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형체가 아른거리는 야릇한 드라마.
이런 불꽃을 만나는 건 드문 행운이라 기뻤다.”
_소설가 조예은
오랜 시간 떠도는 기억과 혼을 머금고 살아 있는 집
욕망이 떠도는 적산가옥(敵産家屋) 안에 깃든
엄혹한 시대와 강인한 사랑, 뜨거운 생의 기록
『파친코』. 『작은 땅의 야수들』의 계보를 잇는
시대와 욕망, 사랑과 구원의 장대한 대서사극
배명은의 『수상한 한의원』, 백승연의 『편지 가게 글월』, 정명섭의 『암행』 등을 연달아 흥행시키며 ‘새롭고 재미있는 이야기’의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는 출판사 텍스티(TXTY)가 2025년 12월, 야심 차게 준비한 장편소설을 선보인다. 2021년 단편 「꽃산담」으로 계간 《미스터리》 가을호 신인상을 수상하고 2023년 「해녀의 아들」로 제17회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을 수상하며 미스터리·추리 장르에서 필력을 인정받은 박소해 작가. 그가 장고 끝에 내놓은 첫 장편소설 『허즈번즈』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 속에서도 주체적인 의지와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시대에서 ‘여성’은 가장 약자의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주인공 ‘수향’은 자신을 옥죄이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삶의 방향키를 스스로 돌리며 원하는 곳을 향해 ‘눈물로 길을 내며’ 나아간다. 역사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수향의 여정은 마치 『파친코』의 주인공 ‘선자’를 연상시킨다.
『허즈번즈』라는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 수향은 자신의 여러 ‘남편들’을 거느리고, 지배하고, 때로는 자애롭게 아우르고 포용하며, 유구한 가부장제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과 사랑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역사의 상흔에도 굴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내면의 성장을 거듭하며 자신의 한계를 경신하는 수향과, 수향을 둘러싼 여러 명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남편들. 장엄하지만 음산하고 기이한 적산가옥이라는 배경이 만나 『허즈번즈』는 아슬아슬하면서도 관능적인 정서를 자아낸다. 『파친코』 『작은 땅의 야수들』의 계보를 잇는 시대와 욕망, 사랑과 구원의 장대한 대서사극이 펼쳐진다.
[추천의 말]
자신의 욕망에 이토록 솔직한 여성 주인공에게 마음이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대범함과 당당함이 이 소설의 파격적인 설정에 대한 하나의 개연성이다. 1945년 해방을 기점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격통의 역사를 거쳐 1951년에 막을 내린다. 치밀하게 조사한 역사적 배경과 제주의 무속 신화가 켜켜이 어우러져 지금껏 접해본 적 없는 새로운 맛을 내고, 간결한 묘사와 각각의 캐릭터성이 도드라지는 대사들은 독자를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로 단번에 몰아붙인다.
집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기묘한 사건은 역사와 무속, 범죄와 로맨스를 아우르며 한 가지 장르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불길한 형체가 아른거리는 야릇한 드라마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펼쳐보기를.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을 정신없이 뒤쫓는 과정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주인공만큼이나 이글거리는 작가의 욕망이 오롯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원하는 장면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펼쳐놓고자 하는 무형의 불꽃을 만나는 건 드문 행운이라 기뻤다.
-조예은(소설가)
[줄거리]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외할머니, 여동생과 함께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던 수향은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병(巫病)에 시달리고, 외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제주도의 전통 굿인 ‘추는굿’을 치른다. 그 이후로 수향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아기 심방(무당)이 된다.
이후 여동생과 할머니를 여의고 외톨이가 된 수향은, 낯선 친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제주를 떠나 경성으로 간다. 1945년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조선총독부 토지과 고위 관료로 일하던 친부는 정권으로부터 나가스 가문의 대저택, 적산가옥을 불하받는다. 수향은 친아버지와 새어머니, 이복 남동생과 함께 나가스가(家) 대저택에 입성한다.
나가스 대저택에는 어쩐지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추는굿’을 통해 영안(靈眼)이 트인 수향은 이 저택 안에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또 다른 영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해방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세가 기울어진 수향의 집안은 수향을 쌀가게 노인의 외동아들 ‘최영우’와 강제로 혼인시킨다. 수향의 결혼을 대가로 얻은 몸값은 쌀 여덟 섬. 수향은 쌀 여덟 섬에 자신을 팔아넘기듯 혼인시킨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분노한다. 원치 않은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수향은 어느 날, 남편 최영우의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최영우를 면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한다.
수향은 쌀가게 노인의 ‘외동아들’이라던 최영우를 조사하고 관찰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숨겨온 그의 정체를 눈치챈다. 수향은 최영우를 역으로 협박하여 그의 입으로부터 충격적인 진상을 듣는다. 밤마다 자신의 방에 들어오던 ‘최영우’가 실은 한 사람이 아니라 영일, 영진, 영우로 이뤄진 세쌍둥이였던 것. 수향은 이 결혼 사기극에 절망하지만 돌연 정신을 차리고 영우와 영진, 영일마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결혼을 강제로 진행한 아버지, 새어머니, 쌀가게 노인을 한꺼번에 독살한다.
한편, 수향이 대저택에 입성할 때부터 그를 지켜보며 수향의 행적을 뒤쫓고 있던 한 남자, 마사키는 정체를 숨긴 채 의도적으로 수향의 곁을 맴돈다. 수향을 살피던 중, 마사키는 수향과 영진, 영일, 영우가 살해한 부모들을 땅에 묻는 장면을 목격한다. 마사키는 이를 수향의 약점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그에게 접근한다. 수향은 존속살해의 비밀을 숨기는 조건으로 어쩔 수 없이 마사키를 나가스 저택 안에 들이는데……. 마사키가 나가스 저택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음산한 적산가옥을 무대로 한 여자와 ‘남편들’의 사랑과 파멸, 구원의 대서사극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