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셋의 여배우, 어느 날 밤 수상한 고양이의 인도로
이상한 세계를 헤매다 열두 살 소녀의 몸으로 깨어나다
“태아가 되는 순간부터 전생의 기억은 지워지죠. 하지만 운명의 상대를 생각하면 속삭임이 들려오는 거예요. 눈과 귀를 막고 있어도 느껴지는 빛처럼.”
“젊은 신인만이 그려 낼 수 있는 세계를 이만한 수준의 언어적 공간에 담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주목할 만한 문학적 사건이다.”(문학평론가 이남호)란 평가와 함께 [피터팬 죽이기]로 2004년 제2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작가 김주희의 두 번째 장편소설 [수지―쥐와 연애하는 소녀]가 출간되었다. 첫 소설집 [파란나비 효과 하루]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다. 우울과 고독의 마이너 감성을 지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비주류 청춘들의 삶을 유머러스하고도 진지하게 묘사해 온 김주희가 이번에는 독특한 환상과 현실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수지]를 통해 한층 진일보한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인어 공주’ 모티프를 차용하였으되 이기적인 인어 공주이며, ‘늑대 인간’ 모티프를 차용하였으되 늑대 인간 대신 쥐 인간이 등장하는, 김주희 특유의 이 기발하고도 엉뚱 발랄한 상상력은 시종 독자들의 시선을 쥐락펴락하며 작가 김주희만의 매혹적인 판타지의 세계로 거침없이 빠져들게 만든다.
‘팀 버튼’식 잔혹 환상 동화 + ‘김주희’식 연애성장소설 = 매혹적인 판타지의 세계 [수지]
김주희 장편소설 [수지]의 중심 플롯은 서른세 살의 무명 여배우인 ‘나’와, 그녀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단막 드라마 "달의 마지막 연인"을 쓴 스물일곱 살의 신인 작가 ‘달’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수지]는 우리가 만나 온 여느 소설과는 확실히 다른 색체, 우리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낯선 세계를 작품 속으로 끌고 온다.
어느 날 밤 ‘나’는 말하는 고양이에게 이끌려 ‘달’의 마음속에 들어갔다가 일곱 살짜리 아이가 되고, 며칠 만에 열두 살 소녀 ‘수지’의 몸으로 다시 깨어나면서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시작과 끝에는 흰쥐의 죽음이 있다. 처음 ‘수상한 고양이’를 따라 달의 마음으로 들어간 ‘나’가 흰쥐를 희생양 삼아 달을 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랑이 시작되고, 나중에 도로에 뛰어든 ‘수지’를 달이 구해 주고 그가 흰쥐의 모습으로 변하여 죽음으로써 사랑은 끝이 난다. 또한 옥상 난간에서 자살 시도를 하던 달을 구해 준 대가로 열두 살 소녀 ‘수지’로 변해 버린 ‘나’의 운명은 달의 사랑을 얻어야만 다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어 공주의 운명과도 닮아 있다. 하지만 수지는 아이가 된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고 신경질적으로 굴며, 달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의 첫사랑 ‘하수지’를 질투하여 그에게 날 선 공격을 퍼붓는다. 수지는 인어 공주이되 이기적인 인어 공주인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지는 달과의 섹스를 통해 다시 성인인 ‘나’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지만, 달은 사랑하는 여자와 섹스를 하면 쥐로 변하는 쥐 인간의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이토록 독특하고 흥미진진한 설정들이 이 소설을 매혹적인 판타지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작가와 배우란 직업을 가지고는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은둔형 외톨이들인 남녀 주인공의 러브 스토리는 어느 순간 잔혹 동화가 된다. 사랑했던 존재의 실체가 회색 쥐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거부한 것처럼, 달의 자기희생과 헌신적 사랑이 열두 살 소녀 ‘수지’를 서른셋의 여배우 ‘나’로 돌려놓지도 못한다. 그러나 [수지]는 ‘팀 버튼’식의 잔혹 환상 동화에서 멈추지 않고, 이별 이후의 것까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며 연애성장소설로 나아간다. 여기서 얻은 진정한 깨달음과 기억들을 통해 소설 속 인물들은 이제 또 하나의 세계를 향해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낯설고 새로운 상황들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시종 결말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김주희 장편소설 [수지]는 이 계절, 독자들의 시선을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을 것이다.
줄거리
서른세 살의 무명 여배우인 ‘나’는 2년 만에 간신히 배역을 얻는다. 스물일곱 살 신인 작가 ‘달’이 쓴 단막 드라마 「달의 마지막 연인」에서 주인공을 맡게 된 것이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계속 NG를 내고 있는 ‘나’에게, 무표정하고 냉담한 사람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따뜻한 눈빛과 달무리 같은 미소를 보내 준 인물이 바로 달이었다.
옥상 난간에서 자살 시도를 하고 있던 달을 우연히 구해 주게 된 이후, ‘나’는 5월의 마지막 밤에 말하는 고양이에게 이끌려 ‘달’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가 일곱 살짜리 아이가 되어 깨어난다. 그리고 다시 며칠 만에 열두 살 소녀로 성장한다. 달은 ‘수지’라는 이름으로 ‘나’를 부르며 보호자가 되어 준다. 이때부터 달과 수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사랑하는 여자와 섹스를 하면 커다란 회색 쥐로 변하는 달.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사랑할 수 없는 달은 연인에게 목숨을 주고 사라지기를 꿈꾸어 왔다. 그것이 달이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랑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 바람대로 달은, 달의 첫사랑이었던 ‘하수지’의 이야기를 듣고 절망하여 차도로 뛰어든 수지를 구하고 트럭에 치여 목숨을 잃고 만다. 흰쥐의 모습이 된 채 죽은 달. 그리고 그들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린 주변 사람들. 과연 수지는 서른세 살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