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나도 혹시 나르시시스트?
* 성해나 소설가, 이정은 배우, 김보나 시인 인터뷰
* 박지영, 최예솔 신작 소설
* 정호승, 아타세벤 파덴, 안희연, 한영원 신작 시
* 정은귀, 황희승, 오은경 산문"
■ ‘나르’ 권하는 사회
MBTI에 대한 관심은 재미와 인기를 넘어 하나의 증상이 된 것 같다. 이 증상의 배후에는 타인이라는 공포와 피로가 있고, 그 장벽 같은 타인의 전형으로 ‘나르시시스트’가 있으며, 그 이면에 ‘나르시시즘 권하는 사회’가 있다. 나르시시즘에 관해서는 뇌과학적 소견이나 정신의학적 결론들이 이미 존재한다. 그에 따라 우리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즉 병리적 개념으로 먼저 나르시시즘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의학이란 울타리를 벗어나면 그곳에 인간적 태도로서의 나르시시즘이 있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는 멀지만 가까이에 있고, 어쩌면 내 안에도 있을지 모를, 나르시시즘에 관한 이야기다.
친밀한 이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김화진의 짧은 소설은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 밉살스런 친구를 관찰한다. 친구의 말버릇에서 마음버릇을, 마음버릇에서 나르시시즘의 그림자를 목격하고 비웃다 보면 어느새 내 얼굴이 되비치는 거울 같은 작품이다. 정기현은 유료 챗지피티와의 대화 경험을 수기로 들려준다. 나에게 최적화된 대화 상대가 안겨 주는 완벽한 소통의 희열은 역설적으로 현실에서의 불완전한 소통에 대한 불만을 부추긴다. 타인을 소거하는 나르시시스적 도취와 오버랩되는 장면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개념도 변하고 있다. 최종렬은 나르시시즘적 개인주의의 출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탄생과 또 다른 점성의 연대를 발견하고, 김경태는 케이팝의 주요 테마가 된 나르시시즘적 이상을 그 노랫말에서 확인하며 사회에 내면화된 나르시시즘을 감지한다. 문학적, 심리적 영역에서 만나는 나르시시즘은 보다 본질적으로 인간 내면을 탐구한다. 오자은은 문학 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나르시시스트를 호출하는데, 특히 김기태, 이희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추구하는 사랑은 사랑의 종말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자처한다.
무의식으로 좀 더 내려가 보자. 임상심리전문가 전운은 영국 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를 리뷰한다. 실패한 나르시시스트의 병적인 자기애는 애정과 범죄 사이에서 도착적 위로를 증식시킨다. 과도한 자기연민도 나르시시즘의 숙주일 수 있다는 경고가 남의 얘기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정치적 영역에서 나르시시즘은 사회의 무의식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장영은은 현실 정치에서 마주한 어느 정치인의 언어 사용에서 한국 사회의 정치적 무의식과 구조적 한계를 도출한다. 나르시시즘이 질병이라면 그 병은 감기에 비견될 만하다. 이 병에 안 걸리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병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있을 수 없다.
■ 소설가 성해나, 시인 김보나 인터뷰
인터뷰 코너에서는 화제의 소설집 『혼모노』를 출간하며 뜨겁게 주목받고 있는 성해나 작가를 만났다. 《릿터》의 작가 인터뷰는 ‘사연’ 있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성해나 작가와 대화를 나눈 곳은 떡볶이 못지않게 점집으로 유명한 신당동이다. 한 골목에 사는 젊은 무당과 늙은 박수무당의 경쟁이 인상적인 소설 「혼모노」가 연상되는 길을 거닐며 그가 취하는 소설의 소재들과 그가 인물들과 호흡을 맞추는 과정 등에 대해 들어본다. ‘첫 책을 만나는 기분’에서는 첫 시집 『나의 모험 만화』를 출간한 김보나 시인을 만났다. 월간지 《좋은생각》의 편집자 경험, 문학 집필 공간인 ‘에버덩’에서 만난 문인들과의 일화 등이 시적인 것으로 발효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 배우 이정은이 기억하는 고전문학 속 ‘첫사랑’
영화 「마더」에서 김혜자의 멱살을 잡아채며 화를 내던 ‘여자’로, 「변호인」에서 반쪽짜리 눈화장만 간신히 마친 채 문틈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미는 ‘집주인’으로, 「미스터 선샤인」의 잊을 수 없는 온기였던 ‘함안댁’으로…… 왕성한 작품활동 안에서 예외 없이 다른 빛의 감탄을 자아냈던 배우 이정은을 만났다. 어릴적부터 혼자 이야기를 만들어서 인형에게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던 이정은 배우에게 각별했던 사랑 이야기는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과 황순원의 『소나기』다. 연극을 할 무렵부터 자연스럽게 체화된 고전 읽기와 그 감상의 추억을 들어본다.
■ 박지영, 최예솔 단편소설 발표
박지영의 소설에는 블랙코미디라는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어둠과 유머가 있다. 「귀의 행방」은 ‘귀 서래소’ 매니저인 주인공과 스스로 귀를 잘랐다고 전해지는 반 고흐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환상적 풍자극으로, 귀를 거래하는 상점이 있다는 과장된 상상을 메우는 것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길 원하는 세태에 대한 서글픈 핍진성이다. 귀의 행방을 묻는 박지영식 농담내서 ‘듣기’를 잃어버린 우리의 초상을 발견한다. 최예솔 단편소설 「애프터눈 드라이브」는 이제 막 운전을 하게 된 주인공의 서툰 드라이브 뒤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청춘의 서툰 인생 주행을 그린다.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후로 계속되는 또 다른 만남과 헤어짐에는 안내판도 없고 과속 제한 표시도 없다. 일희일비의 사건들을 풍경화로 담아내는 부드러운 필치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