 뿌리는 모어母語다〉, 14~15쪽
2부 〈좁쌀일기〉는 시인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다. 때론 치기 어린 눈물을 흘리며, 때론 황당한 사건을 통과하며 인간 이정록은 깨달음을 얻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누구나 겪을 법한 소소한 일상에서 시인은 시를 건져 올리고, 삶의 도랑 곳곳에 시의 씨앗을 심는다.
“이건 아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그래 새로 시작하는 거야.”
이를 악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순간, 세상은 다시 나를 향해 어머니가 되고 추위를 녹여줄 옷감이 된다. 마음속 넝마는 저절로 벗겨지지 않는다.
_〈처음은 언제나 처음이다〉, 185쪽
3부 〈시 줍는 사람〉은 시를 대하는 시인의 자세가 녹아 있다. 시인은 그럴싸한 ‘왕년의 빵모자’로 시인입네 하지 않고 온몸으로 시를 줍는다. 언제고 가슴을 겨누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시상을 향해 가슴을 내밀고, 어느 때는 짜장면 그릇을 덮고 있는 오후 세 시의 신문지가 되어 시를 쓴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음으로 시를 벼려낸 이정록 시인의 진심이 문장 구석구석에서 느껴진다.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합니다. 지금 전화하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는 것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걸 쓰라고 합니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 합니다. 단언컨대,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습니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다면 어찌 문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지요.
_〈쓴다는 것〉, 209쪽
■ 추천사
이정록 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맑은 샘 하나가 파였다. 그 샘에서 ‘삼베만큼 설운 색깔’의 이야기가 솟았다. ‘젖통이 분 암소의 길’이 어른어른 환하게 춤추며 모난 마음을 주물러주었다. 웃음과 눈물이, 설움과 신명이 합장하며 뭉클, 감동으로 마음을 꽃처럼 피워주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진동하는 그의 글을 읽으며 사람 살아가는 모든 풍경이 새삼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의 글이 피워준 촉촉한 마음꽃. 오래 시들지 않게 세상의 맑은 것들 자주 만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함민복, 시인
서점에서 툭 뽑아 본 시집이 이정록 시인의 《의자》였다. 읽다 보니 시 안에서 충청도에 계시는 우리 엄마 말투가 들린다. ㅎㅎ 그렇게 웃다가 이정록 시인을 알게 되었다. 《시인의 서랍》에는 울 엄마랑 외할머니랑 모두 계신다. 활자를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게 되는 느낌이다. 아니다. 눈으로 듣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이 책을 얼마나 고상하게, 진지하게 읽을까? 난 낄낄대며 읽었다.
-남희석, MC 겸 코미디언
■ 작가의 말
산문집을 꾸리며 느낀 한 가지만 뽑으라면, ‘이짓, 정말 못 하겠다’였습니다. 옷이 다 벗겨진 느낌이랄까요. 산문 어디에서나 왕따가 된 아이가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한구석에서 오소소 떨고 있는 어린 정록이가 안쓰럽게 느껴졌습니다. 그 애가 자라서 시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선생이 되어 이 글을 묶습니다. 혹, 보탬이 됐으면 하고 제 시와 시작詩作의 비밀 서랍을 몽땅 드러내보였습니다. 제 시를 조금이나마 좋아했던 분들이 이 글을 읽고 다 달아날까봐 걱정이 듭니다만, 시집보다 이 책을 먼저 펼쳐본 이들이 제 시를 찾아 읽는 행운도 있었으면 하고 욕심을 내봅니다.
저는 더 좋은 시를 줍기 위해 꽃샘추위 속 꽃망울처럼 다시 실눈을 뜰 겁니다.
■ 본문 발췌
“인생 농사도 그늘 농사라고 혔지. 아내 그늘, 자식 그늘, 지 가슴속 그늘! 그 그늘을 잘 경작혀야 풍성한 가을이 온다고 말이여.”
“그럴듯하네요.”
“돈이니 여자니 술이니 화투니, 재밌고 따순 햇살만 좇아다니먼 패가망신 쭉정이만 수확허니께, 그늘 농사가 더 중허다고 말이여. 걱정거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겄냐? 그 그늘진 담벼락에서 고추도 나오고 취나물도 나오는 거니께 말이여. 어미 말이 어떠냐? 그늘 농사 잘 지어야 인생 늘그막이 방울토마토처럼 주렁주렁 풍년이 되는 거여.”
_〈세상 모든 말의 뿌리는 모어母語다〉
삶이란 게 본시 기름병 주둥이처럼 흘러넘치는 주변머리 없는 것이지만 어머니는 식구들의 열린 병뚜껑을 닫아주시고 거친 손과 투박한 입술로 병 모가지를 훔치고 핥아주셨다. 하지만 당신 자신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부엌에 드시는가. 핍박이 있는 곳에 피난처도 있는 것, 안으로 부엌문을 지그리고 남몰래 훌쩍이던 어머니. 그러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김이 풀풀 오르는 밥상을 차리시고 쇠죽이며 개밥까지 일일이 다 챙기셨다. 부엌은 우리들의 하늘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어리석기만 한 식솔들의 하느님이셨던 것이다.
_〈부엌은 우리들의 하늘〉
이제는 내가 누구의 책방이 되어주고, 누구의 하숙집 냉장고가 되어주고, 누구의 뜨거운 밥솥이 되어줄 것인가? 생각하노니, 손과 지갑이 차갑고도 얇기만 하다.
_〈배고픔과 밀접한 것들〉
시인이란 모름지기 그때그때 데리고 사는 어떤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시정신이나 시대정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시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시의 씨앗이 싹을 들이면, 그 시상의 뿌리와 오래도록 놀아야 합니다. 전광석화처럼 치고 들어온 시상을 쓰다듬으며 오래 데리고 살면, 시는 물렁뼈를 억세게 세우고 비곗덩어리에서 기름을 빼내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버드나무의 상처로 살고, 어느 때는 짜장면 그릇을 덮고 있는 오후 세시의 신문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내 시에 모셔둘 그 무엇들과 십 년 이십 년을 동고동락하는 것이지요. _〈쓴다는 것〉
세상에 파지는 없지요. 흔적 없는 사랑이 없듯이 말이에요.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태워버려도 먹물이 지나간 자리는 어떻게든 붓 잡았던 손길을 타고 올라가 필력이 되지요. 그 어떤 파경의 사랑도 서로의 가슴 저층에 고여 들어가 지하수가 되죠. 그 물은 때로 울컥울컥 솟구쳐 눈물이 되고 한숨을 꽃피우죠. 사랑을 겪는 자의 눈물과 한숨은 애송이들의 숨결이나 칭얼거림과는 그 염도鹽度와 파고波高가 다릅니다. 개펄과 염전이 있느냐 없느냐? 아니, 바다 그 자체의 있고 없음이죠. _〈중심을 잃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