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4세기 中 요서 지방을 지배했다”
백제 요서경략설을 대중에 알린 첫 소설
중국 역사서에 기록됐지만, 『삼국사기』에 없는 백제사
KBS 드라마 <근초고왕> 원작…『삼국지』와 비교하는 재미
이문열의 소설 『대륙의 한 ―요서지遼西志』가 전자책과 오디오북으로 새롭게 독자들을 만난다. 『대륙의 한』은 1983년 중앙일보에 연재되어 백제의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을 대중 일반에 알리는 본격적인 계기가 됐던 역사소설이다. 2010년에는 KBS 60부작 드라마 <근초고왕>으로 영상화되기도 했다. 요서경략설은 4~5세기 백제가 현재 중국 북경 북동쪽인 요서 지방을 지배했다는 것으로, 그간 고구려나 신라 대비 평가절하되어온 백제사를 재조명하며 여론의 반향이 컸다.
사실 백제 요서경략설은 현재까지도 학계에서는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주장이다. 백제가 중국 요서지방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가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 사서에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탓이다. 현재 교과서에도 그저 백제가 중국 요서지방에 ‘진출했다’, ‘영향력을 미쳤다’ 정도의 한정적 서술뿐이다.
하지만 백제 요서경략설은 이미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1770년)의 주장으로부터, 신채호와 정인보 같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에 이르러 학설화될 만큼 오랜 기간의 역사적 쟁점이다. 이처럼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변방 소국의 중국 지배를 당연히 부인할 것으로 보이는 중국 역사서에 여러 차례의 관련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는 『송서(宋書)』, 『양서(梁書)』, 『남사(南史)』, 『통전(通典)』이고, 그 외의 사서에도 다른 이유로는 설명 안 되는 간접 기술도 많다.
『송서』 백제전(百濟傳) :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점령하니, 백제는 요서(遼西)를 점령하고 진평군(晉平郡) 진평현에 이 지역의 통치기관을 설치하였다.”
『양서』 백제전, 『남사』 백제전, 『통전』 변방문(邊防門) 백제조 : “진(晉)나라 때 백제가 고구려의 요동 지배에 대응해 요서·진평 두 군을 점령하고 그 땅에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고구려·신라 대비 평가절하되어 온 백제사 재조명
이문열은 이처럼 논란 속에 부정되기 일쑤이던 백제의 빛나는 역사를 소설 속에 살려냈다. 그는 서문을 통해 “백제가 오늘날의 산동·화북 어름에 본토보다 몇 배 넓은 지역을 차지해 다스리고 있었고, 더욱이 중국 북위의 침략군 수십만을 격퇴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살수대첩이나 안시성 싸움처럼 호쾌한 느낌을 주었다. 또 중국 역사책에 나오는 백제계인 백지래왕, 요서팔왕 이야기도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며 집필 계기를 밝혔다.
이야기는 근초고왕이 계왕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틈타 갓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천신만고 끝에 빼돌려져 성장한 계왕의 아들 여광餘光과 대결한다는 허구의 역사를 삽입해 실마리로 삼는다. 여광은 절치부심 끝에 옛 신하들의 도움 속에 고구려와 손잡고 근초고왕에게 맞서지만, 분전 끝에 무참하게 패해 근초고왕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하지만 여광은 죽은 줄 알았던―사실은 근초고왕이 보호하고 있던 어머니(모후)―를 만나 모든 오해를 푼다. 하지만 양측 진영의 오래된 반목은 골이 깊었고, 때문에 태자로 세워 다음 왕위를 넘기겠다는 근초고왕의 제안을 사양한 여광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위진남북조 시기의 중국에서 기회를 찾겠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요서 지방에서 분전하며 세력을 키워가던 여광은 불의의 습격으로 죽어가던 연왕 모용황의 아들을 구해주게 되고, 연나라의 중원 제패를 도우며 요서 지방 실력자로 발돋움할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중국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한반도·중국사 넘나드는 역사소설
『대륙의 한』은 백제 요서경략설을 일반에 널리 알린 소설이기도 하지만,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와 함께 이문열의 중국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연재 당시 겨우 등단 4년 차였던 작가는 역사서에 고작 몇 줄 남은 기록을 바탕으로, 한반도와 중국 역사를 씨줄 날줄로 넘나들며 5권 분량의 이야기로 구성해 낸다. 춘추·전국, 5호16국, 위진남북조 등 대표적인 중국 대륙 전란기의 단면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가 하면, 삼국시대 최약체로만 알고 있던 백제가 비록 2개 현이라지만 대륙의 한 축으로 활약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고구려-백제의 치열한 영토 분쟁과 전략을 따라가는 즐거움과, 비슷한 시기 연재를 시작해 현재까지 최소 2,0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평역 『삼국지』와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소설 마지막 부분(5권)에 나오는 내용은 사학계의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한껏 확장하기에 충분하다. 중국 역사에서 ‘군도’ 정도로 무시되거나 생략된 백제인의 역사에 대한 한 실마리다. “뒷날 요서백제와 북위北魏의 대전이 있을 때까지 백제인의 활동은 모용농의 ‘군도群盜’나 남송南宋의 ‘중군衆軍’이란 표현 속에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한 예로 《후연록後燕錄》에는 모용보·모용성의 시대에 이낭李朗이란 인물이 10년이나 요서태수를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실질은 지극히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