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트로이의 여인들』 『데카메론』 등의 고전부터 『헨젤과 그레텔』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등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소설, 알베르 카뮈, 귄터 그라스, 이창래, 쿳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 이르기까지 현대 작가들의 최근작까지 망라해 소개된 이 책을 관통하는 것은 곧 트라우마이다.
‘오이푸스의 이야기’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질투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기구한 운명의 회오리에 휘말린 어떤 이가 겪은 트라우마와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헨젤과 그레텔」은 계모에게 버림받은 남매의 이야기가 아니라 친모에게 버림받은 남매의 이야기였으나, 가족간의 행복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회의 걱정과 독자들의 구미에 영합, 개작된 작품으로서 원전의 뜻을 재해석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모든 것을 주는 희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우리가 ‘희생’이라는 선의의 이름을 부여하며 등한시하게 되는 희생하는 자의 고통, 그런 타인의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이다.
체벌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로 지금도 많이 회자되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한 아이의 성장소설이라기보다는 가정폭력과 그로 인해 일그러진 한 아이의 자화상으로 폭력을 가시화시킨 또 하나의 폭력을 드러낸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기이한 열풍을 일으킨 소설이다.
메르스 등 일련의 상황을 통해 집단 공포를 경험한 우리의 눈으로 보면 카뮈의 『페스트』는 보편적, 초월적 성찰로 읽으면 집단적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지침서 같은 소설이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 속에 보면 유럽 중심적인 사고 속에 탄생한 아쉬움이 남는 소설이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는 트라우마가 피해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닌, 가해자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증언하고 있으며,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은 전쟁의 트라우마를 완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극복을 향해 가는 길에는 대단한 극복 의지보다 그저 상황을 아파하는 슬픔,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전범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아픔을 내보이기보다는 세계에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에 매진했던 독일에게도 구스틀로프호 참사라는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을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으로』를 통해 살필 수 있으며, 실제 자식을 앞서 보낸 쿳시가 쓴, 자식 잃은 아버지의 트라우마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를 통해선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과 상처와 죄의식마저도 예술의 소재로 써야 하는 작가 자신의 고뇌를 살펴보게 한다.
타자의 상처를 다룰 때 어떻게 윤리성과 비윤리성이 동시에 개입되는지를 보여주는 이창래의 『제스처 라이프』와 목소리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증언의 형태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충격적인 트라우마적 사건들이 일어나는 근대에는 더 적합한 형태의 양식이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알렉시예비치이 ‘목소리 소설’은 트라우마를 증언하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게 한다.
침몰하는 배에서 보여준 인간의 이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조지프 콘래드의 『로드 짐』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찾지 못해 제대로 된 울음 한 번 울지 못하고 애도를 시작도 못한 우리의 아픈 세월호를 떠오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