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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 내일은 너> 일어나기 전의 사건은 막연한 두려움이나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는 아무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 할 수도 있다. 전자는 미지의 사건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이고, 후자는 ‘무지의 무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예로 들어보자.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언젠가는 죽음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은 두렵고 피하고 싶은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삶에 충실하면서도 순종적으로 기다리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비현실적이지만 죽음에도 ‘무지의 무지’를 적용해 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작은 정보라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두려움이라거나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반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앎은 항상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겠지만, 그래도 ‘무지의 무지’ 상태보다는 나을 것이다. 앎 때문에 격정적이 되어 필요 이상의 공포나 분노를 갖게 되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무지 때문에 대상에 대하여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는 상태보다는 극단적 공포나 분노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 낫다. 공포와 분노의 감정을 경험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인상을 인식했다는 것이고, 어떤 종류의 앎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곧 극단적인 감정을 극복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겠기에 말이다.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당신에게’라는 의미로 묘지에 주로 사용하는 구절이다. 경구에 내포된 앎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오늘은 내가 이 묘지에 묻히지만, 잊지 말지어다. 언젠가 당신에게도 이 날이 온다는 것을.] 이 경구를 통해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앎을 전달받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를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죽음과 관련한 태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물론 어떤 태도를 형성하게 되느냐는 작지 않은 문제이다. 하지만 물을 근원으로 상반된 성질을 가진 독과 우유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죽음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태도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고, 비도덕적이거나 유해한 태도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막을 방법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앎을 확산시키고, 어떤 형태로든 그것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게 만든다는 것 자체이다. 상황이나 개념은 대체로 상반된 상황과 개념을 연상하게 한다. 모든 과정의 종착에 대한 사유는 그 과정에 대하여 다양한 연상 작용을 유발하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죽음은 삶을, 억압은 해방을, 존재는 무를, 사랑은 무관심을 그리고 양극단의 사이에 놓여 있는 무수히 많은 단계에 대한 사유를 촉진한다. 또한 사유하는 자의 경험과 결부되어 삶과 관련한 태도의 다양성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보다 훨씬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인간에게 앎이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앎을 통해 발생한 다양한 삶의 태도를 공유하고, 다양한 태도 중에서 가장 큰 흐름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자신의 태도와 비교하는 것만큼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앎은 의도적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표현이 진리인 이유는 ‘나’와 ‘너’, ‘오늘’과 ‘내일’의 의미망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오늘은 그 사람, 내일은 누굴까?’라고 바꾸면 예언자의 언어가, ‘오늘은 그 사람, 하지만 우리의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바꾸면 선동가의 언어가 된다. 또한 ‘오늘은 너, 내일은 나’로 바꾸면 협잡꾼의 언어가 된다. 예언, 선동, 협잡은 앎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효과인 윤리와 도덕을 파괴한다. <오늘은 카타리나 블룸에게, 내일은 우리들에게>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는 ‘앎’에 대하여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와 ‘앎’에 대한 객관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두 가지의 태도가 뒤섞이고 변모한다.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는 대체로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에게 우호적인 인물들에게서 발견되지만, 때때로 이 인물들도 극단적 감정이나 편견에 쌓여 분별 있는 판단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사건의 전개와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편견,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판단은 사건의 객관성과 관련한 크고 작은 사태를 만들어 간다. 사건의 핵심에는 분별력을 상실한 언론과 편견에 사로잡힌 기자가 있지만, 이 이야기는 단지 언론과 기자의 부정적인 행태를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편견. 이성을 지배하는 정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적절한지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되는대로 지껄이게 되는 무능함이 얼키고 설켜간다. 이야기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독자라면 작가의 의도대로 자연스럽게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사건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자신의 주관을 개입시킬 수밖에 없는데, 재미있게도 이 과정에서 점차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신뢰가 가는 것은 오직 서술자의 진술뿐이지만, 서술자가 카메라에 가까운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완벽하게 신뢰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사건의 진실에 대해 사고해보고자 하는 독자는 사건의 진행과 카타리나 블룸의 심리에 대해서 추리를 시도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작가가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 추리하게 되는 순간 독자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가치관과 편견이 작동하는 것을 느끼고, 독자 자신도 소설 속의 인물과 다를바 없는 오류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작가 하인리히 뵐이 추구하는 사회적 서사-골방의 서사, 개인적 서사가 아닌-의 강한 메시지 전달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앎은 항상 불완전하다. 앎이 불완전하다는 것 자체로는 나쁠 것이 없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하게 분석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앎이 보편적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이 불완전하고 보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언론은 이러한 사실을 대원칙으로 삼는 조금 특별한 세계인 것이고, 개인은 언론에 비해 조금 덜 할 뿐이지 동일한 원칙을 적용받는다. 이 원칙이 깨지는 순간 윤리 대신에 편견과 욕망이 행동의 준칙으로 부상하여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카타리나 블룸에게 일어난 일은 언제든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어쩌면 이미 일어나고 있고, 임계점 직전일 지도 모른다. <카타리나 블룸에 대해 나는 잘 알고 있는가?> 잠정적일지라도 카타리나 블룸이 저지른 살인의 의미와 살인의 동기에 대해서는 정리를 해야만 하겠다. 카타리나 블룸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기자를 권총으로 살해한다. 기사의 내용은 적대적일 뿐만 아니라 다량의 편견을 유포하는 내용이었다. 수사 기관 또한 황색언론이 받아적기 좋은 정보들을 흘려준다. 언론 보도 이후 카타리나 블룸은 고립되어 있었나? 대체로 이것은 사실이지만 사건 이전에도 이후에도 블룸은 강력한 지지자들에게서 고립된 적은 없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악의로 가득찬 기사를 써내던 기자를 직접 만나려 한 것은 계획 살인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어렵다. 심증은 있으나 소설의 정보만으로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의 발로이지만,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것이 무의미하다. 살해된 기자가 총에 맞기 전 마지막 남긴 말은 ‘나의 귀여운 블룸 양, 우리 일단 섹스나 한탕 하는 게 어떨까?’이다. 블룸은 이판사판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기자가 남긴 말이 특별한 이유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완벽한 무지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아. 기자는 무지 때문에 죽었다. 작가 하인리히 뵐은 이에 대해 ‘비열한 무지’라고 언급한다. 옳은 말이다. 무지는 비열함이고, 타락이고, 종말이다. 사실 블룸의 총구가 겨눈 것은 기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블룸을 완전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최악의 악덕은 ‘무지’이겠으나 굳이 그에 버금가는 악덕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망각’이다. ‘오늘은 기자가 내일은 내가’ 저지를 수 있는 악덕이 ‘무지’와 ‘망각’이 아니겠는가. <소설의 형식에 대하여> 도입부의 난해함 때문에 독서 초반에는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또한 초반에 모든 스토리가 공개되는 방식이어서 서사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을지(읽는 재미가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편안하게 읽으면 되는 소설인가보다 판단하였으나 인물을 등장시키는 방식,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 플롯 등 소설의 형식이 상당히 신선하였고 굉장한 긴장감을 주었다. 읽는 맛이 대단한 소설이다.
"너가 가진 돈으로, 너가 가진 명예로, 너가 가진 권력으로 너 자식들 대대로 편히 살게 해 줘. 그것이 바로 내가 너에게 내리는 천벌이야." -일대일 (김기덕 감독)- 이 보잘 것 없는 속계에서 그렇게도 가지지 못해 안달한 상처 받은 영혼들의 이야기 입니다. 계속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그렇게 배가 터지도록 편히 자자손손 편하게 사세요. 그것이 바로 신이 당신들에게 내리는 천벌이니까.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문필가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붓으로 아뤄진 범죄가 칼로 이뤄진 범죄보다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억울해 합니다. 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붓이 정녕 칼보다 강하다면 그 책임 또한 더 무거워야 합니다. -이영도- 조중동을 포함한 한국 언론에.
노무현대통령 그리고 오랜시간이 흐른 후 조국장관에 대한 언론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이 책이 떠올랐다 사람을 궁지에 몰며 희열을 느끼는 비열한 기자들은 이 책을 알까? 그들을 사람이라 부르기가 벅차다
언론의 무서움과 인간의 폭력성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소설. 기레기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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