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은 어떻게 평균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었는가?
‘평균’이 정상이라는 오해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동성애, 자위, 분노 표출은 원래부터 비정상이었던 걸까?
아이들의 정상적인 행동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표준화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
★ 영국 워터스톤 선정 2022 최고의 대중 과학 서적 ★
‘가족’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아마도 일하는 아빠, 자애로운 엄마, 귀여운 자녀로 구성된 3~4인 가족이 아닐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가족을 전형적인 혹은 평균의 가족으로 상정한다. 수많은 가족 대상의 홍보물들이 그런 것처럼.
물론 세상은 달라졌다. 물가 상승과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소위 자녀는 안 갖는 딩크족도 있으며, 한부모 가정은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묘하게도 이런 이질적인 구성의 가족에 못마땅한 눈길을 보낸다. 강남의 8학군에서 일하는 엄마는 배척의 대상이고, 아이를 낳지 않는데 결혼은 해서 무엇하느냐 타박하며, 이혼이든 사별이든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결핍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꺼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알게 모르게 차별적 태도, 최소한 일반적이지 않다는 위화감에 거리낌 있는 태도를 낳는 데 일조한다.
즉 우리는 알게 모르게 평균 혹은 표준화된 것을 ‘정상’ 그 외의 것들은 ‘비정상’이라 여기고 질타하고 거리를 둔다. 정상 체중이 아닌 사람은 건강에 이상이 있거나 게으른 자고, 여전히 동성을 사랑하는 이는 비정상이다. 건강 문제로 환청이나 환시 혹은 일시적 기억 상실이 생길 법한데도 이런 경우는 무조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며, 아이들은 너무 애처럼 굴어도 너무 어른처럼 굴어도 문제 있는 취급을 받는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 중 하나가 “이러는 제가 이상한가요?”이다. 한마디로 이런 내가 정상이냐 아니냐를 타인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왜 그럴까? 다름 아닌 ‘남과 다른 것’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시선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정상적인 것을 추구한다. 정상적인 신체 사이즈, 정상적인 사고방식, 정상적인 성적 취향, 정상적인 감정 표출 등. 다시 말해 우리는 이러한 ‘정상’이라 칭해지는 것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과 사회를 규범화한다. 이 규범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를 검열하며, 타인을 평가하고 사회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이러한 정상성의 이면을 탐구해 낸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 바로 영국의 의학사 박사이자 정신 건강 연구가인 사라 채니의 《나는 정상인가: 평균에 대한 집착이 낳은 오류와 차별들》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놀랍게도 ‘정상’이란 말이 생긴 지는 200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어떻게 정상성이 우리의 삶과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밝힌다. 저자에 따르면, 그 중심에는 유럽과 북미 중심의 백인 중산층 사회가 있다.
약의 부작용이 여성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까닭
최근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이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많이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다. 이는 남녀 모두 동일하게 ‘정량’의 백신을 투여받은 결과였다. 다시 말해, 남성과 여성의 다른 면역 반응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남녀 모두가 동일한 양의 백신을 맞은 결과였다. 그리고 그 정량의 기준은 바로 남성이었다.
이러한 일은 이전부터도 빈번했다. 미국의 경우, 수면 보조제 엠비엔이 널리 시판된 이후에야 여성이 남성보다 대사 속도가 느리단 이유가 밝혀지는 바람에 여성의 복용량이 절반으로 줄었다가 끝내는 시장에서 퇴출되었다. 그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여성들은 엠비엔의 안 좋은 특성, 졸음 운전 및 몽롱한 상태를 더 오래 겪어야만 했다. 즉 잠재적으로 더 위험한 상황에 놓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로 저자는 ‘잘못된 모집단 설정’으로 꼽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의 과학 규범이 남성 중심의, 그것도 세계 인구 중에 극소수인 ‘위어드(WEIRD)한’ 사람들로부터 도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계 인구의 12퍼센트에 불과한 중산층의 백인 남성은 빅토리아 시대(1937~1901년) 이후로 심리학 연구 대상의 96퍼센트, 의학 연구 대상의 80퍼센트를 차지해 왔다. 과학과 의학에 관한 한 중산층 백인 남성은 중립적인 범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호르몬 수치 변동이 적은 편이어서 비용도 덜 들고 편한 실험 대상이라는 면도 작용하긴 했다. 문제는 이러한 백인 남성 중심의 연구 결과가 모든 인종, 모든 성별에 다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차별이다. 그런데도 왜 여전히 이러한 관행이 이어져 오는 걸까?
통계의 정규분포는 어떻게 사회적 맥락의 ‘정상’이 되었는가
사라 채니는 이에 대한 답을 ‘정상성’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과 통계적 연구에서 찾는다. 저자에 따르면, 정상은 통계학의 ‘정규분포’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천문학자 케틀레는 정규분포로 인체 측정치를 나타내려고 시도했고, 이를 통해 ‘평균인’이란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현재 우리에겐 ‘평균’이란 평범 혹을 보통이라는 의미와도 같다. 하지만 케틀레에겐 달랐다. 케틀레는 평균인이 진정한 인간을 대표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곧 완벽을 의미했다. 그래서 평균에서 이탈하는 경우를 문제시 삼았다. 평균인은 최초의 ‘정상적’ 인간이 되었고, 이 정상의 개념은 어느새 우리의 신체는 물론이고, 정신 건강, 성생활, 감정 문제, 아이의 양육 방법과 문제 행동, 그리고 우리 사회를 ‘표준화’하기 시작했다.
표준화와 잘못된 모집단 설정이 가져온 결과
문제는 케틀레 이후 과학자들이 평균을 산출하는 과정에서 이례적으로 보이는 수치들을 삭제했다는 것이다. 즉 종형 곡선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데이터에 조작이 가해진 것이다. 여성과 아이의 경우는 신체적 특성과 성장 과정에 따른 변수가 많아 가중치가 부여됐고, 이렇게 변형된 데이터가 남성 데이터와 비교되었다. 이로 인해 남성이 생물학적 표준이 되었다. 동시에 백인 남성이 다른 인종과 비교하는 표준이 되었다. 당시의 연구자들 및 중상류층의 대부분이 백인 남성이었기에 이들이 곧 평균인의 기준이 된 것이다. 따라서 중산층 백인 남성에 미치지 못하는 생활양식과 정신적·신체적 건강 상태는 배척받기 시작했다.
백인 중산층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와 국가는 ‘정상’이었고, 이러한 정상 상태가 그렇지 못한 비정상적인 국가와 사회에 적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곧 식민주의, 인종차별, 성차별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부당한 차별에 저항해 도망가는 노예는 ‘도망병’에 걸린 취급을 받았고, 미혼 여성의 신경쇠약은 ‘결혼’이 치료 처방전이었다.
일하는 아빠, 집에 있는 엄마, 자녀로 구성된 백인 중산층 가정은 곧 사회의 표준이 되었고, 이를 벗어나는 형태는 용납되지 않았다. 사회의 기준을 해치는 행위들, 즉 자위, 동성애, 분노와 슬픔 같은 감정 표출 등도 ‘비정상적인 행위’가 되었고 아이들의 부실한 영양 상태와 위생 상태의 책임은 곧 ‘일하는 엄마’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심지어 ‘장애’마저도 숨겨야 할 비정상적인 상태가 되어 장애인들이 거리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마련될 정도였다. 이러한 규범과 기준이 과연 정당한가? 이 책은 정상성이란 개념 뒤에 숨은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밝히며,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우리의 기존 관념을 무너뜨린다.
표준화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나의 체중은 정상인가, 나의 키는 정상인가, 나의 혈압은 정상인가? 동성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은 비정상인가, 섹스를 너무 많이 하는 것은 혹은 너무 적게 하는 것은 비정상인가? 내가 지금 저 사람한테 갖는 이 감정은 정상인가? 우리 아이의 정신없는 행동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이는 달리 말해, 내가 다른 사람과 비슷한지 아닌지, 내가 사회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래서 순탄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과도 같다.
실제로 이러한 질문과 답은 우리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이러한 규범과 기준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정상성’이란 미명하에 벌어진 식민주의나 인종차별, 성차별이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은밀한 사생활 영역까지도 비정상이고 ‘정신적 병리 상태’라고 못 박아 정신병원에 가두고 정치적으로 이용까지 한 상황을 과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도 미국에서는 곱슬머리를 펴지 않았단 이유로 등굣길의 흑인 소녀들이 집으로 돌려 보내지고 있다.
살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허용이 되는 범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혈압과 건강 상태가 연관이 있는 것처럼. 그렇다고 한없이 굶는 것이 또 건강한 상태는 아닌 것처럼. 그러니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걱정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상이라는 관념이 우리에게 어떤 규범과 기준을 안겼는지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획일화되고 고착화된 기준에서 벗어나, 각자의 개성대로 열린 마음으로 함께 사는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