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더 인간적인 사회가 아니라,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라는 질문을 통해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을 강조하는 홍세화 에세이 『생각의 좌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등에 이어 저자가 홀로 집필한 이 책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생각의 뿌리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러한 개인적 성찰이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지도록 한다.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내가 주인이 아닌 내 생각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내가 주체적으로 걸러내지 못한 부모의 요구나 주류 사회의 통념이 내 생각의 자리에 대신 똬리를 틀고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닌가? 특히 그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유하는 자’가 아닌 ‘암기 잘하는 자’를 양산하는 교육 체계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던지는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의 핵심은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주문하는 메시지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이미 ‘생각의 노예’ 상태에 놓인 한국사회구성원들에 대한 쓸쓸한 시선 또한 그 속에 담겨 있다. 이에 저자는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 속으로>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도 계속 고집할 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라고.
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는 다시 말해 ‘근대적 인간’과 ‘중세적 인간’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 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자주 사용하는 익숙한 단어에서 번득이는 지혜를 발견할 때가 있다. ‘학습(學習)’이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다. ‘배우고 익힘’이라는 뜻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습(習), 즉 ‘익힘’이다.
하지만 ‘지적 인종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차별을 부추기는 교육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學)’ 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習).’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이길 것을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인권의식에 대해 이따금 배울 뿐이고, 일상에서는 인권 침해를 몸에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어쩌다 배우고 일상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서열화된 대학구조가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으로 왜곡시킴으로써 학생들의 ‘자기 생각과 논리’를 죽였다면, 각 가정은 아이들의 ‘왜?’라는 질문을 죽였다.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키케로의 말로 전해진다.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 상대방에게 논리로 밀릴 것 같으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함으로써 자리를 모면하는 사람들을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21세기에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는 키케로의 말을 아주 잘 따른다.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났을 때 “당신 몇 살이야?”라고 묻는 나라는 한국뿐일 것이라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남을 설득해본 사람은 안다. 남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오늘날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사회진보가 어렵고 느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만큼 사회진보를 도모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지배세력이 주입한,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의식화나 계몽 대신 나는 ‘탈의식’을 주문한다.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고 세뇌된 의식을 벗고 발가벗은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어내고 존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운동권에서 흔히 ‘의식화’를 말하지만 여기엔 중대한 잘못이 있다. 첫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을 아무런 의식을 갖지 않은 자 혹은 중립적 의식의 소유자인 양 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에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가 관철돼 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