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들의
시대를 초월한 다시 쓰기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템페스트』 -> 『마녀의 씨』 by 마거릿 애트우드
: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해 매번 놀라운 공연을 선보였던 전직 메이크시웨그 연극 축제의 예술 감독 필릭스 필립스. 믿고 의지했던 부하 직원 토니의 배신으로 극단에서 쫓겨난 그는 플레처 교도소의 임시 교사 자리를 얻어 재소자들에게 셰익스피어 희곡을 가르친다. 12년 후 문화유산부 장관이 된 토니와 그 일당이 교도소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필릭스는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연극 <템페스트>로 일생일대의 무대를 준비한다.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배신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죽어서도 그의 곁을 맴도는 어린 딸 미란다를 애도하기 위해.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작가들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의 네 번째 주자는 『눈먼 암살자The Blind Assassin』(2000)로 부커상을 수상한 마거릿 애트우드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매번 ‘셰익스피어’라고 대답합니다. 그의 작품은 무한히 다양한 형태로 해석할 수 있거든요.”(《가디언》 2016년 9월 24일 자 인터뷰에서)
이 프로젝트를 위해 그녀가 선택한 작품은 셰익스피어 말년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템페스트The Tempest』(1610년~1611년 집필 완성, 1611년 초연)이다. 애트우드는 이미 오래전부터 온갖 풍파와 희로애락, 삶의 덧없음과 아름다움이 한데 뒤섞여, 마치 은퇴를 앞둔 셰익스피어 본인의 심경을 담은 듯 보이는 이 작품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고, 작가와 글쓰기에 관해 쓴 자신의 저서 『죽은 자들과의 협상Negotiating with the dead』(2002)에서 『템페스트』의 주인공 ‘프로스페로’를 예로 들어 문학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녀가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걸작들 중에서도 특별히 『템페스트』를 개작해 『마녀의 씨HAG-SEED』로 재탄생시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템페스트』에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한 질문들이 많이 담겨 있어요. 등장인물들의 성격도 매우 복잡하고요. 그 질문들의 답을 찾고 복잡한 요소를 풀어내는 일에 도전하는 것은 이 작품이 가진 커다란 매력 중 하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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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한 남자가 복수를 꿈꾸다 결국 화해와 용서를 거쳐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이야기이다. 밀라노의 대공 프로스페로는 마법 연구에 골몰한 나머지 공국의 실무를 동생 안토니오에게 모두 맡겨 버리는데, 사악한 안토니오는 프로스페로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정적인 나폴리 왕 알론소와 작당하여 형을 몰아낸다. 프로스페로는 어린 딸 미란다와 함께 물이 새는 배에 태워져 망망대해를 표류하다가 외딴섬에 도착하고, 본래 그곳에 살고 있던 정령 아리엘과 ‘마녀의 씨’라 이름 붙인 흉측한 괴물 칼리반을 마법으로 지배하며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12년 후, 운명의 여신이 프로스페로의 적들을 그에게로 불러들인다. 프로스페로는 폭풍우를 일으켜 적들이 탄 배를 난파시킨 뒤, 이들을 섬으로 유인하는 한편 알론소왕의 아들 페르디난드를 미란다와 만나게 하여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도록 만든다. 프로스페로는 자신을 몰아낸 죄인들을 벌하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토록 혐오했던 ‘악함’과 ‘어둠’이 자기 안에도 있었음을 인정하고 용서를 택함으로써 ‘복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다음 세대인 미란다와 페르디난드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 준다.
애트우드는 이렇듯 마법과 환상으로 가득한 400년 전 거장의 작품에 자신만의 해석과 현대적 장치들을 덧붙여 “셰익스피어 시대의 우아함을 간직한 괴물 같은 소설”(《보스턴 글로브》) 『마녀의 씨』를 빚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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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트우드의 손에서 부활한 현대판 프로스페로, 필릭스 필립스는 메이크시웨그 연극 축제를 총지휘하는 예술 감독이다. 셰익스피어의 프로스페로가 마법 연구에 빠져 공국을 다스리는 일에 소홀했듯이, 필릭스 역시 후원자를 상대하거나 회의에 참석하는 등의 ‘사소한 일’은 부하 직원 토니에게 일임한 채 비평가와 관객들을 놀라게 할 ‘최고의 연극’을 구상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된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 미란다마저 어린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자 연극에 대한 그의 집착은 더욱 심해진다. 필릭스는 죽은 딸을 위한 연극을 기획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를 무대에 올리고 직접 프로스페로를 연기하기로 한다. 현실에서와 달리 무대 위 그의 미란다는 죽지 않고 어여쁜 아가씨로 자라나 페르디난드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므로.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이던 그때, 토니가 본색을 드러낸다. 필릭스가 연극에 빠져 방심한 사이, 필릭스와 적대 관계인 샐 오낼리를 끌어들여 그를 몰아낼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예술 감독 자리를 빼앗기고,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던 연극 <템페스트>마저 잃은 필릭스는 그와 같은 처지의 밀라노 대공Duke of Milan 프로스페로를 연상케 하는 ‘듀크Duke’라는 가명으로 위장한 채 플레처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에게 셰익스피어 희곡을 가르친다. 그가 쫓겨난 지 12년째 되던 해, 드디어 적들에게 복수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사이 승승장구하며 문화유산부 장관에 오른 토니가 샐과 함께 플레처 교도소의 희곡 수업을 시찰하러 오기로 한 것이다. 필릭스는 12년 전 그들로 인해 포기했던 <템페스트>를 멋지게 선보이기로 한다. 외딴섬에 갇혀 복수를 꿈꾸는 프로스페로 역을 직접 맡아, 토니(안토니오)와 샐(알론소)을 파멸로 이끌 덫을 설치하기로 마음먹는다.
애트우드는 이처럼 ‘프로스페로의 복수극’이라는 『템페스트』의 전개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단순히 시공간만 바꾸어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극계’를 개작의 주 무대로 삼아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작중 핵심 연극으로 배치했다. 『마녀의 씨』는 개작 안에 원작을 중요한 장치로서 배치한 이중 구조의 소설인 셈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필릭스는 프로스페로의 현신現身이자 셰익스피어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춘 예술 감독으로서 여러모로 원작과 개작을 잇는 연결 고리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필릭스의 복수극이 구체화되고 연극을 위한 무대가 꾸며지면서, 플레처 교도소는 서서히 셰익스피어가 창조해 낸 17세기의 무인도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필릭스로부터 희곡 수업을 듣고 배역을 맡은 죄수들은 <템페스트> 속 사악한 동생 안토니오로, 정령 아리엘로, ‘마녀의 씨’ 칼리반으로, 프로스페로의 지시를 따르는 도깨비 개들로 거듭난다. 마침내 적들이 그의 ‘외딴섬’ 교도소에 들어왔을 때, 필릭스는 예술 감독다운 기량을 발휘해 교묘한 특수 효과와 분장, 화려한 음악과 춤으로 프로스페로의 마법과 환상을 재현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들로 하여금 죄를 고백하게 만든다. 필릭스와 프로스페로의 복수극이 동시에 펼쳐지며 애트우드의 소설과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평행선을 그리는 것을 보면 애트우드가 원작과 개작 사이의 연결 고리를 얼마나 절묘하게 이어 놓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프로스페로가 그랬듯 적에게 용서를 베풀고 자신의 연극 <템페스트>에 마침표를 찍어 스스로를 ‘복수심’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죽은 딸을 떠나보내는 필릭스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구원에 이르는 길은 타자에 대한 이해와 용서이며, 그 첫걸음은 자기 안의 ‘어둠’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메시지를 다시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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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마녀의 씨』에서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작가의 고민도 엿볼 수 있다. 필릭스는 교도소의 재소자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며,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에서 ‘선과 악’에 관한 질문을 던져 죄수들이 자기 자신의 죄와 인생을 돌아보게끔 만든다.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던 거친 죄수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배우고 각자가 살아온 삶에 비추어 작중 인물을 연기하는 장면은 4세기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셰익스피어의 진가를 또 한 번 느끼게 해 준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극장은 계층과 상관없이 누구나 모여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장소였으며,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그 시대의 대중오락이었지 지식인만이 즐길 수 있는 고급문화가 아니었다. 애트우드는 필릭스의 문학 수업을 통해 셰익스피어 작품이 가진 본래의 의의를 현대적으로 되살리고, 셰익스피어가 시공을 초월해 사랑받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를 보여 준다. 또한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던 필릭스가 연극을 통해 부정적 감정을 내려놓고 진정한 구원을 얻는 데서 예술이 갖는 강력한 힘을 새삼 깨닫게 한다. 복수와 증오는 칼끝이 향하는 대상뿐 아니라 그 칼을 쥔 사람 또한 망가뜨리지만, 예술은 이를 이해와 용서로 승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마녀의 씨』는 한 편의 매혹적인 복수극을 넘어, 시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에 대한 찬사이자 예술의 힘에 바치는 가장 강력한 찬사가 될 것이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다시 쓴 『템페스트』 - 『마녀의 씨』는 복수와 용서, 삶의 덧없음에 관한 셰익스피어 말년의 걸작을 현대적으로 변주하여, 감각적인 춤과 음악, 개성 강한 인물들, 마법보다 화려한 트릭이 한데 엉켜 빚어내는 환상적인 무대를 21세기 독자들 앞에 펼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