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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 상세페이지

에세이/시 에세이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

소장종이책 정가15,800
전자책 정가30%11,000
판매가11,000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작품 소개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 고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작품으로 살펴보는 트라우마

『오이디푸스 왕』 『트로이의 여인들』 『데카메론』 등의 고전부터 『헨젤과 그레텔』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등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소설, 알베르 카뮈, 귄터 그라스, 이창래, 쿳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 이르기까지 현대 작가들의 최근작까지 망라해 소개된 이 책을 관통하는 것은 곧 트라우마이다.

‘오이푸스의 이야기’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질투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기구한 운명의 회오리에 휘말린 어떤 이가 겪은 트라우마와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헨젤과 그레텔」은 계모에게 버림받은 남매의 이야기가 아니라 친모에게 버림받은 남매의 이야기였으나, 가족간의 행복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회의 걱정과 독자들의 구미에 영합, 개작된 작품으로서 원전의 뜻을 재해석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모든 것을 주는 희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우리가 ‘희생’이라는 선의의 이름을 부여하며 등한시하게 되는 희생하는 자의 고통, 그런 타인의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이다.

체벌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로 지금도 많이 회자되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한 아이의 성장소설이라기보다는 가정폭력과 그로 인해 일그러진 한 아이의 자화상으로 폭력을 가시화시킨 또 하나의 폭력을 드러낸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기이한 열풍을 일으킨 소설이다.

메르스 등 일련의 상황을 통해 집단 공포를 경험한 우리의 눈으로 보면 카뮈의 『페스트』는 보편적, 초월적 성찰로 읽으면 집단적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지침서 같은 소설이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 속에 보면 유럽 중심적인 사고 속에 탄생한 아쉬움이 남는 소설이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는 트라우마가 피해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닌, 가해자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증언하고 있으며,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은 전쟁의 트라우마를 완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극복을 향해 가는 길에는 대단한 극복 의지보다 그저 상황을 아파하는 슬픔,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전범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아픔을 내보이기보다는 세계에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에 매진했던 독일에게도 구스틀로프호 참사라는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을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으로』를 통해 살필 수 있으며, 실제 자식을 앞서 보낸 쿳시가 쓴, 자식 잃은 아버지의 트라우마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를 통해선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과 상처와 죄의식마저도 예술의 소재로 써야 하는 작가 자신의 고뇌를 살펴보게 한다.

타자의 상처를 다룰 때 어떻게 윤리성과 비윤리성이 동시에 개입되는지를 보여주는 이창래의 『제스처 라이프』와 목소리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증언의 형태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충격적인 트라우마적 사건들이 일어나는 근대에는 더 적합한 형태의 양식이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알렉시예비치이 ‘목소리 소설’은 트라우마를 증언하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게 한다.

침몰하는 배에서 보여준 인간의 이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조지프 콘래드의 『로드 짐』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찾지 못해 제대로 된 울음 한 번 울지 못하고 애도를 시작도 못한 우리의 아픈 세월호를 떠오르게 한다.


출판사 서평

상처를 생각한다
타인의 상처, 타자의 트라우마
나의 상처, 나의 트라우마

“진정한 애도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문학 속에 나타난 죽음과 애도, 그리고 그에 대한 예찬이었던 『애도예찬』으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왕은철의 후속 에세이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2015년 3월호부터 2016년 8월호까지 1년 6개월에 걸쳐 월간 『현대문학』에 절찬 연재됐던 글들을 묶은 이 책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상처의 흔적들이 어떤 형태로 표출되면서 삶을 변화시키는지의 해답을 문학을 통해서 얻고자 기획된 책이다.

전작 『애도예찬』을 통해 애도는 토로하게 되는 순간부터―즉, 언어의 영역으로 전환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고백한 필자는 이번 책에서도 상처를 돌아보고 얘기를 시작했다는 것은 더디긴 하지만 상처가 드디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암시일 수 있다며, 문학의 역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섬세한 터치로 써내려간 두 저작은 죽음, 상실로 인한 슬픔과 그로인한 트라우마를 어떻게 우리가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가를 다룬, 그 연장선상에서 써진 것으로 어려움이 많은 이 시대, 우리를 향한 위로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아버지의 죽음과 세월호의 안타까운 일을 겪으며 일종의 자기 치유의 방식으로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이 문학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상처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고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작품 속 드러난 트라우마의 양상을 예리하게 분석, 성찰했다.

그 결과, 상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 속에 상처를 치유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상처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 앞에 겸손해지는 태도가 필요하다 말한다. 상처는 그것을 겪은 사람의 것이지, 우리가 그를 동정하거나 그와 공감한다고 해서 그 상처가 우리의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의 결론은 간단하다.

“학문도, 예술도, 문학도 상처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상처는 주인이다.”

■ 본문에서

사랑도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폭력일 수 있듯이, 치유도 때로는 치유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폭력일 수 있다. 밑동만 남은 나무의 몸처럼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가 불가능한, 아니 치유 자체를 거부하는 트라우마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게 되면 더더욱 그렇다. 나무가, 그리고 나무처럼 극심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울면서도 자기가 우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에게, 아파도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에게,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모든 트라우마에 치유가 가능하다는 절대성은 여기에서 무너진다. 이것이 남의 고통, 남의 상처, 남의 트라우마 앞에서 우리가 한없이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여기가 윤리의 자리다. 자기를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는 자리에서 윤리는 태어난다. 이것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나무의 상처와 침묵을 통해 증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의 상처와 침묵에 주목하는 순간,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아름다운 동화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존재, 다른 사람의 트라우마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서글픈 우화가 된다.

도리 라웁Dori Laub에 따르면, 트라우마를 입힌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영원히 자기를 휘두르도록 방치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일상생활을 침략하고 오염시키게 놔두는 것”이다. 결국 상처는 언어를 통해, 즉 상징화를 통해 풀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건이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된다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의식의 “보호막”이 작동하지 못해, 그 사건이나 경험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그것에 휘둘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트라우마는 의미의 상처인 셈이다. 그렇다면 트라우마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은 자기를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대면을 통해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트라우마의 치유는 의미의 상처를 어루만져 의미를 회생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비록 터무니없이 늦긴 했지만 제제가 오십이 다 된 시점에서 그의 상처를 돌아보고 얘기를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의 상처가 더디긴 하지만 드디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암시일 수 있다.

진정한 예술은 “순결”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순결을 고집하는 독선을 벗어나는 데서 태어난다. 제제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재현한 소설을 우리나라의 제제들한테 읽히는 것은 비난하지 않으면서 제제를 창조적으로 활용한 대중가수에게 뭇매를 퍼붓는 것은 예술에 대한 근시안을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다. 분노도 때로 필요하지만, 더 적절한 것, 더 적절한 사안에 표출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트라우마를 “윤리적인 지식”으로 삼아 아시모프가 “로봇공학의 세 법칙”에서 제시한 것 같은 인간 중심적인 방향성만 확보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과 관련된 미래는 그렇게 어두운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결국 문제는 인간이고, 인간이 구현하는 윤리성이다. 이것이 우리가 인공지능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미래를 위한 방향성을 탐색하는 “지식의 한 형식”으로 인식하고 활용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치유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이자 활용의 대상이다. 모든 트라우마가 치유와 극복의 대상이라는 절대성은 여기에서 무너진다.

그 트라우마와 고통 앞에서 아도르노의 말처럼, 어떻게 문학이 가능하겠는가. 체르노빌 사고로 방사능에 노출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죽어가고 불구가 되고 그것이 대물림되고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는데, 문학이 뭘 할 수 있겠는가. 전쟁 중에 10만도 아니고 100만도 아니고 2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는데, 문학이 도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을 위해서 문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기존의 장르로는 안 되니 다른 장르를 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목소리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증언의 형태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충격적인 트라우마적 사건들이 일어나는 근대에는 더 적합한 형태의 양식이 아닐까. 알렉시예비치의 ‘목소리 소설’은 이러한 질문들을 기반으로 한다.

꾸며내고 극적으로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트라우마적 사건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것이 문학이니까, 그래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면 사람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한없이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알렉시예비치의 ‘목소리 소설’이 증언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에 귀를 기울인다. 고통은 지난한 삶의 증거이다. 다른 증거 따윈 없다. 다른 증거 같은 건,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우리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했던가.” 이것은 말이 아니라 고통이 먼저고, 문학이 아니라 “비밀에 대한 최상의 정보인 고통”이 먼저라는 선언이다. 말을 앞세우면, 어떤 것을 꾸며내는 문학을 앞세우면, 진실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선언이다.

총체성은 그리 쉽게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드러내는 것을 종합하고 통합해야 겨우 근접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모든 사람의 상처를 대변하지 못했다고 모건을 탓하기보다 그녀의 글이 드러내는 개인적인 상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진실은 집단의 진실이기 전에 개인적인 진실이다.

왜 인간은 고백을 하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왜 과거에 집착하는 것일까. 부끄러운 기억이라면 더더욱 잊는 것이 자기에게 이로운 일인데, 왜 집착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 것이 상처가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그 흉터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결국 트라우마의 문제다. 이렇게 말하면, 트라우마를 피해자의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겠지만, 트라우마는 가해자에게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이후로 그것에 사로잡혀 자학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모종의 트라우마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가해자도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 있는 것이다. 피해자의 트라우마에는 양심에 거리낄 게 없는 도덕적 정당성이라는 버팀목이라도 있지만, 가해자의 트라우마는 기대거나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더욱 힘든 것일지 모른다. 트라우마가 피해자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은 가해자를 비난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가해자도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데서 발생한다.

『속죄』는 가해자의 트라우마가 윤리적인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말해주는 고통스러운 소설이다. 매큐언의 소설은 가해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가해자에게 트라우마가 존재할 가능성을 봉쇄하고 차단하려 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것인지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프로이트가 트라우마를 얘기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지 않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의 심리 이론 어디를 보아도 트라우마가 피해자의 전유물이라는 말은 없다.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왜 입은 것이든, 트라우마는 트라우마이고, 따라서 우리가 보듬고 다독이고 이해해줘야 하는 대상일 따름이다.

트라우마가 무질서의 세계라면, 소설은 질서의 세계이다. 트라우마가 오직 과거의 어느 시점, 어느 경험을 향해 줄달음질을 치면서 시간을 파괴한다면, 소설은 과거와 현재에 질서를 부여한다.

바오 닌은 슬픔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며 “행복보다 고귀”하고 “고상”하다고 말한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슬픔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는 과거를 향한 끼엔의 뒷걸음질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희망 없는 정신세계가 만들어낸 비상식적이고 폐쇄적이고 비관적인 상황”에서 “과거를 향해 돌아가는” 것이라 해도, 작가는 그 뒷걸음질과 그것에 결부된 슬픔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는다. 『전쟁의 슬픔』은 그래서 슬픔을 예찬하는 소설인 셈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난민들에게 환대의 정신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독일은 더 이상 “나의 나라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위대한 여성을 총리로 둔 독일은 이제, 그들의 아일란을 위해 울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즉 울었어야 했다. 온 나라가 울었어야 했다. 역사의 과도한 짐에 밀려, 고통과 슬픔을 억압하는 것은 순리가 아니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된 것은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라스의 『게걸음으로』는 억압된 것이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트라우마의 교과서 같은 소설이다.

그것은 몸의 상처에서 마음의 상처로 외연을 확장하더니, 프로이트에 이르러서는 후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용되어 지금은 몸의 상처보다는 마음의 상처를 의미하는 쪽으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트라우마는 더 이상 몸의 상처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실제로도 몸의 상처를 트라우마로 지칭하는 경우가 드문 게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트라우마와 관련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는 몸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를 반드시 분리시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고, 역으로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몸과 마음의 상관관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트라우마가 그리스어에서 어원을 취했으니 그것의 적절한 예를 그리스 비극에서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인간의 역사는 그래서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의 역사, 야만의 역사였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여성들이 어떻게 “예속의 지붕 밑으로” 들어가 역사와 전쟁의 트라우마를 살아내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몸과 마음의 구분은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천막 안에서 남성들에게 배분되기를 기다리는 여성들의 몸과 마음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국가도 잃고 부모 형제도 잃고 자식도 잃은 여성들에게 몸과 마음은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몸이 마음이었다. 몸의 예속은 마음의 예속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몸의 상처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면서도 마음의 상처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자주 사용되는 ‘트라우마’라는 말이 원래의 의미로 돌아가 몸의 상처를 지칭하면서, 동시에 마음의 상처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근대 역사와 사상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 중 하나는 타인의 상처와 아픔을 얘기할 때, 즉 그들의 삶을 재현할 때, 대단히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의 편견을 벗어나 그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학자에 따라서는 타인의 상처와 아픔을 대변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는 야만적이다”라는 아도르노의 유명한 말은 타인에 관해 얘기하고 타인의 고통을 언어로 바꾸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은 유대인 대학살처럼 언어로 표현될 수 없고, 언어가 감당할 수 없는 경험을 문학의 소재로 삼는 것에 따르는 일종의 비윤리성을 경고한 말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아우슈비츠처럼 참혹한 사건들과 관련하여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니 논리적으로는, 침묵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침묵하게 되면 그것이 영원히 묻혀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침묵도 역설적인 의미에서 비윤리적인 것이 된다. 그렇다면 타인의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윤리적인 태도일 수 있다.

작가는 소화의 대상이 아닌 타자의 타자성을 삼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버림으로써 타자의 타자성을 지워버린 셈이다. 그의 소설이 윤리성과 비윤리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콘래드의 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세월호의 트라우마를 떠올린다. 아니, 이것은 맞는 말이 아니다. 세월호의 트라우마에 콘래드의 소설을 떠올렸다는 말이 더 맞겠다. 상처의 자리가 아직도 선연하고 고통이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배가되는 세월호 사고를 생각하면, 콘래드의 소설이 집요하게 탐구하는 트라우마와 그것의 윤리적 속성을 거론하는 것마저 사치로 느껴질 정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분들의 상처와 아픔을 생각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찾아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그를 묻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애도의 속성인 탓에, 이것을 데리다의 말로 옮기면, “고정된 곳 없이는, 확정할 수 있는 장소 없이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 애도의 속성인 탓에,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지금껏 찾지 못해 제대로 된 울음 한 번 울지 못하고 애도를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는 분들의 상처와 아픔을 생각한다. 팽목항에 나부끼는 슬픔의 노란 꽃들을 생각한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2014년, 한국을 찾았을 때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 타자의 상처와 고통은 중립이 아니라 편파의 대상이다. 공감의 편파, 환대의 편파, 같이 느끼고 같이 울어주는 편파, 이웃이 되어주는 편파. 그런데 같은 공간에 사는 동족이라고, 모두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은 아니다. 다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친 동족이 아니라 그를 외면하지 않고 따뜻하게 보살핀 이방인이 이웃이라고 예수는 정의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타인의 고통, 타자의 트라우마는 이웃에 대한 공감과 환대의 문제가 된다.


저자 프로필

왕은철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메릴랜드 주립대학 대학원 영문학 박사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
    전북대학교 영문학 학사
  • 경력 새한영어영문학회 호남-제주 지회장
    미국 워싱턴 대학교 객원교수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 타운 대학교 객원교수
    전북대학교 언어교육원 원장
  • 수상 2012년 제2회 전숙회 문학상
    2011년 제5회 유영번역 상

2014.12.02.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 저자: 왕은철
전북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클래리언대학교와 메릴랜드대학교에서 각각 영문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H. B. 이어하트재단, 케이프타운대학학술재단, 풀브라이트재단의 펠로 및 한국학술진흥재단의 해외파견 교수를 역임했으며, 케이프타운대학과 워싱턴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있었다. <유영번역상>과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하고 전북대학교의 <학술상> <수업상> <개교70주년기념 연구경쟁력기여자상>을 수상했다.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문학평론가이고, 현재 전북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마이클 K』 『피의 꽃잎』 『연을 쫓는 아이』 『전쟁쓰레기』 등 40여 권의 역서와 『J. M. 쿳시의 대화적 소설』(문화관광부우수도서), 『문학의 거장들』(한국연구재단 우수도서> 『애도예찬』(<전숙희문학상>) 『타자의 정치학과 문학』 등의 저서, 그리고 100여 편에 이르는 논문 및 평론이 있다.

목차

책머리에

타인의 상처, 타인의 고통
—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침묵과 트라우마

저 사람은 내 아빠가 아냐
—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폭력과 트라우마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울음이 가득한” 세계
— 「헨젤과 그레텔」의 은폐된 진실과 트라우마

누가 내 화분을 훔쳐 간 거죠?
— 트라우마의 진원지인 사랑

트라우마적 지식은 윤리적 지식이다
— 「바이센테니얼 맨」과 인공지능

나는 점점 더 커다란 귀가 된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목소리 소설’과 트라우마

일본인이란 무엇일까? 그렇지 않은 일본인으로 나를 바꿀 수 있을까?
— 트라우마와 “오키나와의 눈물”

우리는 소나 말 같은 소유물이었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도둑맞은 세대”와 그들의 상처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
— 알베르 카뮈의 소설과 트라우마의 정치학

속죄는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도가 전부였다
— 『속죄』와 유년의 트라우마

슬픔 덕에 우리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전쟁의 슬픔』과 베트남의 트라우마

우리는 한때 ‘어린 오이디푸스’였을까?
— 오이디푸스와 트라우마

왜 이제야?
— 『게걸음으로』와 독일인들의 아일란

제비뽑기로 주인이 배정된 여자 포로들의 울음소리
— 에우리피데스의 비극과 여성의 몸

아버지, 제 몸이 타는 것이 안 보이세요?
—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와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트라우마

아니, 내가 원하는 건 내 어머니예요
— 『마우스』와 트라우마의 슬픈 대물림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식민지 여성
— 『제스처 라이프』와 타자 재현의 문제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 바다에 떠 있는 콘래드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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