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그들의 투박하고 절실한 드리블을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권혁일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바닥을 때리고』가 나무옆의자에서 출간되었다. 작가는 첫 장편소설부터 크라우드 펀딩 721%를 달성해 화제를 모았고, 이어 공개된 최근작 『첫사랑의 침공』에서 기발하면서도 세심한 묘사로 많은 독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번 신작에서 선택한 ‘농구’라는 소재는 또 어떤 강렬한 인상을 남길지 기대를 모은다.
『바닥을 때리고』에는 두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방황하는 청년 ‘예리’와 홀로 어린 아들을 양육하는 싱글 맘 ‘진희’. 같은 마트에서 근무하는 두 여성은 우연히 구민 체육 센터에서 진행하는 농구 수업에서 만나게 된다. 『바닥을 때리고』는 각자의 이유로 농구를 찾아온 이들이 서로 가까워지며 삶을 대하는 자신만의 태도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작가는 두 인물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보통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청년 실업부터 이제는 익숙해진 이혼 가정까지,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만한 소재가 이야기에 주를 이룬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상황을 탓할 수 없다. 그들이 서툰 것도, 답답하고 미련한 것도 짐짓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각자의 호흡으로, 쿵쾅거리는 두 사람의 드리블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뭐랄까…… 농구가 저한테는 도피처인 것 같아요.” - 예리의 이야기
현실을 마주하는 용기와 꿈을 좇는 무모함 사이에서
예리는 장기 취준생이다. 남몰래 강박 장애를 앓고 있고, 부모님께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속이고 마트에서 일하고 있으며,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 사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해본 적이 없기도 하다. 그저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사회인의 무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책임감만 떠안은 채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예리에게 농구는 잊고 있던 오랜 꿈이다. 선입견과 관습 속에 가족에게도 존중받지 못하고 포기한 꿈이지만, 아직도 농구공을 잡으면 그때의 마음이 역력하다. 코트 위를 달리며 공을 튀길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모든 걱정과 부담이 사라지는 걸 느낀다. 그러나 이걸 업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잠시라도 현실의 막막함을 잊게 하는 도피처일 뿐이다.
예리는 어둠 속에 서 있는 골대를 바라보았다. 밤바람에 그물이 슬쩍슬쩍 흔들렸다. 공을 바닥에 몇 번 튀기고, 팔을 뻗어 슛을 던졌다. (133쪽)
코트 위의 농구선수는 오직 골대만 보고 질주한다. 자신이 가는 곳에 과연 골대가 있는지, 골대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 의심하지 않는다. 예리는 그 질주의 동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답을 찾아 헤맨다. 자신만의 골대를 찾고자 오늘도 공을 튀기고 또 튀길 뿐이다.
“농구공이 바닥을 때릴 때마다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지길 바랐다.” - 진희의 이야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
진희는 아들 ‘태율’을 혼자 기르는 싱글 맘이다. 태율이 어릴 때, 불륜을 저지른 전 남편 ‘재성’과 이혼하게 되었다. 자신과 아빠에게 끔찍한 상처를 준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불륜만은 자신의 이혼 사유가 되지 않기를 바랐던 진희였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면접교섭권 때문에 그러기 싫어도 재성에게 태율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혼할 당시에는 혼자서도 충분히 태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진희 혼자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에는 힘에 부치고, 거기에 재성의 끊임없는 재결합 요구를 내치는 것까지 견뎌내야 한다. 진희의 고충은 재성이 재결합을 빌미로 아빠에게 이혼 사유를 얘기하게 되면서 절정을 찍게 되는데, 혹여라도 자책할까 봐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아빠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진희는 손에 든 농구공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분명히 똑바로 내리쳤는데 공은 저 앞으로 튕겨 나갔다. (16쪽)
때로는 내가 바닥에 튀긴 공이 나의 예상과 다른 곳으로 튕겨 나가기도 한다. 모든 게 내 손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아무것도 손에 쥔 것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서둘러 다음 움직임을 생각해야 한다. 진희는 이제 막 알게 된 것이다. 공이 내 손을 떠나가는 순간부터 경기는 시작된 것임을.
매일같이 치열하게 달리는
현실의 코트 속 우리의 이야기
진희에게도 예리에게도, 그리고 소설 밖의 우리에게도 현실의 바람은 거세기만 하다.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있다. 그런 때에도 상황은, 나를 둘러싼 세상은 계속해서 움직이라고 종용한다. 잠시도 멈춰 있을 수 없고, 쉴 새 없이 기쁨과 슬픔이 오가는 농구 경기처럼 우리의 인생은 늘 치열하다.
다행인 점은 경기는 언젠가 끝난다는 것이고, 아직 우리에게는 공을 튀길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골대가 다를지라도 분명 공을 던질 차례가 올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달라도 언젠가 그 끝에는 계속해서 움직였던 지난날에 대한 보상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바닥을 때리고』를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 그 지점이라는 것을 독자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