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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 디지털 시대를 건너며 상세페이지

개정판 | 디지털 시대를 건너며

  • 관심 0
작가와 출판
소장
전자책 정가
9,000원
판매가
9,000원
출간 정보
  • 2026.03.05 전자책 출간
듣기 기능
TTS(듣기) 지원
파일 정보
  • EPUB
  • 약 6.9만 자
  • 3.1MB
지원 환경
  • PC뷰어
  • PAPER
ISBN
9791142195907
UCI
-
개정판 | 디지털 시대를 건너며

작품 정보

양복 위에 갓을 쓴 남자

양복 입고 갓 쓴 사람. 나 자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이것만 한 문구도 없을 거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해 보스턴의 컴퓨터 회사에 다니던 ‘공돌이’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술대학교 교수로 변신했으니 말이다. 지난 30년 동안 아티스트들을 길러내고, 창의성이 넘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왔지만, 여전히 나 자신을 예술가로 여기지 않는다. 공대 동기들은 날 보면서 너무 아티스트적이라고 했고, 예술대 동료들은 반대로 너무 공학적이라고 말했다.
<스타크래프트 2>의 명대사를 빌리자면, 나는 ‘끔찍한 혼종(hybrid)’인 셈이다. 어디에도 완벽하게 속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듯한 이 감각에 괴로워했다. 양복에는 중절모, 두루마기에는 갓이 당연한 상식 아니던가! 그런데 양복 차림에 갓을 쓴 꼴이니 뭘 해도 나는 튀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힙(hip)’하다고 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갓에는 두루마기를 고집하는 양반들에게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고 개탄할 노릇일지도 모른다.
융합, 통섭, 크로스오버 같은 용어들이 혁신이라는 이름과 짝을 이루며 유행하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가 증명했듯 테크놀로지는 감성을 담지 못하면 시장에서 도태되고, 반대로 예술은 감성과 기술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면 구태가 된다. 그저 자기 자리를 열심히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얼떨결에 나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다. 인생사 참으로 새옹지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나는 PC, 인터넷, 스마트폰이라는 세 차례의 거대한 파도를 정통으로 맞았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AI라는 해일을 온몸으로 견디는 중이다. 매번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기술 혁신의 파도를 서퍼처럼 멋지게 올라타고 싶었다. 그러나 실상은 물을 잔뜩 먹으며 허우적거리기에 바빴다. 그럼에도 가라앉지 않고 이때까지 살아남은 것에 대한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놈이 강한 거라는 말도 있잖은가.
AI라는 파도는 이전에 만났던 세 번의 파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규모나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변화의 방향이 다르다. 이번에는 기술이 먼저 앞서가고, 인간이 그 뒤를 쫓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조차 숨이 찰 정도로 빠르다. 기술 발전만 좇다가는 뱁새처럼 가랑이가 찢어질지도 모른다.
언젠가 AI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코딩을 배워야 하는지 질문한 사람이 있었다. 아직 AI 에이전트라는 게 시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이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공부터 쌓아야 합니다.”

내공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전 생애에 걸쳐 겪어온 수많은 경험들—성공과 실패, 취향과 취미, 쓸모없어 보였던 시간들까지—그 모든 것을 하나로 녹여내는 힘이다. 이전에는 개인이 가진 경험이 분리되어 있었고, 좀처럼 시너지 효과를 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AI와 함께 일하는 시대에는, 흩어진 경험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묶어낼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차이를 만든다.
AI는 평균을 잘 낸다. 그러나 평균을 넘는 결정은 아직 인간의 몫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 필요한 건 기술을 이기는 속도가 아니라, 기술이 흉내 낼 수 없는 방향 감각이다. 내가 쌓아온 경험 전체가 곧 자산이 되는 이유다. 나는 이것을 ‘내공자본(內功資本)’이라 부르고 싶다.
나는 평생 기술과 함께 살아왔지만, 사실 관심의 대상은 언제나 기술이 아니었다. 기술을 쥔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어디서 망설이는지, 무엇을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지가 더 궁금했다. 기술은 늘 인간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왔다.
그래서 나는 AI라는 파도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조금은 옛날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PC, 인터넷, 스마트폰이라는 세 번의 파도를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남겼는지를 기록하려 한다. 이 책은 양복 위에 갓을 쓰고 살아온 한 혼종의 생존기이자 추억담이다. 동시에 모두가 양복 위에 갓을 쓰고 살아가는 뉴노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제언이기도 하다.
네 번째 파도 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기록이 작은 부표 하나쯤은 되기를 바란다.
김재하

작가 소개

김재하는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온 교육자이자 연구자이다. 아날로그 환경에서 성장해 PC, 인터넷, 스마트폰, 그리고 생성형 AI에 이르기까지 네 번의 기술 전환기를 현장에서 통과하며,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꾸준히 관찰해왔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선택과 태도에 있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며 그는 반복되는 질문을 마주했다. “이 기술을 배워야 할까요?”, “이 흐름을 따라가지 않으면 뒤처지는 걸까요?” 기술은 점점 정교해지는데, 사람들의 기준은 오히려 흐려지고 있다는 위기감이었다. 이 책은 그 질문들에 즉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다시 제대로 세우기 위해 쓰였다.
김재하는 기술을 도구로 숭배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대신 기술이 인간의 사고, 감각, 관계를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를 차분히 되짚으며, 변화 속에서도 끝내 남는 인간의 역할과 태도를 탐구한다. 교육 현장과 다양한 실천 경험을 통해 쌓아온 그의 시선은, 기술의 속도를 늦추기보다 방향을 점검하는 데 집중한다.
이 책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안내서가 아니다. 다만 기술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기준 삼아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지 묻는 기록이다. 기술이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에게 남는 질문은 결국 같다는 믿음에서 이 책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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