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이후 12년 만에 다시 만나는 거장의 감성
쿠로키 하루, 아야노 고 주연
9월 28일 극장 개봉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원작소설
“낯선 세계에서 깨어난 립반윙클처럼
눈을 떴을 때 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면 어쩌지?”
아름다운 영상과 특유의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전세계 영화 팬들의 사랑 받는 감독. 이와이 슌지가 신작 <립반윙클의 신부>를 발표했다. <러브레터> <하나와 앨리스> 이후 12년 만에 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만든 실사영화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감독이 집필한 동명의 소설은 일본 현지에서 영화 개봉에 앞서 출간되어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의 변함없이 아름다운 세계가 ‘소설가’ 이와이 슌지의 손에 의해 영화와는 또 다른 형태로 꽃을 피운다.
SNS에서만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폐쇄적인 삶을 살던 주인공이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는 아름다운 풍광과 비일상처럼 느껴지는 일상의 장면들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와이 슌지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현실의 문제들을 독특한 사건과 배경을 통해 그려냈다. 여기에 다양한 동화적 모티프가 더해져 잔혹하고 아름다운 ‘현대의 페어리테일’이 탄생했다. 때로는 아련한 감성을 자극하고 때로는 신랄함으로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감독의 작품세계를 집대성한 ‘새로운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든 것이 바쁘게 돌아가는 차가운 도시 도쿄에서 홀로 생활하는 23살의 나나미. SNS ‘플래닛’에서 만난 남자와 얼떨결에 결혼을 약속한 그녀는 결혼식에 부를 친구와 친척이 없자 플래닛에서 알게 된 남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어떤 심부름이든 해 준다는 ‘아무로’라는 이름의 남자가 섭외한 가짜 하객들 덕에 결혼식은 무사히 끝나지만, 나나미의 이 작은 거짓말은 생각지 못한 사태를 불러온다.
SNS와 현실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보이던 주인공은 거짓말 때문에 파국을 맞게 된다. 이처럼 낯선 타인과 쉽게 소통하지 못하는 현실과, 그에 대한 반동인 것처럼 거리낄 것 없이 얼굴도 모르는 타인과 마음껏 소통을 즐기는 SNS 세상. 그리고 돈만 있으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서비스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 이와이 슌지는 이러한 현대의 모습에 주목해 ‘지금 이 사회,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을 이야기한다. 자유로운 소통을 위한 기능이 거꾸로 현실의 소통을 낯설게 하고, 갖가지 서비스들이 오히려 인간을 속박하기도 하는 씁쓸한 양면성이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진다.
낯선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20년이 흘러있었다는 어빙 워싱턴의 소설 《립반윙클》처럼 나나미는 그간 알지 못했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낯선 사람들과 낯선 일들을 접하면서 나나미는 점차 변화한다. 쫓겨나듯 집에서 나와 허름한 호텔의 욕실 거울에 비친 혈색 좋은 얼굴을 보고 나나미는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깨닫는다. 차가운 현실에 내던져진 듯 보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해방과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진짜 사랑을 만나게 된다.
주인공 나나미, 서비스 맨 아무로, ‘립반윙클’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등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이 ‘행성’을 떠돌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깨닫고 자기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은 확연한 희망을 준다. 이는 틀에 박힌 성장소설이 아니다. 늘 불안과 무기력을 안고 사는 현대인들이 읽어야 할 하나의 ‘우화’에 가깝다.
이 소설에는 작품 전체와 제목의 배경이 된 소설 《립반윙클》을 비롯해, 동화 《울어버린 빨간 도깨비》와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모티프이기도 하며 때로는 인물들의 관계나 성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장치가 된다. 이것이 차가운 현실의 상황과 어우러지면서 마치 현실이 아닌 듯한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의 캐릭터와 명대사에서 차용한 부분에서는 감독의 재치가 드러난다.
<책 속으로>
타산적이다…….
하지만 타산의 조각을 산더미 같이 쌓아 올려야 사랑의 형태가 보인다. 이는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인 듯싶다.
나나미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나나미는 계속 울면서 데쓰야가 눈물을 닦아주는 대로 있었지만, 이 눈앞의 남성과 결혼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감격했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더 이상 취직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신중하지 못하다는 것은 알면서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어떤 최상의 요리도 지금의 나나미에게는 단순히 살기 위한 식량이다. 하지만 어떤 요리도 살아가기 위한 식량을 당해낼 수 없으며, 살아가기 위한 식량보다 귀한 요리가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
데쓰야가 신혼집에서 쫓아낸 그날,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나라는 사람은 초췌한 상태였다. 하지만 내 속의 세포들은 그렇지 않았다. 다음날 호텔의 세면대에서 본, 그 거울에 비친 혈색이 좋은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직 세상의 진정한 원리를 하나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신성모독.
나나미에게는 종교가 없었지만 예배당의 가운데에 놓인 십자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면 이 어리석고 불쌍한 자들을 부디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세요. 그냥 웃어주세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마치 립반윙클과 같은 하루였다. 낯선 결혼식에 참석해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술잔을 나눴다. 내일 잠에서 깼을 때 20년이 지난 후의 세상이면 어떡하지? 과연 어떤 세상일까? 이 스마트폰은 계속 쓸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키스를 했다. 사랑을 형태로 나타내려고 하면 결국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방법밖에 모른다. 그런 생각이 담긴 키스였다.
“이 세상은 사실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 모든 사람들이 잘 대해 주거든. 택배 아저씨는 내가 부탁한 곳까지 무거운 짐을 날라주지. 비오는 날에는 모르는 사람이 우산을 준 적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쉽게 행복해지면 나는 부서져 버려. 그래서 차라리 돈을 내고 사는 게 편해. 돈은 분명히 그런 걸 위해 존재할 거야. 사람들의 진심이나 친절함 등이 너무 또렷이 보이면 사람들은 너무 고맙고 또 고마워서 다들 부서지고 말 걸? 그래서 모두 돈으로 대신하며 그런 걸 보지 않은 척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