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2년 3월 12일, 새벽 12시 17분. 진겸이가 세상에 나왔다.
열 달 동안 품었던 작은 생명이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나는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기쁨도 안도감도 아닌, 형언할 수 없는 막막함이 밀려왔다. 이 작고 소중한 생명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나는 과연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엄마였다.
88년 10월, 스물여섯의 나이에 첫 아이를 낳았던 엄마. 그 후로 연이어 세 아이를 키우며 온갖 고생을 다했던 엄마. 어린 시절 나는 그런 엄마가 답답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나라면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분만실에서 진겸이를 처음 안았을 때, 그 작은 숨소리와 따뜻한 체온이 내 가슴에 전해지면서 갑자기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도 나를 이렇게 안았을까. 이 벅찬 감정과 동시에 밀려오는 책임감을 엄마도 느꼈을까.
그 순간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엄마, 저 엄마가 됐어요. 이제 엄마 마음 알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이 오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진겸이가 태어난 직후 몇 달간은 매일이 전쟁 같았다. 밤낮없는 수유, 끝없는 기저귀 갈기, 이유 없는 울음에 속수무책으로 당황하는 나날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엄마의 조언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요즘 엄마들은 너무 예민해. 우리 때는 그냥 키웠어." 같은 말씀들이 오히려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랬던 내가 언제부터인가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진겸이가 밤에 자지 않아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잤을 때, 엄마가 말씀하셨다. "네가 어릴 때도 그랬어. 밤새 업고 재우곤 했지. 그때는 지금처럼 육아용품도 많지 않았는데 어떻게 견뎠는지 몰라." 그 말씀을 들으며 처음으로 엄마의 고생이 실감났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를 키웠다. 지금처럼 인터넷에서 육아 정보를 검색할 수도 없었고, 육아 커뮤니티에서 위로받을 수도 없었다. 그저 경험과 직감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버텨냈을 것이다. 게다가 한 명이 아닌 세 명의 아이를. 생각해보니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늘 바쁘게 사는지, 왜 우리에게 엄격한지, 왜 자신을 위한 시간은 갖지 않는지. "엄마는 꿈은 없어?"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는 잠시 멈칫하더니 "너희들이 내 꿈이야."라고 대답하셨다. 그때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개인의 삶을 포기한 채 아이들에게만 매달리는 엄마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겸이를 키우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내 꿈보다 아이의 웃음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물론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우선순위가 바뀐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희생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엄마가 되어보니, 이제야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의 그 모든 선택들이 얼마나 숭고하고 위대했는지를. 단 하루도 쉴 틈 없이 아이들을 위해 살아온 엄마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아름다웠는지를.
어린 시절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야 그 다짐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엄마는 나쁜 삶을 산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나보다 훨씬 일찍, 훨씬 어린 나이에 '엄마'라는 무거우면서도 아름다운 이름을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왔을 뿐이었다.
이제 나도 그 길을 걷고 있다.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막막하지만, 그래도 행복한 길을. 그리고 이 길 위에서 엄마와 나는 드디어 만났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마음으로, 함께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깨달음을 담은 이야기다. 갈등과 오해로 등을 돌리고 살았던 시간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며 진정한 사랑을 나누게 된 우리 어머니와 나의 이야기. 완벽하지 않은 엄마와 완벽하지 않은 딸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의 이야기.
세상의 모든 엄마가 된 딸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새롭게 바라보고, 그 따뜻한 시간 속에서 자신의 마음도 치유되는 감동을 느꼈으면 한다.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묵묵히 자식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모든 어머니들께 이 책을 바친다. 당신들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당신들의 희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