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이윤주 작가의 3년 만의 신작 산문집이다. 마흔의 문턱에서 중증 우울증을 진단받은 작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 안에서, 정신병동에서, 동생네 집에서, 이국의 거리에서 오롯이 ‘나’를 되찾기 위한 시간을 보낸다. 이 책은 그 시간 동안의 조용한 기록이자, 우울과 함께 살아가며 읽고 쓰고 본 것들에 대한 ‘마음 일기’다. 전작이 쓰는 시간 속에서 마음을 회복하는 이야기였다면, 《고쳐 쓰는 마음》은 ‘고쳐 쓰는 마음’ 그 자체에 집중한다. 작가는 4개 부, 50편의 글을 통해 우울증을 겪고 회복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고쳐 쓰는 일이 만만하진 않다. 고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라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마음을 고치는 도중에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이 책은 우울증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를 되찾고 싶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새로운 내일을 선물할 것이다.
■ 추천의 말
원고를 읽으며 두 가지 면에서 크게 놀랐다. 그건 작가가 이토록 솔직해도 되는 걸까 싶게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극도로 정확한 관점에서 자기 문제의 핵심을 짚어낸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흔을 통과하며 작가에게 찾아온 극심한 우울은 그를 걸려 넘어지게 만든 돌부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것은 돌부리가 아니라 인생의 행로를 다시 설정하게 하는 도움닫기 판이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가 통과해 온 우울의 터널은 그만의 특수성과 고유성에 기반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작가만의 것을 넘어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삶과 엇박이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누구나 “어린 존재” 하나쯤 감추고 사니까. 그럴 때, 우울을 미화하지도 냉소하지도 않는 작가의 태도를 기억하며 “내일을 믿고 기대하고 감당하는 쪽으로” 한발 한발 따라간다면 우리도 우리 각자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나면 진짜로 살아보고 싶어진다. 책 속에 존재하는 뜨거운 불이 내 안으로 옮겨붙는 기분이 든다. 힐링이라는 말이 지겨운가. 적당히 따뜻한 것 말고 뜨거운 이야기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이 책을 펼치시기를. 그리하여 당신이 삶의 질서를 재편하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생생하게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_안희연(시인)
■ 책 속에서
고쳐 쓰는 일이 만만하진 않다. 고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라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마음을 고치는 도중에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그 풍경을 굳이 봐야 하나. 보는 게 의미가 있을까. 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우니까. 어떤 아름다움은 고통을 지불했을 때만 찾아오니까. 물론 적당한 고통이어야 할 것이다. 너무 큰 고통은 아름다움을 느낄 힘마저 빼앗아 버린다. 마음이 너무 크게 해지기 전에 미리미리 고쳐두는 일이 그래서 필요한 것 같다.
돌아보면 이 시절 또한 찬란히 젊었구나 할 것을 알면서, 30대가 끝난 뒤 나이 듦에 대한 감각 때문에 종종 침울해진다. 얼굴의 주름이나 늘어가는 군살 따위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40대라는 숫자가 주는 압력에 짓눌릴 때가 있다. 사십이라니.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는데 사십이라니. 무얼 상상하든 그와는 다른 것을 주는 인생의 법칙에 걸맞게 나의 마흔 또한 뜻밖의 형태로 다가왔다.
봄꽃이 지고 더위가 찾아올 무렵 중증 우울 에피소드가 시작됐다. 모든 것, 그야말로 모든 것이 멈추었다. 다니던 직장, 가꾸었던 관계, 반복되던 일상, 계획한 일들, 누리고 느끼던 감정들, 생을 떠받치는 크고 작은 의지 전부가. 걸려 넘어지다, 라는 표현은 그럴 때 쓰는 것임을 경험했다. 40대의 문턱에 나는 완전히 걸려 넘어졌다.
겨우내 모든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맨몸을 드러낸 채 서 있던 나무들처럼.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돌아온 계절만큼 늙어 있긴 하지만. 직장도 없고 갈 데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사람은 원래 생의 절반쯤에서 길을 잃곤 한다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않기로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었더라도. 중요한 건, 늦었음에도 그냥 하는 마음.
요즘 나의 별명은 ‘오억만’이다. 딱 5억만 있으면 좋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말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다’는 게 핵심이다. 1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이 말썽일 때마다 중얼거린다. “오억만 있었어도 노트북 당장 바꿀 텐데.” 반려동물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오억만 있으면 좋겠다, 고양이 키우게” 하고, 주방에서 대파를 어슷어슷 썰다가 문득 허리를 펴고 “오 이런, 오늘도 오억이 없네” 한다.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지중해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듣고는 “오억이 생기면 나도 이탈리아에 갈 거야” 대꾸한다. 단골 국숫집이 가격을 2000원이나 올린 것을 알고 시름에 잠겼을 때도 탄식한다. “아 진짜, 내가 오억만 있었어도…….”
밤이 오래 흐른 뒤 다시 만만을 만났다. 내게 바짝 몸을 붙인, 정말 오랜만에 나타난 나의 만만은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문장들을 주었다. 진짜 아름다운 문장은 ‘아름다운’ 형태로 나타나기보다는 이런 식이다. “네가 정말로 재가 되어버려야 한다면, 그게 지금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파국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작가는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인다고 했다. 참혹하도록 용감한 문장이 한쪽 날개가 되어주었다. 이쪽 만만과 저쪽 만만의 날개가 동시에 허공을 내리치는 순간. 지금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정말로 재가 되어버려야 한다면.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편집자가 아닌 나를 승인하고 만만과의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리베카 솔닛은 그의 책에서 캘리포니아 중북부 원주민인 윈투족의 언어를 소개한다. 윈투족의 언어에는 ‘오른팔’이라든가 ‘왼쪽 다리’라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자신의 몸을 가리킬 때 오른쪽/왼쪽 개념 대신, 동서남북 방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윈투족이 산을 오를 때 모기가 그의 ‘서쪽’ 팔을 물었다면, 산을 내려올 때 그는 ‘동쪽’ 팔을 긁게 된다. 윈투족의 세계에서는 ‘나’가 기준이 되지 않는다. 고정된 것은 세상이며 자신은 주변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 한때의 것, 곁딸린 것이다. 윈투족은 길 잃을 일이 없다. 관계 맺을 세상이 있는 한. 지평선과 산등성, 해와 별, 숲과 강이 있는 한.
또 이런 건 어떨까. 이번 주에 책에서 읽은, 진실보다 좋은 거짓말. 한 할머니가 일흔여덟에 노인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나이 되도록 한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게 부끄러워서 그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일흔다섯이라고.
그 거짓말은 오래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올겨울 서울엔 눈이 잦다. 눈이 오면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 하늘이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는 듯.
하지만 세상에는, 세상 쓸데없는 이야기를 떠들어야만 세상의 가혹함을 겨우 견뎌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욕망하고, 유혹하고, 이해하고, 만지고, 가여워하고, 염려하고, 그리워하는 일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긴다. 그게 철없는 일이라면 이들은 철없는 게 맞다. 하지만 사시사철 철든 인간이란, 얼마나 지루한가.
옛날 옛날 어느 봄의 한가운데. 직장에서 몇몇이 모여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엄격하고 일 잘하기로 유명했던, 속으로 많이 좋아하고 존경했지만 내겐 너무 까마득히 높아 보였던 한 선배가 말했다.
“나는 봄이 되면 벚꽃 만개한 밤길을, 눈부시게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걷고 싶어져.”
어제저녁에 뭐 먹었는지 말고는 다른 얘기 하는 거 아니라는 ‘직장 동료’ 사이. 어떤 욕망은 봄 햇살 속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웃으며 핀잔하는 사람들. 복잡한 의미의 탄식들. 어머머, 알고 보니 위험한 분이셨어!
선배는 웃지 않고 덧붙였다.
“나란히 걷고 싶다는 거지, 내가 뭐 지금 가정을 뒤집어엎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 주말 벚꽃이 만개했다. 고작 사나흘 정도를 위해 맹렬히 튀어 오르는 우주의 팝콘.
마흔의 어느 날, 나는 간절히 위로를 얻고 싶었고 그 위로를 책에서 구하고 싶지 않았다. 영화나 음악이나 그림에서도 구하기 싫었다. 그럴 힘이 없었다. 수많은 청중 가운데 하나가 되어 내게 위로를 건네줄 사람을 기다리고 싶었고 그런 위로가 힐링이라면 그걸 힐링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었다. 힐링을 원하는 나의 마음에 판관을 세우고 싶지 않았고 다만 힐링으로써 마음에 링거를 놓고 싶었다. 그런 날이 있었다. 그런 날도 있었다.
남들 하는 불행은 해봐야 한다는 E선배의 단점은 가끔씩 다리를 떤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그 정도는, 자신의 불행을 자신의 고유함으로 단련해 온 인간에게 허용되는 수준의 흠일 것이다. 내 친구 P가 약속 시간에 자주 늦는 것, S가 유난히 입이 험한 것, H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종종 잊는 것도. 그들이 자기 인생의 무겁고 유일한 과제를 해나가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한 흠들을 나는 어느 순간, 기꺼이 양해하게 된다. 당신의 흠을 쉽게 흉볼 수 없게 된다. 당신을 잘 알지 못하는 만큼 당신에게 너그러워진다. 내가 지나온 우울, 또는 불행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