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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23021560
UCI
-
법
작품 정보
법이 정의를 지키는 대신 약탈을 합법으로 만들 때 사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따진 프레데리크 바스티아의 정치 팸플릿.
1850년에 나온 이 짧은 글은 한 가지 물음에 답하려고 쓰였습니다. 법이란 무엇인가. 바스티아의 답은 단순합니다. 법은 개인의 정당방위 권리를 집단으로 조직한 것이므로, 법은 정의여야 하고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겨눈 상대는 도둑이 아니라 법 자신입니다. 법이 어떤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다른 사람들에게 줄 때, 그는 그것을 합법적 약탈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법이 한번 그런 도구가 되면, 모든 계급이 법을 차지하려고 입법부의 문 앞에서 다투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은 그 밑에 깔린 생각입니다. 사람들을 진흙으로, 입법자를 도공으로 보는 생각입니다. 바스티아는 루소와 몽테스키외에서 혁명기의 입법자들까지 이 생각을 따라가며 묻습니다. 인류의 성향이 그토록 나빠서 자유를 줄 수 없다면, 조직자들의 성향은 어째서 언제나 좋은가.
정부가 모든 것을 떠맡을수록 모든 실망의 책임도 정부에게 돌아가고, 실망할 때마다 혁명이 뒤따른다는 그의 진단은 백칠십 해가 넘게 지난 오늘에도 낯설지 않습니다.
바스티아는 자기가 개혁가들 틈에 끼는 것은 그들이 손을 늦추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법에 무엇을 맡겨도 되는지 스스로 따져 보게 만든다는 데 이 글의 값이 있습니다.
이 도서는 퍼블릭 도메인 원문을 바탕으로 생성형 인공지능을 번역·편집·검수 과정에 활용하여 제작했습니다.
1850년에 나온 이 짧은 글은 한 가지 물음에 답하려고 쓰였습니다. 법이란 무엇인가. 바스티아의 답은 단순합니다. 법은 개인의 정당방위 권리를 집단으로 조직한 것이므로, 법은 정의여야 하고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겨눈 상대는 도둑이 아니라 법 자신입니다. 법이 어떤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다른 사람들에게 줄 때, 그는 그것을 합법적 약탈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법이 한번 그런 도구가 되면, 모든 계급이 법을 차지하려고 입법부의 문 앞에서 다투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은 그 밑에 깔린 생각입니다. 사람들을 진흙으로, 입법자를 도공으로 보는 생각입니다. 바스티아는 루소와 몽테스키외에서 혁명기의 입법자들까지 이 생각을 따라가며 묻습니다. 인류의 성향이 그토록 나빠서 자유를 줄 수 없다면, 조직자들의 성향은 어째서 언제나 좋은가.
정부가 모든 것을 떠맡을수록 모든 실망의 책임도 정부에게 돌아가고, 실망할 때마다 혁명이 뒤따른다는 그의 진단은 백칠십 해가 넘게 지난 오늘에도 낯설지 않습니다.
바스티아는 자기가 개혁가들 틈에 끼는 것은 그들이 손을 늦추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법에 무엇을 맡겨도 되는지 스스로 따져 보게 만든다는 데 이 글의 값이 있습니다.
이 도서는 퍼블릭 도메인 원문을 바탕으로 생성형 인공지능을 번역·편집·검수 과정에 활용하여 제작했습니다.
작가 소개
프레데리크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 1801~1850)는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입니다. 1801년 유월 삼십일, 프랑스 남서부의 항구 도시 바욘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는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아가 된 그는 랑드 지방의 작은 마을 뮈그롱에서 할아버지와 고모의 손에 자랐습니다.
열일곱 살에 학교를 떠나 바욘에 있는 숙부의 무역 상사에서 일했습니다. 보호 관세가 항구의 상거래를 어떻게 말려 버리는지, 그는 그곳에서 가까이 지켜보았습니다. 애덤 스미스와 장바티스트 세의 책을 읽은 것도 이 무렵입니다. 1825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뮈그롱의 땅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뒤 스무 해 가까이 그는 시골에서 농장을 돌보고 책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1831년에는 치안 판사가 되었고, 1833년에는 랑드 도의회 의원으로 뽑혔습니다. 이웃 친구 펠릭스 쿠드루아와 경제와 정치를 두고 오래 토론한 것도 이 시절의 일입니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마흔세 살 때입니다. 1844년 그는 프랑스와 영국의 관세를 견준 글을 파리의 경제학 잡지에 보냈습니다. 시골 지주가 보낸 이 글은 파리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곡물법 폐지 운동을 이끌던 리처드 코브던(Richard Cobden)에게 깊이 끌렸습니다. 1845년에는 《코브던과 동맹》을 내어 그 운동을 프랑스에 알렸고, 영국으로 건너가 코브던을 직접 만났습니다. 이듬해에는 자유 무역을 위한 협회를 세우고 주간지를 펴내며 보호무역에 맞선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펴낸 《경제적 궤변》에는 양초 제조업자들의 청원이라는 유명한 풍자가 실려 있습니다. 양초 제조업자들이 햇빛과의 불공정한 경쟁을 막아 달라고 의회에 청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848년 이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랑드에서 제헌 의회 의원으로 뽑혔고, 이듬해 입법 의회 의원으로 다시 뽑혔습니다. 제헌 의회에서는 재정 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혁명 뒤의 파리는 노동권과 사회 작업장, 무상 신용을 둘러싼 논쟁으로 들끓었습니다. 그는 이 논쟁 한복판에서 짧은 글을 잇달아 써 냈습니다. 《재산과 법》, 《정의와 형제애》, 《국가》, 《보호무역주의와 공산주의》 같은 소책자들입니다. 프루동과는 이자가 정당한지를 두고 신문 지상에서 긴 논쟁을 주고받았습니다.
《법》은 1850년에 소책자로 나왔습니다. 그가 이 소책자들에서 조금씩 다듬어 온 생각을 한 편에 모은 글입니다. 본문에는 그해의 일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월 육일 제조업·농업·상업 총평의회가 정부에 낸 요청이 인용되고, 사회주의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몽탈랑베르의 말이 다루어집니다. 그 무렵 의회는 보통 선거를 제한하는 법을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첫째 부에서 보통 선거를 두고 “요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주제”라고 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시인이자 정치가인 라마르틴이 그에게 써 보낸 말과 그의 답장도 본문에 나옵니다.
이 무렵 그는 이미 결핵으로 몸이 크게 상해 있었습니다. 첫째 부에서 약탈이 없는 상태라는 원리를 죽는 날까지 외치겠다고 하면서 “내 폐는 몹시 약하지만”이라고 덧붙인 것은 꾸밈말이 아닙니다. 같은 해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펴내고, 평생의 주저로 삼은 《경제적 조화》의 첫째 권을 내놓았습니다.
그해 가을 그는 요양을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습니다. 피사를 거쳐 로마에 이르렀으나 병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1850년 십이월 이십사일, 그는 로마에서 마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제적 조화》는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남은 원고는 벗들이 정리해 그가 죽은 뒤에 펴냈습니다. 그러니 《법》은 그가 숨지기 반년쯤 전에 쓴 글이고, 평생 붙들어 온 물음에 내놓은 가장 짧고 가장 단호한 대답입니다. 법은 무엇이며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의 저작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널리 읽히는 책 가운데 하나도 이 얇은 소책자입니다.
열일곱 살에 학교를 떠나 바욘에 있는 숙부의 무역 상사에서 일했습니다. 보호 관세가 항구의 상거래를 어떻게 말려 버리는지, 그는 그곳에서 가까이 지켜보았습니다. 애덤 스미스와 장바티스트 세의 책을 읽은 것도 이 무렵입니다. 1825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뮈그롱의 땅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뒤 스무 해 가까이 그는 시골에서 농장을 돌보고 책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1831년에는 치안 판사가 되었고, 1833년에는 랑드 도의회 의원으로 뽑혔습니다. 이웃 친구 펠릭스 쿠드루아와 경제와 정치를 두고 오래 토론한 것도 이 시절의 일입니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마흔세 살 때입니다. 1844년 그는 프랑스와 영국의 관세를 견준 글을 파리의 경제학 잡지에 보냈습니다. 시골 지주가 보낸 이 글은 파리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곡물법 폐지 운동을 이끌던 리처드 코브던(Richard Cobden)에게 깊이 끌렸습니다. 1845년에는 《코브던과 동맹》을 내어 그 운동을 프랑스에 알렸고, 영국으로 건너가 코브던을 직접 만났습니다. 이듬해에는 자유 무역을 위한 협회를 세우고 주간지를 펴내며 보호무역에 맞선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펴낸 《경제적 궤변》에는 양초 제조업자들의 청원이라는 유명한 풍자가 실려 있습니다. 양초 제조업자들이 햇빛과의 불공정한 경쟁을 막아 달라고 의회에 청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848년 이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랑드에서 제헌 의회 의원으로 뽑혔고, 이듬해 입법 의회 의원으로 다시 뽑혔습니다. 제헌 의회에서는 재정 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혁명 뒤의 파리는 노동권과 사회 작업장, 무상 신용을 둘러싼 논쟁으로 들끓었습니다. 그는 이 논쟁 한복판에서 짧은 글을 잇달아 써 냈습니다. 《재산과 법》, 《정의와 형제애》, 《국가》, 《보호무역주의와 공산주의》 같은 소책자들입니다. 프루동과는 이자가 정당한지를 두고 신문 지상에서 긴 논쟁을 주고받았습니다.
《법》은 1850년에 소책자로 나왔습니다. 그가 이 소책자들에서 조금씩 다듬어 온 생각을 한 편에 모은 글입니다. 본문에는 그해의 일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월 육일 제조업·농업·상업 총평의회가 정부에 낸 요청이 인용되고, 사회주의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몽탈랑베르의 말이 다루어집니다. 그 무렵 의회는 보통 선거를 제한하는 법을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첫째 부에서 보통 선거를 두고 “요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주제”라고 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시인이자 정치가인 라마르틴이 그에게 써 보낸 말과 그의 답장도 본문에 나옵니다.
이 무렵 그는 이미 결핵으로 몸이 크게 상해 있었습니다. 첫째 부에서 약탈이 없는 상태라는 원리를 죽는 날까지 외치겠다고 하면서 “내 폐는 몹시 약하지만”이라고 덧붙인 것은 꾸밈말이 아닙니다. 같은 해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펴내고, 평생의 주저로 삼은 《경제적 조화》의 첫째 권을 내놓았습니다.
그해 가을 그는 요양을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습니다. 피사를 거쳐 로마에 이르렀으나 병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1850년 십이월 이십사일, 그는 로마에서 마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제적 조화》는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남은 원고는 벗들이 정리해 그가 죽은 뒤에 펴냈습니다. 그러니 《법》은 그가 숨지기 반년쯤 전에 쓴 글이고, 평생 붙들어 온 물음에 내놓은 가장 짧고 가장 단호한 대답입니다. 법은 무엇이며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의 저작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널리 읽히는 책 가운데 하나도 이 얇은 소책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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