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긴가, 안 웃긴가? 그것이 문제다. 같은 걸 보고 웃는 사람들끼리 무리를 이루는 세계에서 유머란 민감한 문제다. 상대편의 웃음을 단죄하지만 말고 같이 웃을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까? 농담할 기분이 아닌 어두운 시국에 함께 웃을 새로운 동료를 찾는 한편의 인문학
"네가 웃는데
나는 웃지 못할 때
농담 같은 현실에 실소하다가도 이내 웃음기를 거둔 채 맞은 새해. ‘웃을 일이 아니다…….’ 어두운 시절에 어떻게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한편》이 ‘유머’ 호에서 필자들에게 답을 청한 질문은 두 가지다. 무엇을 보고 웃나요? 그리고 누구와 함께 웃나요?
웃음은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기준이다. 어떤 모임에 나가고 특정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내가 웃기 때문. 함께 웃지 못하는 공동체는 끝내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어긋나는 웃음은 서로의 사이와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떤 유머에 누군가는 자지러지지만 다른 누군가는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공감하며 웃는 사람 옆에 조롱의 웃음을 짓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웃음의 격차를 드러내고 메우면서 마침내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
절망이라는 조건에서
나와 세상을 알아가기
진지한 현실에서 기발한 상상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야기가 만들어 내는 격차는 웃음을 자아낸다. 소설가 들깨의 「지배자의 몰락」이 묘사하는 현실은 악의로 가득하지만, 세상에는 악을 막을 수 있는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것들도 있다. 정치평론가 김민하의「누구와 웃을 것인가」는 불법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응원봉과 오타쿠 깃발이 등장한 시위의 의미를 짚는다. 독재자가 숭고함으로 무장하고 농담을 말살할 때, 거리로 나온 일상적 농담들은 앞으로 이어질 긴 겨울을 버틸 귀중한 자원이다.
인플루언서로서 느끼는 부자유와 질병의 통증 속에 침잠하던 작가 복길은 「나락에서의 농담」에서 유머의 조건을 사유한다. 유머가 “자신의 고통과 타협하지 않기 위한 싸움”이라면, 절망은 유머를 터득하기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이다. 작가 안담의「강간 농담 성공하기」는 정확한 웃음을 생산하기 위해 타인을 관찰하고 자기를 탐구한 기록이다. 불문학자 김영욱은 「보고서: 루소와 밀레의 우정」에서 온라인상 거짓 소문의 기원을 조사하며 모르는 이들의 삶을 엿본다. 내 농담에 웃지 않는 이들의 얼굴에 비추어 나를 알아가듯, 얼굴 모르는 이들의 글에서 발견한 나의 모습은 세상에 대한 유머러스한 이해를 선사한다.
꼰대와 MZ 사이,
페미와 한남 사이,
주식투자와 금투세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며 웃음의 동료를 찾자
유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대 앞에서 나를 표현하는 고도의 전략이기도 하다.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염문경의 「칼을 들고 다니는 여자」는 ‘페미’와 ‘한남’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농담을 무기로 삼은 화 많은 창작자의 회고다. 채만식의 「치숙」을 패러디한 번역가 엄일녀의 소설 「미련한 이모」에서는 ‘갓생’을 사는 조카와 페미·운동권·이혼녀가 충돌한다. 소설 속에서 주식투자에 명운을 건 조카와 금투세를 찬성하는 이모 사이에는 긴 강이 흐르지만, 창작물을 통해 멀리서 한번 웃고 나면 독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대에게 다가갈 용기가 생길 것이다.
웃음의 미묘하고 어려운 점은 언제나 의외의 순간에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웃고 웃기기 위해서는 우연을 위한 여백을 남겨 놓고 웃음의 감각을 열어 두어야 한다. SNL의 ‘MZ오피스’를 보고 웃을 수 없었던 MZ세대 편집자 김혜림은 「나는 나를 보고 웃지」에서 타인의 객관을 걷어 내고 함께 솔직해질 수 있는 유머의 형식을 찾아간다. 배우 김은한의 유머 리스트이자 작업 노트인 「오래 퍼지는 늑대 웃음소리」는 다정한 문체로 “은은하게 오래 웃은 시간”을 일깨운다. 새해를 맞아 독자들이 ‘유머’를 읽으며 희미해진 웃음의 기억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웃기 어려운 시절, 좋은 유머는 멀리멀리 퍼지는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구석구석 스며들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인문잡지 《한편》
끊임없이 이미지가 흐르는 시대에도, 생각은 한편의 글에서 시작되고 한편의 글로 매듭지어진다. 2020년 창간한 인문잡지 《한편》은 글 한편 한편을 엮어서 의미를 생산한다. 민음사에서 철학, 문학 교양서를 만드는 젊은 편집자들이 원고를 청탁하고,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젊은 연구자들이 글을 쓴다.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한편을 통해, 지금 이곳의 문제를 풀어 나가는 기쁨을 저자와 독자가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한편》 16호 ‘유머’에 적용된 글꼴은 SD 커오히체. 굴림체를 뻥튀기처럼 부풀린 천연덕스러움으로 진지한 궁서체 책들 사이에 틈을 낸다. 인문잡지 《한편》은 연간 3회, 1월·5월·9월 발간되며 ‘세대’, ‘인플루언서’, ‘환상’, ‘동물’, ‘일’, ‘권위’, ‘중독’, ‘콘텐츠’, ‘외모’, ‘대학’, ‘플랫폼’, ‘우정’, ‘집’, ‘쉼’, ‘독립’, ‘유머’에 이어 2025년 5월 ‘한국’를 주제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