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그렇게 살면 망한다’고 속삭이는 세상에서
나만의 삶을 어떻게 운전할 것인가
밀레니얼 세대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를 통해 날카롭게 진단했던 정지우 작가가 2년 만에 새 사회비평 에세이를 내놓았다. 신작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는 ‘남부럽지 않은 기준’을 정답인 양 정해놓고 시기와 질투심,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시대를 짚어보는 책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속삭이는 시대, 그런 타인들의 잣대가 알게 모르게 개인의 강박이 되는 시대에는 ‘나’의 진정한 선택이 무엇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이런 시대는 무엇이 자기에게 적절하고 옳은지를 주체적으로 풀어내기보다, 타인들의 삶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소리 높이는 이야기들이 주목받는 ‘비난의 일상화’로 추동력을 얻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렇게 살면 망합니다’류의 메시지가 범람하는 유튜브 콘텐츠, 꺼질 줄 모르는 독설의 유행, 타인에 대한 저격 등은 이미 우리를 무감각하게 할 만큼 일상 깊숙이 스며 있다.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는 SNS 문화, 소비 패턴, 연애·결혼관, 일상 곳곳의 혐오와 분열에서 포착되는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딛고 나아가는 데 필요한 태도, 즉 시대의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의연하게 주도하는 태도에 관해서까지 이야기한다. 특히 ‘불신’의 세상에서 타인과 어떻게 온전히 관계 맺으며 나 자신의 삶을 지켜낼 수 있을지 거창한 담론에 기대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사유를 담담히 전개해나간다는 점이 일반적인 사회비평 에세이와 차별된다.
“어쩌면 절망의 시대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고, 미쳐버린 세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모든 시대에는 저마다의 절망이 있으며, 모든 인생에는 어딘지 미친 구석이 있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그런 시대나 사회를 자기만의 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통과해야만 한다. 그럴 때 자신을 지켜주는 건 그 모든 것을 대하는 자기만의 기준과 태도일 거라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런 태도에 대한 것이다.” -서문 중에서
불신의 시대, 타인에게 말 걸기
이 책의 1부 ‘관계: 불신의 시대에 타인을 초대하기’에서는 혐오와 반목이 만연한 사회의 단면들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서도 타인과 의미 있게 소통하며 건강하게 연결될 수 있는 출구는 없는지 모색해본다. 예컨대 성격유형검사 MBTI의 식을 줄 모르는 유행을 두고, 그것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타인을 ‘사랑하지 않기 위한 적극적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누군가를 깊이 알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그를 특정한 틀 안에 규정해, 더 이상 섬세하게 생각할 필요 없는 존재로 고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MBTI의 과학적 근거를 떠나 그 ‘열풍’의 한복판에서 그것의 이면을 살피는 저자의 통찰은 청년층 사이의 유행어인 “반박 시 니 말이 맞음”을 짚어볼 때도 드러난다. 이 말은 보통 ‘나는 그저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니 당신이 반박해도 그 말에 재반박할 의사가 없다’는 태도로 해석되는데 언뜻 봐서는 논쟁이나 토론을 회피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담긴 진짜 뉘앙스는 보다 복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령 내 말이 논리적으로 완벽하지 않더라도 내 말을 한번 들어달라’는 호소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청년 세대는 서로의 ‘다름’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 동시에 자신의 의견이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 사회에서 타인을 비난하는 방식 중에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라는 기준이 절대적이 되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내가 당신에게 공감할 필요가 없고, 당신을 연민할 이유가 없고, 당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나아가 당신을 혐오하거나 비난해도 되는 이유는 그 모든 게 당신의 ‘선택’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사실 한 인간이 인생에서 무언가를 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몇 년 전부터 관심사로 떠오른 ‘문해력 위기’에 대한 시선도 흥미롭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단순히 학교 교육 문제나 독서 부족 등을 떠나, 온라인 세계에 폭넓게 퍼진 이분법적 대립 구조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청소년의 대부분이 이용하는 유튜브만 하더라도 유튜버들 간의 저격 영상 등이 매우 폭넓게 퍼져 있다. 이러한 저격 영상들이 하는 일은 대개 아군과 적군을 나누어, 상대편을 일반화하고 프레임화하면서 악마로 규정하는 작업이다. 언뜻 보면 통찰력을 발휘하여 공격할 대상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이런 일의 핵심은 오히려 상대방의 의도를 ‘곡해’하는 데 있다. (…) 다시 말해 이런 ‘지적 활동’의 핵심은 상대방의 의도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아니다.”
타인을 대하는 방식의 왜곡,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의 미숙함을 그러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저자는 본인 일상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소중한 순간들에 빗대어 독자들에게도 저마다 각자의 출구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타인의 관심사와 무관하게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아재 같음’과 싸우는 방식, 육아를 하며 아이를 통해 배우는 믿음의 기술, 힘들었던 수험생 시절에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의 소중함 등에 ‘불신의 시대에 타인을 초대하는 법’이 녹아 있다.
지도 없는 시대를 건널 때 생각해볼 것들
2부 ‘지도 없는 시대: 삶의 구경꾼이 되지 않는 법’에서는 개인이 기댈 수 있는 공동체가 와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단주의 문화가 개인을 압박하는 현실, 청년들을 자신의 삶에 초대하는 데 실패한 기성세대, 무한경쟁과 각자도생, ‘기승전돈’으로 흐르는 소비문화, 상대적 박탈감으로 모래지옥이 되어가는 사회 분위기 등을 보다 날카롭게 분석한다. 특히 현재 한국 사회를 ‘구경꾼의 시대’라는 관점으로 조망한 점이 흥미롭다. 지극히 개인주의화되고 각자도생이 진리가 된 세상에서 세대·성별·계층·직업·정치적 세력 간 집단 갈등은 점점 더 예민하고 심각해지는 현상, 즉 집단은 약해지는데 집단 갈등은 심화하는 역설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실제로 집단 갈등을 부추기는 이들은 ‘구성원’보다는 ‘구경꾼’들이라고 지적한다. “실체가 있는 집단과 집단이 싸우고 있다기보다는 구경꾼들이 특정 집단을 규정하는 작업을 통해 집단 갈등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가령 한 아이의 엄마가 지하철에서 문제 되는 행위를 했을 때, 구경꾼들은 그에 대해 ‘맘충’이라는 집단적 규정을 놀이처럼 확산시킨다. 특정 사건은 한 특정 인물이 만들어낸 일이 아니라 아이 엄마라는 집단 자체의 속성으로 규정된다. (...) 이렇게 생겨난 양 진영은 언뜻 치열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있는 것은 구경꾼들의 ‘규정화 놀이’에 가깝다. 이 구경꾼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얼마든지 옮겨 다닐 수 있고, 흥미가 떨어지면 그런 놀이에서 빠져나오면 그만이다. 그들은 어딘가에 소속된 집단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특정 집단을 지목하고 만들어서 놀이를 즐기는 개인화된 유령에 가깝다.”
저자가 몇 해 전 칼럼에서 처음 사용했던 용어인 ‘시심비’에 대한 이야기도 여전히 유효하게 논의된다. 시심비란 무엇이든 짧은 시간 안에 얻을 수 있는 만족이 중시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유튜브 영상 재생 시간이나 드라마 시리즈 등이 갈수록 짧아지는 것, 인스타그램 등 이미지 중심의 시간절약적 SNS 문화, 책이 얇아지고 글자 수가 적어지는 추세 등이 시심비 중심 콘텐츠의 유행을 반영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청년 세대에게 시심비가 꾸준히 중요해진다는 것, 즉 ‘시간’이 없다는 것은 ‘정신적인 시간’이 없다는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물리적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게 습관화되면 여유로운 시간이 우연히 주어지더라도 그 시간을 ‘긴 시간’으로 누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시간 여유가 없는 삶 자체가 우리의 정신 구조를 바꾸고 결국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단계까지 갈 수 있다고 저자는 우려한다. 그 근원에는 어릴 적부터 시달려왔던 무한 경쟁, 인생의 모든 걸 스펙으로 평가받는 문화, 촉각을 다투며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청년 세대가 온통 빼앗긴 시간은 누구의 것이 되어 있는가? 누가 시간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가? 누가 시간 부자로 살고 있는가? 모르면 몰라도, 그들은 생존을 건 경쟁에 시간을 갖다 바치지 않아도 되는 어떤 계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 시간은 노동이고 곧 자본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의 핵심에 ‘시간’이 있음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간 불평등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시대에는 저마다의 절망이 있지만
3부 ‘돌파와 회복: 저질러놓은 세상을 건너며’에는 얼핏 답이 없어 보이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의지와 태도가, 1·2부에서 견지하는 비평적 시선에 더해 작가 개인의 이야기 곳곳에 더 깊이 녹아 있다. 먼저 ‘팬데믹’이 휩쓸고 간 이후 사회의 어떤 취약한 면이 드러났는지, 또는 일상의 회복이라는 미명하에 감춰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 고립과 해체의 시간,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결핍과 슬픔에 관해 차근차근 짚어본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아이들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한국 사회를 일컬어 대한민국 자체가 거대한 ‘노키즈존’이 되어가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전체 인생 중 아주 일부에라도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이 아닌 다른 의미를 둘 여지가 있다면, 그 여지를 미래의 아이들에게 열어주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이후 세대의 희생에 발 딛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적 위기, 부동산 버블 현상, 양극화, 국가 부채 증가, 각종 연금이나 기금의 고갈, 차별과 혐오의 문화 같은 것들은 모두 후대에 미뤄둔 폭탄과 같다.”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했듯 “어쩌면 절망의 시대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고, 미쳐버린 세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는” 시대를 산다고 느낄 때가 있지만 “한편으로 보면 모든 시대에는 저마다의 절망이 있”다. 결국 그는 누구나 그런 시대나 사회를 자기만의 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통과해야 한다며, 자신이 특히 서른 넘어 처음으로 법학이라는 영역에 도전하면서 이러한 ‘삶의 구명조끼’와 같은 것들에 대해 절실히 생각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학비를 벌면서 공부해야 했던 건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였고, 로스쿨 첫 학년에 아이가 태어나 새벽 내내 법전을 넘기며 아이가 깰 때마다 분유를 먹이는 일상이 시작됐다. 설상가상 아내가 타 지역으로 복직하면서 그는 아이와 둘이 잠드는 밤마다 중압감과 초조감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한 시절을 보내며 자신을 버티게 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살아낸다는 것의 절실함에 대해, 그 가운데 손을 잡고 나아가는 사람들의 힘에 관해 하루도 빠짐없이 글로 적어냈다.
“삶에서 사실상 거의 첫 직장 생활이라고 할 법한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했지만, 역시 그냥 매일같이 사람들 쫓아다니며 물어보고 수십 번씩 지적받고 그래도 또 뛰어다니다 보니 부지런히 배우고 적응하게 되었다. 사람은 항상 무엇이든 하기 전에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어떤 일에 대한 편견, 선입관, 두려움 같은 것에 휘어잡힌 채로 한 걸음을 떼지 못할 때가 참 많다. 그러나 막상 들어서면, 막상 닥치면 어떻게든 하게 되는데 지나고 나면 그 시절의 두려움이라는 게 다 무엇이었나 싶기도 하다.”
좌절과 냉소의 세상에, 특히 ‘청춘’의 좌절과 냉소가 당연해진 시대에, 젊은 작가이자 아빠이자 이제 막 법조인의 길에 새롭게 들어선 그가 날카롭고 차분하게, 삶에 대한 긍정과 믿음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풀어내는 글들은 오랜 경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던 시인의 말을 혐오와 분열의 시대에 새로이 불러낼 것이다.
본문 중에서
타인들을 구경하면서 비난하거나 혐오하고, 시기와 질투심,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이 끊임없이 조장되고, 닮고 싶은 선례보다는 반면교사가 넘쳐나는 시대에 대해 묘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시대의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태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자 했다. (…) 이처럼 사회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고자 한 점이 전작인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와의 차이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요?” 하는 습관은 ‘관심’에 대한 무서움과 갈구가 모두 담겨 있는 시대를 보여주는 유행어가 아닐까 싶다. 유명인들을 보면, 한순간에 떠서 잘나가다가도 몇몇 사소한 정보나 과거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거의 모든 정보는 공격 대상이 될 수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을 걸고 넘어뜨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는 관심을 갈구하는 ‘외로운’ 시대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추앙’받길 바라며 SNS에 자기를 전시하기도 하고, 그 누군가에게는 화색이 도는 표정으로 “저요?”라고 말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선택을 절대시하고 선택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며 누구나 자기의 선택에는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사고방식은 상당히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사실 한 인간이 인생에서 무언가를 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 대개는 살아오면서 누적된 상황, 자기도 모르게 받은 상처, 원했든 원치 않았든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적 선택지, 어쩔 수 없이 내몰리게 된 입장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강요당한 선택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문해력 또는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타인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뜻이다. 나아가 뇌가 그럴 ‘용기’를 학습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적으로 계속 자기 이해, 자기 입장에 익숙한 방식에만 길들여져서 그에 갇혀버리는 폐쇄성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문해력을 이야기할 때 거의 거론되지 않지만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에는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의 범람이 있을 것이다.
‘결혼 또한 하나의 시작이며 주춧돌이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모두에게 결혼은 연습 같은 것이며 육아 역시 다들 낯설고 생경한 경험이지만 그렇게 배워나가는 것이다’라는 식의 기성세대적인 훈계는 거의 의미가 없다. 당장 인생 전체가 각종 할부, 빚, 이자, 온갖 리스크 등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시대에, 청년 세대는 그런 ‘위험’을 굳이 감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타인들의 삶에 대한 저격은 늘 일정한 쾌감을 동반한다. 타인들의 삶을 깎아내림으로써 자기 삶은 괜찮다는 위안을 얻는 일이 그 속에 숨어 있다. 또한 내가 타인의 삶을 규정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힘의 확인’에서 오는 쾌감 또한 적지 않다. 한 명의 방구석 심사위원처럼 세상 모든 삶을 평가하고 비난하면서 마치 힘을 가진 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책감 또한 중독적인 쾌감을 불러올 수 있다. 스스로를 꾸짖는 일은 그 자체로 자신이 보다 나은 삶에 대해 알고 있다는 ‘앎의 쾌감’을 준다. 자책감이 일종의 피학적인 쾌감을 동반하는 이유는 ‘꾸짖는 자’와 ‘꾸짖음을 당하는 자’가 결국은 모두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하이퍼 리얼리즘의 유행은 우리 시대 ‘구경꾼 문화’의 연장선에서도 볼 수 있다. 세상 모든 게 구경거리가 된 시대에서, 우리 일상 또한 더 적극적으로 더 리얼한 구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구경하면서 품평하고 비웃고 깔깔댄다. (…) 그러나 때때로 그 속에는 깔깔댐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때도 있다. 가령 ‘틀딱충’, ‘맘충’, ‘개독교’ 같은 말들이 거론되면서 특정 집단에 프레임을 씌우고 조롱의 대상으로 확정된 집단을 향한 혐오를 확산시키는 순간이다.
무엇이든 적당히 애쓰면 얻을 수 있는 것은 굳이 강조되지 않는다. 굳이 전 사회가 광적으로 몰입하는 게 있다면, 그만큼 그것을 얻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생에 필요한 ‘적절한 돈’이라는 것에 더 이상 손쉽게 접근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동안 누적되어온 계층 간 격차에 더해, 지난 몇 년간 폭등한 부동산은 사실상 한 개인의 소득으로는 ‘적절한 돈’을 평생 버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불가능성이 한 시대의 선망, 동경, 갈망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란 우리 사회가 어떻게든 간신히 이어왔던 취약한 부분들이 폭로되는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태권도장 하나 문 닫아버리는 것으로 경력단절여성이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취약해진 어느 가정의 수입구조는 다시 빈부격차를 심화시킨다. 그 시점에 집이라도 하나 가진 사람은 그나마 사정이 나을지 모르겠으나, 둘이 열심히 벌어 집 한 채 가지자고 마음먹었던 가정은 사실상 그런 최소한의 미래 계획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한 시대의 위기가 어느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비바람이라면 다른 어느 가정, 어느 집단, 어느 계층에는 유달리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삶이 적당한 구속으로 채워져 있을 때는 그 구속의 틈새를 더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필사적이 되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는 로스쿨을 다닐 때 그런 상황이 절정을 이루었다. (…) 사람들이 하나같이 로스쿨 다니고 육아하면서 어떻게 책을 몇 권이나 썼는지 물어보곤 했는데, 그럴 때면 오히려 그런 상황이 더 집중적으로 시간을 쓰는 데 도움을 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학비를 벌어야 했고 글쓰기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 와중에 낼 수 있었던 하루의 극히 적은 시간을 온전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에만 쓸 수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쎄함’은 과학이다” 같은 말이라든지, 타인에 대한 즉각적인 호감과 비호감을 나누는 경향, ‘시발비용(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비용)’이나 ‘가심비’, ‘시심비’처럼 자기 느낌에 주목하는 소비 생활, 내면에서 자기 마음에 가장 맞는 꿈을 찾으라는 명령 등은 모두 개인의 느낌에 매우 대단한 것을 부여하고 있다. 또 내가 아는 한,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은 ‘사람을 잘 본다’고 하는데 이 또한 시대적으로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의 느낌, 직감, 직관 같은 것을 신뢰하도록 부추겨지고 있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