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나의 인생은 죽은 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뒷배는 죽은 자들이다”
한국 인권운동의 이정표 박래군이 기록한
고통과 상처, 회복과 희망의 길
인권운동가 박래군(朴來群)은 한국 사회의 야만적 인권 현실과 싸우면서 인간의 기초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몸과 생애를 바쳐왔다. 그는 무상(無償)으로 헌신(獻身)했다. ‘헌신’이라는 두 글자는 그의 삶을 정확히 요약한다. ‘무상’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 _김훈(작가)
세계 인권의 날이자 세계인권선언 77주년을 맞는 2025년 12월 10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권운동가 박래군의 책이 출간되었다. 신간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는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곳들을 직접 겪어낸 저자가 기록한 자전적 에세이이자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은 치열한 비망록이다.
저자 박래군은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사무국장,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를 거쳐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장,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사회의 그늘진 곳을 조명해 왔다. 현재는 재단법인 인권재단 사람 이사와 4·16재단 운영위원장,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는 지난 45년간 의문사 진상 규명, 고문 철폐, 장애인 시설 인권 유린 고발,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각종 재난 참사 진상 규명 및 유가족 지원 활동 등 수많은 인권 현장을 지켜왔으며, 이러한 헌신을 인정받아 들불상, NCCK 인권상, 임창순상 등을 수상했다.
이 책은 그런 저자가 《한겨레》에 연재했던 〈박래군의 인권의 꿈〉 시리즈를 다듬고 보완해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저자의 ‘3막 인생’ 중 가장 치열했던 2막, 즉 인권운동가로 살아간 45년 동안의 고통과 상처, 슬픔과 환희가 교차했던 격동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박래군의 말과 활동이 소개되어 왔지만, 이 책에서는 그만큼 박래군의 고뇌와 아픔 등 보다 내밀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책의 깊이를 더하는 요소들도 주목할 만하다. 기자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김훈 작가가 저자를 직접 심층 취재해 집필한 10여 쪽에 달하는 추천사는 묵직한 울림을 준다. 또한 책 말미에 수록된 ‘부록 연표’는 독자들이 저자의 삶을 따라가며 한국 인권운동의 거대한 흐름과 변천사를 한눈에 조망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를 통해 독자는 그동안 우리가 차갑게 외면해 온 국가 폭력과 참사, 차별과 배제의 현장을 생생히 마주하게 될 것이다. 또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늘 ‘곁을 지키는 사람’으로 살아온 박래군의 삶을 통해, 혐오와 차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길을 잃지 않고 끝내 지켜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학청년이 야만의 시대와 온몸으로 맞서게 되기까지
총 5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첫 장은 평범한 문학청년이던 저자가 1980년대라는 시대와 맞닥뜨리며 세상을 자각하고 운동가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연세대 입학 후 원재길, 성석제, 기형도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거쳐 간 ‘연세문학회’에서 소설가를 꿈꿨지만, 최루탄 연기로 전쟁터가 된 교정을 보며 “편하게 글만 쓰고 있을 수는 없다”는 부채감을 느낀다. 이후 1983년 4월 19일, 학내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저자는 제대로 된 입영 절차조차 밟지 못한 채 강제징집되어 최전방으로 끌려간다. 1985년 제대 후에는 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학출’로서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나, 1986년 한미은행 점거 시위를 계기로 구속된다.
저자는 1장에서 인생 첫 투옥 경험을 털어놓으며 이때의 경험이 자신을 ‘활동가로 단련시켰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이 덤덤한 회고 너머로 전해지는 당시의 상황은 젊은 청년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농사일로 뒷바라지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보장된 미래마저 포기한 채 혁명을 꿈꾸며 스스로 ‘나는 독한 놈이었다’고 자부했으나, 그조차 당시 만연했던 고문과 폭력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혀를 깨물자, 그러면 포승줄을 풀어줄 것 아닌가? (중략) 하지만 퉁퉁 부어오른 상처보다 더 끔찍한 건 내 마음이었다.”라는 고백, 혀를 잘라서라도 저항하려 했으나 끝내 굴복해야 했던 청년 박래군의 좌절과 자괴감은 국가 폭력이 개인의 내면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내 슬픔이 세상의 눈물과 만났을 때
2장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어떻게 사회적 연대로 확장되는지를 잘 드러낸다. 박래군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결정적 사건은 바로 동생 박래전(朴來佺)의 분신이었다. 1988년 6월 4일,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동생은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스물여섯의 나이로 분신했다. 저자는 “거리에 나서면 ‘형’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중략) 가슴이 조여오면서 숨 막히는 고통이 몰려오고는 했다.”라며 동생을 잃은 후의 처참했던 심경을 고백한다.
그러나 저자는 상실의 고통 속에만 머물지 않았다. 동생의 죽음으로 갖게 된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은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억울한 죽음에 눈뜨게 했고, 이후부터 그는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여 인권운동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의 마음은 ‘경청’함으로써 타자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의 몸은 자기화된 고통의 힘으로 현실에 직입(直入)한다.”라는 김훈 작가의 말대로다. “김종태 열사의 어머니가 먼저 울기 시작했다. (중략) 감옥에 있으면 면회라도 갈 수 있을 텐데, 석방되면 안아보기라도 하고, 결혼하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중략) 그날 밤 어머니들의 눈물바다를 보고 나는 그들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는 회고는, 그가 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잃은 자들’을 위해 살고 있는지 그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더 낮은 곳, 더 어두운 곳을 향하여
3장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저자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을 중심으로 인권운동의 지평을 넓혀 간 시기를 담고 있다. 민주화를 이룬 이후에도 영화나 가요 등 창작물 검열, 경찰의 불심검문 같은 악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IMF 외환위기, 신자유주의 확산 등을 거치며 전과는 다른 양상의 사회적 모순이 수면 위로 떠오르던 때였다. 저자 역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이전까지는 유가족 지원이나 의문사 진상 규명, 고문 철폐 활동 등에 집중했다면 이 시기부터는 장애인, 부랑인 시설 수용자 등 사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약자들의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투신한다. 양지마을 사건, 에바다 학교 사건 등은 그 참상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 위해 박래군이 격렬하게 싸웠던 끔찍한 현장들이다.
인권 유린 실태를 집요하게 파헤친 저자의 치열한 행적이 기록된 3장은 우리 사회가 어떤 아픔을 딛고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또한 폭로와 고발, 그로 인한 일시적 관심만으로는 인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경종을 울린다. 양지마을 사건은 당시 저자를 비롯한 활동가와 언론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시설 운영 주체인 노재중 일가가 자행한 잔혹한 인권 유린에 비해, 그들에 대한 처벌은 턱없이 가벼웠다. “사건 뒤에 양지마을의 담은 허물어졌고, 법인도 천성원에서 분리하여 이화사회복지법인이 되었고, 양지마을은 금이성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시설은 여전히 노재중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다.”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이것이 바로 박래군이 수많은 현장을 떠날 수 없는 이유다.
영원히 지지 않는 사람, 박래군
4장은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과 용산 참사 등, 2000년대 이후 더욱 확산된 신자유주의와 개발 논리에 맞서 싸운 치열한 투쟁을 기록한다. 박래군은 미군 기지 건설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대추리 주민들과 함께 굴착기 바퀴 아래 몸을 던지고, 용산 참사 현장의 불타는 망루 앞에서 절규한다. 대추리를 떠나던 날, “대추분교 운동장 한가운데에 구덩이를 파고 항아리를 묻었다. 항아리가 타임캡슐이었다. 주민들은 향나무 판에 ‘황새울아, 우리 다시 돌아온다. 꼭 온다’고 적었”지만 대추리 주민들은 결국 뿔뿔이 흩어져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용산 참사 또한 마찬가지다. 참사 이후 저자를 비롯한 여러 활동가와 시민 단체들의 노력으로 재개발 철거민 문제가 본격적으로 조명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재개발 지역에서는 전쟁이 계속된다. 여전히 철거민은 쫓겨나고, 그 자리에 고층 빌딩이 들어선다.”
강자의 논리가 곧 질서인 세상에서 약자들의 투쟁은 자주 패배한다. 저자 또한 대추리 투쟁을 회고하며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싸움에서만은 꼭 이기고 싶었다. (중략) 질 줄 알면서도 하는 싸움, 나는 늘 지는 싸움만 하는 것 같다.”라며 뼈아픈 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김훈 작가는 추천사에서 “그의 싸움은 구체적 현장에서 지는 경우가 때때로 있지만, 큰 틀에서는 대체로 지지 않는다. (중략) 그는 자신의 싸움을 ‘질 줄 알면서도 하는 싸움’이라고 말했지만 이런 싸움은 져도 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인권운동의 길 위에서 승패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인권운동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끈질긴 발걸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4장의 제목처럼 박래군은 ‘질 줄 알면서도 싸우는’ 사람이다. 셈하지 않고 묵묵히 제 몫의 싸움을 이어 가는 사람, 그렇기에 박래군은 영원히 지지 않는 사람이다.
독방에서 삼킨 눈물, 다시 희망이 되어
마지막 5장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지금까지, ‘생명안전운동가’로 거듭난 저자의 활동을 담고 있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비극 앞에서 또다시 눈물 흘리지만, 곧장 현장으로 달려가 유가족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의 마음을 보듬는다. 늘 그래왔듯 함께 투쟁하며 진상 규명을 위해 온몸을 던진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4·16연대와 4·16재단 창립 등 참사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지만 ‘1주기 불법 시위를 주동’했다는 혐의로 생애 다섯 번째 구속을 당한 저자는 구치소 독방에서 여러 사람을 떠올린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위해 홀로 차례를 지내기도 하고, 2015년 5월 17일 광주민중항쟁 35주년 전야제 행사에서 “니 맘 다 안다”며 세월호 유가족들을 안아준 5·18 유가족들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고는 “나는 그들의 억울함을 푼다고 약속을 했지만, 얼마나 그 약속을 지키고 살고 있는 것인가? 다시 지키지 못할 약속을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 앞에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며 자책한다. 이 절절한 고백은 그가 평생 약자들과 맺어온 ‘약속’의 무게와, 그 약속에 대한 진심의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하지만 박래군은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또 한 번 나아간다. 이태원 참사 이후,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모습을 통해 희망을 발견한다. 5·18 유가족이 세월호 유가족을, 세월호 유가족이 이태원 유가족을 안아 주는 그 ‘슬픈 연대’는 이 책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연대의 힘을 발판 삼아 박래군은 차별금지법 제정, 탈시설 운동 등 새로운 시대의 구조적 차별에 맞서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김훈 작가는 추천사에서 “박래군은 피해자 한 사람의 고통을 ‘경청’함으로써 그 배후를 이루는 거대한 악의 실체를 세상 위로 들어 올린다”고 저자를 평했다. 또한 “그의 마음은 ‘경청’함으로써 타자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의 몸은 자기화된 고통의 힘으로 현실에 직입(直入)한다”고 썼다. 김훈 작가의 말처럼, 박래군은 지난 45년 동안 억울한 자들이 흘린 눈물의 온기에 의지해 싸워왔다. “래전아, 이 형이 잘하고 있는 거냐?”라고 묻는 저자의 마음 한편에는 상실의 고통이 남긴 낙인이 여전히 선명하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자신의 슬픔을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세상은 나날이 나빠지고 있다’는 비관이 팽배한 현실이지만, 이 책은 상처받은 이를 껴안아 주려는 마음들이 모여 세상을 조금씩 전진시켜 왔음을, 그리하여 이 세상은 끝내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뜨겁게 증명할 것이다.
■ 책 속에서
“넌 왜 그렇게 사냐? 데모만 하고 살 거냐?”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님, 제 이름 누가 지어주셨죠?”
“네 이름? 그거야 내가 지었지.”
“아니, 이름에다가 무리 군 자를 써서 지어주신 건, 무리와 어울려서 데모하면서 살라고 지어주신 거 아닙니까? 저는 아버지가 이름 지어주신 그 뜻대로 사는 거거든요.”
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셨고, 위험을 감지한 나는 그 길로 집에서 도망쳤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만이 살길임을 여러 해 길거리 데모에서 체득했다.
혀를 깨물자, 그러면 포승줄을 풀어줄 것 아닌가? 마룻바닥에 엎어진 채 혀를 빼물고 꽉 깨물었다. 안 깨물어졌다. 두 번, 세 번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혀를 빼물고 마룻바닥에 턱을 내리찍었다. 그제야 혀끝이 잘리고, 입 안 가득 피가 고였다. 나는 울부짖으면서 벽과 바닥에 피를 뱉어냈다. (중략) 팔과 다리를 묶은 포승줄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다.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다시는 교도소 안에서 소란을 떨지 않고, 규율을 잘 지키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포승줄로 묶였던 팔과 다리는 물집이 터져서 쓰라렸고, 잘린 혀는 통증이 심해졌다. 하지만 퉁퉁 부어오른 상처보다 더 끔찍한 건 내 마음이었다.
“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여기로 빨리 와, 래전이가….”
형은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옆에 있던 친척 형이 대신 전했다. 래전이가 분신했다고.
(중략) 방으로 들어서자 아버지가 대성통곡을 했다. “래군아, 어떡하냐. 이놈들아. 내가 니들을 뭐하려고 공부시켰냐! 운동이 뭐라고!”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울기만 하셨다.
그다음 날에는 경원대(현 가천대학교) 천세용이 분신했다. (중략)
“우리 형 죽는 거예요?”
그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냐, 아냐.”
그를 꼭 안아주었다. 기가 막힌 세월이었다. 지금도 나는 김영균의 눈물이, 그리고 천세용의 동생이 종종 생각난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고 진땀이 흐르면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는 증세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사랑은 가슴을 뛰게 한다고 했는데, 나는 죽은 자들을 사랑한 것일까? 그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일까?
그가 큰아들 전태일을 잃은 건 그의 나이 만 41세였다. 이소선은 전태일의 어머니로 41년을 살았고, 나머지 41년은 전태일을 넘어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더 나아가 모든 이의 어머니로 살았다. 나는 감히 말한다. 이소선의 분투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아는 전태일도 없었을 거라고.
(중략) 그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었던 일은 ‘민주유공자법 제정’이었다. 투쟁 중에 자결하거나 국가 폭력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면 “목숨마저 버리고 민주화하려고 했던 사람을 나라가 기억해 줘야 하지 않냐”는 이소선의 바람은 아직 미완이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될 일은 언제건 되더라고.”
이소선 어머니의 이 말을 낙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평등주의자, 이소선은 나의 영원한 스승이다.
나는 《오마이뉴스》에 〈차라리 저를 폭행하라 하십시오〉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더 이상의 폭력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3월 18일, 나와 박경석 교장은 ‘대화합시다’란 피켓을 들고 에바다 학교 정문에 섰다. 박경석 교장은 수어로 학생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길 30분 정도 지났을까? 한 학생이 바가지를 들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흩뿌렸다. 나는 순간 피켓으로 얼굴을 막았지만, 박경석 교장은 온몸에 그걸 모두 뒤집어썼다. 똥물이었다.
용산 참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온라인으로 현장이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이었다. 철거 용역들이 불법적으로 폭력을 저지르고 다닐 때는 묵인했던 공권력, 아니 어떤 경우에도 철거 용역의 편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토건 자본의 편만 일방적으로 들었던 공권력이었다. 철거 용역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망루를 짓고 올라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철거민들의 투쟁 방식이었다.
용산범대위는 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현장을 지키면서 대정부, 대정치권 싸움을 이어 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갇힌 우리 수배자 세 명은 용산범대위의 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탈출만이 답이었다. 완강기 밧줄을 걸치고 도시가스관을 타고 내려갔던 첫 번째 탈출극은 실패로 끝났다. 이번에는 특수 분장으로 벗어나고자 했다. (중략)
앞의 두 사람이 분장할 때는 한 사람당 2시간 이상 걸려서 완전히 딴 사람을 만들어냈다. 분장 팀이 내게는 여자로 변장하자고 했다.
“누가 박래군 씨가 여장할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선입견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가발을 뒤집어쓰고, 브래지어를 착용한 뒤 수건을 넣어 가슴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자 상복을 입었다.
우리는 페이스북과 이메일,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100만 원씩 3년만 무이자로 빌려주십시오.”
기적이 일어났다. 한 달 20일 만에 3억 원이 채워졌다. 누구는 적금을 해지했고, 누구는 결혼 축의금을 몽땅 보내왔다. 가족 단위로 참가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 인권센터 하나 없다는 게 창피하다”며 응원의 문자도 보내주었다. 익명으로 1억 원을 보내주신 분도 있지만, 대체로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사람들이 많았다.
몇 년 전부터인가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쇠고기를 먹지 못했다. 육즙이 맛있다고? 사람들에게는 “소띠인 내가 어떻게 동족인 소를 먹겠냐”고 둘러댔지만, 솔직히 육즙이 배어 나오는 쇠고기에서 주검 안치실의 핏물이 떠올랐다. 나는 안 그런 것 같았는데, 나의 깊은 곳에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인권운동을 하면서 너무도 많은 주검을 보고 살아왔다. 모두 억울하고 서러운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억울함을 푼다고 약속을 했지만, 얼마나 그 약속을 지키고 살고 있는 것인가? (중략) ‘끝’이란 말만큼 무서운 말은 없다. 사람들과의 약속, 그 끝은 어디일까?
생존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설 때부터 엄마들의 눈자위는 붉어졌고, 아빠들은 얼굴을 숙였다. 생존 학생을 대표해서 장애진 씨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우리는 너희를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게. 나중에 너희를 만나는 날이 올 때, 우리를 잊지 말고 열여덟 살 그 시절 모습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편지를 읽은 생존 학생들을, 304명 세월호 희생자의 얼굴을 새긴 노란색 깃발을 어깨에 두른 유가족들이 올라가 한 명씩 안아주었다. 무대에서도 울고, 무대 아래에서도 시민들이 울었다.
나는 이태원 분향소에 찾아갈 때마다 그곳 제단에 올려 있는 얼굴 사진들을 본다. 그러면서 1997년생을 찾아본다. 세월호 단원고 희생자 대부분은 97년생이었다. 이태원 참사 159명의 희생자 가운데, 그곳 제단엔 8명의 97년생이 있었다. 그리고 딱 97년생은 아니더라도 그 전후 나이의 희생자들이 많았다. 그 세대는 자신들을 ‘저주받은 97년생’이라고 부른다. 97년 전후 세대들은 광화문 세월호 기억공간에 와서 스스로를 ‘4·16 세대’라고 했다. 이들은 또다시 ‘10·29 세대’가 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어떨까? 그들에게 기성세대들은 무엇을 물려주고 있는 것인가?
해마다 4·16 재단이 진행했던 캠페인은 ‘기억은 힘이 세지’였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다른 재난 참사처럼 흩어지지 않았고, 지워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종종 세월호를 기억하는 청년들을 만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세월호 참사가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를 말하곤 한다. 마치 내가 5·18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민주주의를 배웠듯이 청년들은 세월호 참사로부터 국가와 사회를 알게 되었고,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10여 년 전에 경희대학교에서 인권 수업을 할 때 학생들에게 물었다. “차별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손드는 사람이 없었다. 30명의 학생 중 누구도 차별을 당하지 않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차별에 관해 설명했다. ‘직접 차별, 간접 차별, 괴롭힘, 성희롱 등’과 같은 차별을 설명하니, 그제야 학생들이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방 출신이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억울했다는 얘기들을 풀어냈다. 그 학기가 끝났을 때 한 학생이 메일을 보내왔다. “교수님 덕분에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중략) 그 학생은 성소수자였다. 수업 시간에 손들고 성소수자로 겪은 차별을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고, 성소수자를 긍정하는 교수님이 있어서 고마웠다는 메일이었다.
처음 만날 때는 초등학생이었고, 고등학생이었고, 20대 초반이었던 이들이었는데 이제 막내가 40이 넘었다. 그 시절에 그들은 유가협 사무국장이었던 내게 물었다.
“우리 형은 왜 죽었어요?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오빠가 그렇게 독한 사람이었을까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다니….”
수많은 물음에 나라고 똑 부러진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도 묻고 있었다. ‘왜 너는 죽었냐? 그 길밖에 없었냐?’고. 아마도 내가 기울인 술잔의 7할 이상은 이런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 탁 터놓고 말할 수도, 티 낼 수도 없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안고 살아온 유가족 인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