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희미한 진실과 사소한 거짓이 섞여 구분이 안 되는 채로. 소설처럼.”
한국일보문학상·한무숙문학상 수상 작가 최제훈 신작 소설
공포가 아니라 어긋남을,
사건이 아니라 떨림을,
결말이 아니라 기척을 남기는
기묘하면서도 귀여운 15편의 짧은 소설
최제훈의 신작 소설집 《아뇨, 아무것도》가 한겨레출판에서 출간되었다. 《퀴르발 남작의 성》, 《일곱 개의 고양이 눈》, 《나비잠》 등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가는 이번 작품집에서 일상 속 미묘한 균열과 어긋남을 포착한 15편의 미발표 짧은 소설을 선보인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불투명한 틈새들을 응시한다. 겉으로 보면 별거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그렇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 감각들을 탐색하고 그 안에서 말랑말랑하고 기묘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 작가의 뛰어난 필력 아래에서 백지와 검은 글자 사이, 현실과 인식 사이,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틈이 천천히 벌어지며 어긋남과 떨림, 기척을 품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아뇨, 아무것도》에 수록된 단편들은 별거 아닌 기분에서 출발해 불투명한 틈새로 향한다. 등장인물들은 낯선 리듬에 휘말리거나, 무심한 현실이 애써 지나친 감정의 흔적들과 마주하고, 너무 오래 말하지 않아 잊힌 질문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별거 아닌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별일은 없었던’ 하루에도, 그 안에 오래 머물던 이상한 기분들을 떠올리게 된다. “아뇨, 아무것도”라는 말끝에 머뭇대다 놓친 숨처럼. 책을 덮은 후에도, 여전히 다가올 일상에서 작가의 문장들은 독자 스스로 감지하게 되는 기척이 된다.
무엇보다 이번 소설집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의 판타지’를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어긋나게 하는 독특한 서사에 있다. 작가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속에서 기묘하고 수상한 기척을 포착해낸다. 표제작 〈아뇨, 아무것도〉의 평범한 주인공이 택시 안에서 미래를 볼 수 있다고 고백하는 신입사원을 만나는 것처럼, 15편의 이야기 곳곳에서는 평범해 보이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전개가 펼쳐진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작가가 포착하는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적 변화들이다. 〈테니스를 쳐야 하는 이유〉의 세계 랭킹 1위 테니스선수가 갑자기 테니스를 치기 싫어지거나, 〈물과 숨〉의 주인공이 수영을 배우며 점차 물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은 우리 내면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욕망의 본질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48시 편의점〉처럼 농담처럼 보이는 상황을 다루면서도 독자를 완전히 몰입시키는 것은 작가의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 때문이다. 24시간 혼자 편의점을 운영하는 점장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일상 속 불가해한 현상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잘 짜인 이야기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떨림을 느낀다.
작가는 이번 작품집에서 전작들을 이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한층 더 자유로워진 상상력을 보여준다. 〈여기는 게이바가 아닙니다〉처럼 유머러스한 작품부터 〈후미등」 같은 스릴러적 긴장감이 넘치는 작품까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폭넓은 스펙트럼을 선보인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든 작가 특유의 기묘하면서도 수상하고 그러면서도 귀여운 시선이 일관되게 관통한다.
〈마트료시카〉는 이번 소설집의 백미로, 글을 쓰는 작가가 자신 역시 누군가의 소설 속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메타픽션적 상상을 펼쳐내는 소설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창작의 본질과 현실과 허구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글들은 대부분 그냥 썼다. 청탁 없이 마감 없이 분량 제한 없이, 그냥 쓰고 싶어서”라고 밝히며, 순수한 창작 욕구에서 출발한 작품들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창작의 마음이 만들어낸 15편의 이야기야말로 독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사유의 여지를 선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뇨, 아무것도》는 일상의 틈새에서 발견하는 작은 균열들이 어떻게 우리의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작품집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삶의 새로운 층위를 발견하게 되길 기대한다.
■ 책 속에서
자신의 빈 마음이 무엇을 헤집었는지 알지 못한 채, 깊은 밤은 다시 혼자가 된다. 친구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깊어져간다. _〈깊은 밤〉
“우리는 날지 ‘못하는’ 새들이 아니라 날지 ‘않는’ 새들입니다. 창공을 누비는 자유를 반납하고 대지의 품에 안기기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죠. 자유롭지만 공허한 하늘 대신 생명의 기운이 순환하는 흙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_〈날지 않는 새들의 모임〉
어린 시절 난 매주 꼬박꼬박 〈전설의 고향〉을 방영하는 KBS의 악취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소복 차림에 머리를 산발한 채 입가로 피를 흘리는 처녀귀신, 시체의 간을 파먹는 구미호, 두레박을 타고 스르르 올라오는 우물귀신, 이목구비가 없는 달걀귀신, “내 다리 내놔!”라고 외치며 깽깽이걸음으로 쫓아오는 외다리귀신…… 그 다양한 귀신들의 고향이 어디이며 구구절절한 사연이 무엇인지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_〈딜레마〉
저를 아세요?
그럼요. 당신의 부피를 기억해요. _〈물과 숨〉
도피가 아닌 도취로써 현실을 초월하는, 글쓰기가 감히 즐거워지는 순간이다. _〈미저리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스포일러 있음〉
“조만간 그런 바에 갈 일이 있을 거예요. 제가 보는 장면이 아주 먼 미래는 아니거든요. 거기서 대리님은 ‘아뇨, 아무것도’라고 말하게 될 거예요.” _〈아뇨, 아무것도〉
30여 명의 게이와 두 명의 레즈비언과 한 명의 이성애자가 모인 비운의 게이바, 누벨 아테네의 마지막 밤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_〈여기는 게이바가 아닙니다〉
저는 초능력을 가진 남편과 함께 늙어갈 겁니다. 아주 지겨워 죽겠어요. _〈초능력〉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희미한 진실과 사소한 거짓이 섞여 구분이 안 되는 채로. 소설처럼. 장미가 없는 장미의 집처럼. _〈친구의 연인의 친구들〉
그렇게 전통과 현재는, 상상과 행위는 또 한번 타협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튀김옷을 입고 노릇하게 튀겨진 채로. _〈타협〉
“당신이 테니스를 쳐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아름다움도 이 세상에 꼭 존재할 이유는 없는 것이지요.” _〈테니스를 쳐야 하는 이유〉
그때 내가 보았던 호랑이, 코끼리, 얼룩말이 그대로 있을 수도 있고 그들의 후손으로 대체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나는 알아채지 못할 테니까. _〈하이델베르크의 동물원〉
내 침묵의 절규는 타이어 마찰음에 묻혔다. 붉은 후미등이 빠르게 멀어져갔다. 나를 인적 없는 시골길에 남겨놓은 채. _〈후미등〉
우리 주위엔 그런 불투명한 틈새들이 있다. 별거 아니긴 한데 생각해보면 이상한, 그렇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 그 기분이란 게 일상을 둘러싼 제방에 구멍을 내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무시가 아닐까 미심쩍은, 그래봤자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예를 들면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24시 편의점이 그렇다. _〈48시 편의점〉
헤매기만 하다가 종이 위에 족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실종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_〈마트료시카〉
마트료시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