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일찌감치 내게서 달아나지 않았어?”
70년대 아메리카니즘 속 자기파괴적인 쾌락과 맹목적 사랑
소설·영화 ‘쌍백만’…『젊은날의 초상』과 겹쳐보는 재미
이문열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가 전자책과 오디오북으로 새롭게 독자들을 만난다. 1988년 일요신문 연재 후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고, 1990년 강수연·손창민 주연의 영화로도 큰 인기를 누려 책·영화 모두 100만을 넘기는 소위 ‘쌍백만’으로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출간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신문 칼럼 등에 제목이 인용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저자의 또 다른 대표작 『젊은날의 초상』과도 주인공이나 시대 배경이 겹쳐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주오스트리아 한국대사관의 영사인 ‘나’를 화자로 시작된다. 미국 국적의 한인 여성(서윤주)이 휴양지 그라츠에서 한인 남성(임형빈)의 총에 맞았다며, 그 남성을 심문하는 데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서다. 이야기는 ‘나’와 형빈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가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욕구는 내 짐작 이상으로 컸던 듯, 그로부터 그는 거의 4시간 가까이나 한번 진득하게 생각을 가다듬어 보는 법조차 없이 기나긴 얘기를 시작했다. 그들의 쓸쓸한 사랑과 그 현란한 추락을, 시대의 후미진 하늘 모퉁이를 우리가 알 수 없는 찬연한 빛으로 불타며 져간 한 쌍의 젊음을. -<서장>
가난한 시골 수재로 온 마을의 기대 속에 국내 최고 대학 법학과에 합격한 형빈은 졸업 전 사시 합격을 목표로 공부에 매진하지만, 어느 날 교정에서 우연히 윤주를 만나며 흔들린다. 몇 달의 방황 끝에 그녀를 찾아내지만, 여러 ‘보이프렌드’에 둘러싸인 그녀는 철저하게 그를 밀어낸다. 그럼에도 형빈은 다시 열렬한 구애 끝에 드디어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가 사실은 ‘양공주’인 언니가 흑인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갔다는 것, 그녀 역시도 몸을 팔다시피 재정적 후원을 받는 ‘아저씨’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헤어진다.
여전한 충격 속에 입대 준비를 하던 형빈에게 윤주의 ‘보이프렌드’ 중 하나가 찾아오고, 그녀가 이태원 거리를 헤매며 방황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다. 결국 형빈은 그녀를 찾아내고 외국인 전용 술집에서의 떠들썩한 난투극 끝에 다시 동거 형태로 연애가 시작된다. 그즈음 윤주는 미국에 있는 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거기에 형빈의 아버지가 살림집을 찾아와 한바탕 난리가 나며 완전히 형빈에게서 사라져 버린다.
방황하던 형빈은 군에 입대하고, 또 적당히 번듯한 대기업 직원이 되어 중매로 만난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그렇게 미국 지사에 파견된 형빈은 운명처럼 해변에서 윤주를 만나 예전의 감정을 되살아난다. 한국계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건너온 윤주는 몇 번의 이혼과 마지막 남편의 죽음으로 약간의 재산을 가진 미망인이 되어 있었다.
이미 정이 없던 아내와 헤어진 형빈은 윤주와 재혼하고, 그들은 헤어진 세월에 분풀이하듯 방탕한 생활에 빠져든다. 돈이 쪼들렸던 형빈은 그간 멀리하던 뇌물·횡령의 유혹에 손을 내밀고, 이를 들켜 회사도 그만둔다. 한국이라면 치를 떠는 윤주와 어떻게든 미국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동부로 온 형빈은 성실하게 돈을 모아가지만, 곧 부동산 사기를 당하고 윤주는 또다시 방탕한 생활에 유혹을 느낀다. 그 와중에 윤주는 회사 상사와 유럽으로 도망가고, 형빈은 그들이 유럽에서 가장 좋아했던 도시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그녀를 찾아낸다. 다정했던 마지막 며칠을 끝으로 그들을 격렬한 다툼을 벌이고 격분한 형빈은 윤주에게 총을 쏴 중태에 빠뜨린다.
이야기를 마친 형빈은 ‘나’에게 묻는다. “그런데, 어느 쪽이 진실이었을까요? 그녀가 방을 나서려 하며 가로막는 내게 쏘아붙인 말들과, 끌어안겨 피 흘리며 내게 속삭인 말들 가운데서…… 아니, 그녀는 어떤 여자였을까요? 여자라는, 성으로 구분된 보편적인 집단의 한 예외였을까요? 아니면 1970년대 초의 한국적 상황과 한참 위세를 떨치던 아메리카니즘이 우리 딸들을 돌게 해 만들어 낸 한 특수한 예외였을까요……”
당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은 통속소설이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뤘던 만큼 평단의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최근까지도 독자들의 리뷰는 ‘전통적 가부장제에서 이탈하는 현대 여성에 대한 보수적 남성의 불안’이라든가, ‘사랑과 자유의 갈등’, ‘인간의 불안정성과 파멸’ 등 다양한 관점으로 작품을 분석할 만큼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많은 관심을 받는 작품이다. 특히 이문열 작가 특유의 미묘한 심리 묘사나 교양주의 문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천착 등을 장점으로 꼽는 독자도 많다.
그럼에도 작품의 인기와는 별개로, 저자는 초판 서문에서부터 작품 완성도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해 왔다. “손가락도 여럿이다 보면 길고 짧은 게 있듯이, 작품도 쓰다 보면 주관적인 만족도에서 층이 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여러 가지로 불만이 많은 작품”이라고 할 정도다. 이후 얼마지 않아 절판시키고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개작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서문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그레이엄 그린은 자신의 작품을 두 가지로 분류해 어느 한쪽에는 문학적인 면책을 호소했다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이 작품은 내 이름을 달고 나갈 엄연한 내 정신의 자식이며― 적어도 그때의 그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해 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