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가 최원현의 새 수필집 『그리움, 그리움의 그리움』은 제목이 이미 한 권의 정서를 이끌어내는 책이다.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그 마음을 되돌아보는 또 한 겹의 감정, 즉 "그리움이 그리워지는 순간"을 응시하는 작품집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오늘의 한국 수필 문학이 도달한 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가 오래도록 갈고 닦아온 사유적 문장의 향기, 잔잔하면서도 깊은 내면의 울림, 그리고 남루한 일상 속에서도 영혼의 언어를 길어 올리려는 그의 문학적 태도는 이번 책에서 더욱 단단한 형태로 독자를 마주한다.
1. 그리움의 탄생지 ㅡ 프롤로그의 의미
책의 문을 여는 프롤로그는 이 수필집의 정서를 응축한 ‘감정의 젤(gel)’과도 같다. 저녁노을을 바라보다 느끼는 이유 모를 슬픔, "그 마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라는 다층적 감정 구조, 그리고 기억이 ‘잃음’이 아니라 ‘회복’을 향한 여정이라는 깨달음. 이 모든 것은 최원현 수필의 핵심 자리를 잡아온 개념들이다.
그리움은 그에게 단순한 정서나 감상적 회고가 아니다. 그는 그리움을 시간과 기억, 존재의 재구성이라는 철학적 장치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슬픔을 말하면서도 무겁지 않고, 과거를 이야기하면서도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움은 마음의 언어가 아니라 영혼의 언어”라는 문장은 그가 왜 수필이라는 장르를 택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2. 기억의 지층을 따라 ㅡ 수록 수필의 정서
총 26편의 수필은 저자의 삶을 경유한 풍경들로 엮이지만 그 풍경은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된다. 바로 ‘그리움의 여러 얼굴’이다.
* 하마터면, 그리움
책의 첫 번째 작품은 이 수필집 전체의 분위기와 문제의식을 상징적으로 펼쳐 보인다. 담양 식영정에서 오래 묵힌 감정의 뚜껑이 열린 순간, 과거의 얼굴과 목소리가 다시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경험. 그리움은 잊고 있던 것들을 깨워내는 손이 되어, 존재의 숨은 층을 꺼내놓는다.
특히 이모와 이모부, 어린 사촌에 얽힌 비극적 기억은 개인의 상처를 넘어, 한 인간이 어떻게 ‘그리움의 방식’으로 애도의 경험을 재구성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감정의 과장 없이도 독자의 마음을 오래 붙드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아픔을 문학적 언어로 절제 있게 다루기 때문이다.
* 고요한 서정의 고향, 부안
부안에서의 경험은 저자에게 고향의 ‘시간’을 되살리는 길이면서 동시에 상실된 풍경의 재회이다. 자연은 그의 글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심리적 구조물로 기능한다. 고향의 산과 물, 바람이 그의 내면을 조용히 흔들어 깨우고, 그곳에서 글은 다시 태어난다.
* 경계와 한계, 잇다, 영원의 시작
이 작품은 존재론적 질문이 짙게 배어 있다. 경계는 단지 공간적 구획이 아니라 마음의 건널목이며, 한계는 포기나 좌절이 아니라 성찰의 깊이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왜 인간의 성숙과 연결되는지를 이 작품들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 시대와 삶을 잇는 글
‘인공지능 시대에 살며’ 같은 작품은 개인적 정서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의식을 품은 글이다. 그는 기술 시대의 변화 속에서 인간의 ‘내면성’이 어떻게 유지되고 보호되어야 하는지를 사유한다. 그리움은 여기서 "속도의 세계에 맞서는 가장 인간적인 방패"처럼 묘사된다.
‘노벨문학상 수상, 우리도 잔치의 주인이어야’에서는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따뜻하면서도 명징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는 문학을 시대적 바람에 흔들리지만 결코 부러지지 않는 ‘내면의 나무’로 동일시한다.
3. 문학적 성향 ㅡ 사유와 서정의 결
최원현의 문장은 ‘사유적 서정’이라 불릴 만큼 감성과 철학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는 감정의 과잉을 피하고, 사유의 냉랭함도 거부한다. 이를 대신해 그는 자신의 내면을 투명한 유리잔처럼 독자 앞에 놓아두되, 그 잔 속의 물이 홀짝 들여다보이도록 글을 정제해낸다.
* 언어의 방식
그의 문장은 늘 조용하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는 날카로운 질문이 숨어 있다.
우리는 왜 잃은 뒤에야 비로소 보게 되는가?
그리움은 왜 우리를 다시 길 위에 세우는가?
이런 질문들은 독자의 마음에 오래 머문다. 그는 답을 강요하지 않고, 독자가 스스로 그리움의 결을 만지게 만든다.
* 시간의 미학
그의 글에서 시간은 직선적 흐름이 아니라 중첩된 지층이다. 과거는 현재에 스며 있고, 현재는 과거를 비춘다. 미래는 그리움의 방향성으로 잠잠히 형상화된다. 그래서 그의 글은 ‘기억’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회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억을 다시 읽고, 해석하고, 새롭게 쓰는 글이다.
4. 그리움의 문학적 의미
『그리움, 그리움의 그리움』은 단순한 수필집이 아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통과해 문학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정서적 자서전’이다. 또한 그리움이 어떻게 인간의 존재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 만드는지를 철학적으로 탐구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리움을 잃은 것 → 부재 → 기억 → 재회 → 회복이라는 감정의 순환으로 본다. 이 순환은 삶의 구조와 닮아 있으며, 우리가 왜 과거를, 사람을, 시간을, 풍경을 그리워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그리움은 결핍의 정서가 아니다. 오히려 충만을 향한 내면의 여정이다.
그리움은 고통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 남긴 향기이다.
그리움은 끝이 아니다. 오히려 또 다른 시작이다.
수필집 전체를 통해 흐르는 이 관점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그리움을 다시 읽고 새롭게 구성하게 만든다.
5. 이 책이 남기는 것 ㅡ 독자를 위한 자리
이 책을 덮은 독자는 더 이상 ‘한 작가의 그리움’을 읽고 있지 않다. 어느새 자신의 얼굴, 자신의 상실, 자신의 조용한 기쁨, 자신의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최원현이 기록한 그리움의 언어는 “당신의 그리움”이라는 또 다른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움은 마음의 감정이 아니라 영혼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이 가진 힘은 단단하다.
언제고 잊었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그리움은 조용히 우리 마음속에서 길을 찾아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마무리
『그리움, 그리움의 그리움』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기원을 탐구하고, 그 감정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지 보여주는 성찰의 문학이다. 조용하지만 심연을 건드리는 글쓰기, 일상의 틈새에서 삶의 본질을 건져 올리는 그의 문장은 한국 수필의 한 결을 새롭게 다져놓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라, 마음의 빈 자리를 천천히 채워가는 치유의 길을 내어주는 따뜻한 그리움의 집이다.
그리고 그 집의 문을 여는 순간, 독자는 자신이 잃어버렸던 어떤 이름을 다시 부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