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쓰고 출근합니다.
그저 일이 좀 힘들다고 집에 와서 늘어져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점점 더 철저히 일과 집에서의 삶이 갈리는 듯했습니다. 일할 때 조아리고 굽신거리다 집에 들어오면 그 자잘한 움직임을 멈추고 허리를 곧게 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수긍하느라 자동차 대시보드의 인형처럼 연신 끄덕거렸던 고개를 멈추고 그 밖의 자잘한 움직임이 잠잠해지고 입을 다뭅니다. 정적이 도는 집안에 들어서 고요함을 확인하면 씁쓸한 안도감이 듭니다.
정말로 허기진 건 아니지만 제대로 먹은 것 같지 않아 라면과 떡볶이, 빵, 과자, 커피를 시간에 맞지 않게 먹습니다. 먹으면서 핸드폰을 보는 것이 한 세트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저녁 9시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니까 원하는 만큼 최대한 늦게까지 ‘나’로 있기위해 잠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다 써버리고, 다음 날 아침 저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무능력자로 깨어나겠죠.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나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추임새처럼 이런 생각이 따라오지만, 행동은 바뀌지 않습니다. 지겨울 법도 한데 그런 감각마저 죽어버렸는지 몇 년째 이런 생활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보는 매체가 영화에서 넷플릭스로, 유튜브 쇼츠로 조금씩 바뀌었을 뿐 어쨌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자기발전을 해야지. 다시 일어나야지’하는 마음은 오직 일할 때만 듭니다. 무능력자 취급을 당한다고 생각될 때만. 지금만이야. 이게 마지막이야. 일 끝나고 집에 가서 준비해야지. 이런 취급에서 벗어날 거야. 하지만 집에 돌아와선 매번 같아요. 반복되는 일상. 멍청이 같은 나를 자책하다 그런 죄책감마저 잊어버리고 싶어 중독거리, 볼거리를 찾아 헤맵니다. 그렇게 또 밤이 지나고, 아침이면 바보가 되어 출근합니다. 회사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는 굴욕의 순간, ‘집에 가서 준비한다’, ‘준비해서 떠난다’ 이제는 껍데기만 남은 다짐을 또다시 합니다. 어차피 집에 가서 유튜브를 켜놓고 자겠지만…. 다짐은 점점 기대감 없는 중얼거림으로 바뀌어 갑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스트레칭과 명상, 책 읽기, 미라클 모닝, ABC 음료, 다이어트, 토익, 재테크 등등. 세상에는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성공 방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직장생활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인터넷 속의 숱한 스토리도 많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1년 정도 시간만 투자하면 인생이 바뀐다고, 그런데 그걸 못하냐고 조언하는 사람들도. 모두 힘들었지만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성공 신화도.
모든 말에 동의합니다. 끄덕끄덕. 대시보드의 강아지처럼 연신.
하지만 밸런스를 갖춘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죽어있는 낮 시간에 살아있었겠죠.
누군 좋아서 노력하는 것 같냐며, 다들 힘든 시간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고 극복한 거라고,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아. 당신들의 삶은 그 힘듦, 역경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성취해 왔겠죠. 그래서 실패를 통해 배우고 더 강해졌다는 말, ‘성공의 어머니는 실패라는 말이 있지 않냐’는 말이 진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에겐 그런 말들이 하나도 새롭지가 않아요.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냈다는 강인함, 투지, 도전하는 삶, 이 모든 것이 성공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는 말들. 피로해요. 결국에 성공한 자들의 말. 그 결말을 알고 있는 자들의 말. 성취감을 기대할 수 있는 자들의 말일뿐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고된 시간들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가 되겠죠.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 도저히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결국엔 그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 그로부터 인정을 받아내는 사람들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실패한 자의 말은, 아직 성취하지 않은 자의 말은, 성공법칙을 기대할 수 없는 자의 말은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성공하고 싶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은 자의 말은요.
인터넷 속 숱한 성공법칙들은 어쩌면 예전의 나에게 통했을지도 모르겠어요. 20여전의 나에게는 통했을지도.
나도 그때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절제할 수 있었을 때에. 절제가 보상을 기대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걸 그때는
몰랐거든요.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삶. 언제부터 이 삶이 내 것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낮 시간, 그 8~10시간 동안 자아를 빼앗기지 않은 사람만이 보상을 기대하며 노력과 절제를 할 수 있나 봐요.
그 시간 죽었다 다시 깨어나는 사람에게 노력이란 쉽지 않다는 걸 몰랐습니다. 노력으로 삶의 굴레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 어떤 사람
에게는 아주 힘들다는 것을 몰랐어요. 너무나 두꺼운 사회적 가면을 써버린 지금, 힘이 듭니다.
어떻게 나와 같은 사람, 이미 지친 사람이 다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그마저 에너지도 없어집니다.
어떻게 다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나와 같은 사람이.
버티고 서 있지만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조급하게 찾아 헤매다 글쓰기를 잡았습니다.
나는 알고 있지.
내가 죽어 사는 낮 시간에 바보처럼 넋 놓고 있으면서도 나로 돌아오는 밤마다 사실은 이 지겹고 질려버린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었다는 걸. 다시 완전함을 기대하고 성취하길 바라고 아주 많이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는 걸.
내내 다른 세계를 갈망하고 그곳으로 나를 밀어 넣고 있었다는 걸.
낮 시간을 부정했고, 그래서 죽어있어야만 했다는 걸.
그걸 쓰고 싶었습니다. 내 안의 이야기를.
내가 어쩌다 바보가 되었는지, 어떻게 서서히 무너져버렸는지, 어느 순간에 무엇이 나를 추진케 하는지, 어떤 자극에 반응하는지 그 전부를 쓸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생각만으로도 마음 아픈 이야기는 묻어둘 수밖에 없고, 신경세포가 타버릴 듯 괴로움에 기억마저 날아가 버린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그때와 달라진 감정들이 복구되지 않아 쓸 수 없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더 놓쳐버리기 전에 나를 구성하는 내 안의 말들을 꺼내 놓고 싶었습니다.내가 줄곧 이런 생각을 해왔다는 걸 또다시 잊지 않기 위해서.
줄곧 나를 다른 세계로 넣고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