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통과하며 형태 없이 흘러간 것들이
우리를 다시 그곳으로 데려다놓았다“
사랑과 이별, 갈등과 오해에 지친 당신을 위한 여덟 가지 모호함의 세계
▲ 이 책에 대하여
자기성찰과 사랑에 관한 은유를 흥미로운 소재를 통해 균형 있게 풀어내는 신예 이승주의 『리스너』가 출간되었다. 2017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간결한 문체와 단숨에 읽게 하는 속도감, 뚜렷한 주제 의식”을 가졌다는 평과 함께 역량을 인정받으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등단작 「설계자들」을 비롯한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은 다양한 예술계 직업군에 속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관계 속에서 오는 갈등, 사랑과 이별들에서 만나는 감정 등 자칫 흔할 수 있는 이야기는 건축물, 음악, 예술작품 등에 맞물려 새롭게 그려진다. 즉 작가만의 틀 속에서 익숙한 이야기를 낯설게 하는, “이야기와 공감을 축조하는 능력”(김숨)으로 이승주식 모호함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간결한 문체, 속도감 있는 문장력, 명확한 주제 의식……
균형 잡힌 이야기로 문단이 주목하는 이승주의 첫 소설집!
여덟 개의 단편의 서사는 사랑과 우정 혹은 사랑과 이별, 결혼과 이혼 사이에 놓인 모호한 관계 속에서 출발한다. 그중에는 동성간의 사랑(「층과 층 사이」)이나 친족간의 사랑(「슬로 슬로」), 삼각관계(「리스너」 「건축 공간에 미치는 빛과 중력의 영향」), 이혼 후 동거(「공주」)와 같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관계도 포함되어 있다. 외부와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멈추지 못하는, 혹은 멈추었으나 관계를 지속해가는 인물들이 그려내는 모호한 감정은 그들의 다양한 직업(출판 편집자, 전시 기획자, 광고 기획자, 그래픽 디자이너, 음반 디자이너, 녹음 엔지니어 등 문화·예술 직업군)과 맞물려 한층 더 선명해진다.
이 감정들은 “느슨하게 이어지면서 소설집 전체로는 ‘에디터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서사적 공간과 배경을 형성”(정홍수 문학평론가)한다. 여기서 ‘에디터’라는 단어는 이야기를 설계하고 재배치하는 편집자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자유롭고 개성적인 공간에서 화자의 개인적 성찰을 풀어놓는 자기언급적 측면의 뜻도 담고 있다. 건축 관련 직군의 주인공은 구조물에 빗대어 마음을 투영하고(「층과 층 사이」 「건축 공간에 미치는 빛과 중력의 영향」 「설계자들」), 음악 관련 직군의 화자는 엘피판이나 카세트테이프, 오디오 장치를 통해 자신의 상황을 성찰한다(「리스너」 「공주」). 작가는 어정쩡하고 모호해 보일 수 있는 관계와 그 안의 감정들을 “강렬하다기보다 믿음직스럽”(백지은 문학평론가)고 유연하게 설계한다.
이렇게 이승주는 작품 속에서 이별을 강요하지도, 갈등이 낳은 감정을 쓸모없는 것으로 단정짓지도, 타인과 자신의 마음을 속단하지 않으며 그저 현재 감정을 모호함의 세계로 밀어 넣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건넨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기억 대부분이 인간관계 속에서 비롯된 것임을 각인시키는 서서라는 점은, 상처받은 모든 이에게 이 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위안이 될 수도 또는 필요한 이유도 될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직업을 가진 화자가 세워놓은 세계 속에서 보편적인 사랑과 사유를 담고 있는 이승주식 이야기가 단연코 유독 소설 바깥에서 빛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다.
이승주의 소설에서 ‘건축’은 인간사를 비추는 은유의 자리에 상징적으로 머물러 있기보다는, 그때그때의 구체적인 맥락을 타고 공간과 장소, 구조의 이야기로 묽게 풀어지면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환유가 된다. 그런 만큼 ‘건축’이 맥락화하는 의미는 인물들의 개별 정황 안에서 제한적이고 잠정적으로 조언과 참조의 자리를 생성하는데, 이는 이승주의 소설을 다시 한 번 좋은 의미의 모호함의 세계로 열어놓는 몫을 하는 것 같다.
―정홍수(문학평론가)
▲ 줄거리
층과 층 사이
건축잡지 기자인 유정은 ECC 건물에서 건축가 김지훈과 인터뷰를 하고 나오는 길에 유리문에 부딪혀 죽은 새를 보고 자신과 동일시한다. 유정은 ECC와 주희의 집을 오가면서, 주희와 함께 살고 싶은 자신의 욕망과 마주한다.
리스너
음향 엔지니어 동우의 연인인 음악가 제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나눠온 두 사람과 재이의 음반 디자인을 도와주는 정실장. 동우는 정실장에게 흔들리게 되고, 재이는 흔들리는 동우의 마음을 눈치 챈다. 동우는 재이와 함께 들어간 사진스튜디오에서 차이콥스키의 ‘6월 뱃노래’를 듣게 된다.
건축 공간에 미치는 빛과 중력의 영향
소라는 연인 우진, 그리고 우진의 옛 연인 해주와 일본 건축 심포지엄 답사 중이다. 건축 대학원생인 셋은 묘하게 서로를 신경 쓰면서 빛을 이용한 건축물을 관람한다. 이 과정에서 소라는 우진과 해주가 신경 쓰이고, 우진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감정과 마주하는 과정을 건축물에 빗대어 섬세하게 펼쳐낸다.
에바, 에바 캐시디
대학동기인 소영과 건우는 우연히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만나 다시 가까워진다. 건우는 기러기아빠가 되었고 에바라는 재미교포와 재혼을 꿈꾸고 있다. 소영이 건우에게 곁을 내어줄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와 동명이인이자 스카이다이빙 결혼식을 꿈꾼다는 에바가 궁금해진다.
슬로 슬로
아빠가 열세 살 오빠와 열 살 하나를 태우고 간 곳은 간이역 컨테이너. 아빠는 자주 집에 오지 않았고, 오빠와 라면을 끓여 먹으며 간이역에서 놀이를 하며 아빠를 매일 기다렸다. 세진의 남편조차 의심할 정도로 각별한 남매였던 둘……. 출장차 파리로 간 그녀는 세계 각국을 돌며 방랑자 생활을 하고 있는 오빠를 생각하며 샤모니의 설산을 오른다.
공주
결혼 전날 파혼했지만 6년째 동거 중인 윤경과 규. 규의 아버지 고희연 시간 전까지 기차를 타고 짧은 여행을 하기로 작심한다. 두 사람은 천안과 공주를 함께 다니면서 헤어짐을 결심했던 순간과 추억들을 상기한다. 그리고 규의 취미인 카세트테이프 수집을 위해 레코드 가게 앞에서 서서 날이 어둑해지도록 가게 주인을 기다린다.
리플릿
영주와 은수는 고등학교 시절 ‘필로소피아’라는 잡지를 만든 친구 사이다. 음악, 영화, 시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직접 쓰고 편집한 것.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둘은 '필로소피아' 제목의 전시를 함께 관람하고, 당시 함께 편집했던 다른 친구들을 떠올린다.
설계자들
옛 서울역사의 진짜 설계자는 누구일까. 현 교수와 민정은 '옛 서울역사 활용 국제 설계 공모전'을 준비하며 서울역사의 근원의 흔적을 따라간다. 그러다 남영동 대공분실과 아우슈비츠 건축물에 빗대어 건축가의 윤리 정신에 대해 의문이 생기고 민정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