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근대의 이면 들여다보기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드라마 <서울 1945>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기의 혼란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를 그려내며 큰 주목을 받았다. 네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념 갈등의 첨예한 양상을 보여주던 이 드라마를 보는 또 다른 재미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들을 통해 근대인들의 마음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함흥의 미천한 집안 출신인 개희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조선 최고 호텔의 지배인이 되는 과정은 근대의 변화된 사회분위기와 의식을 반영한다. 이렇듯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내는 강인한 인물형은 채만식이 소설 『탁류』에서 계봉이를 통해 그려낸 바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근대의 인물들이 변화된 시대 속에서 모두 건전한 자아실현의 욕망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력으로 이뤄지지 못한 우리 근대가 태생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상태에서 이뤄진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과 조선 사이에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수탈의 구조를 만들어, 자본주의 발달의 이익이 모두 온전히 일본을 살찌우는 기형적 구조였다. 휘황한 도시의 야경과 온갖 물신으로 뒤덮인 백화점 쇼윈도는 근대인들에게 소유의 욕망을 부추겼으며, 그들의 일상을 천민자본주의로 물들여 갔다. 일제강점기 작가들은 정치적 발언이 금지된 상황에서 이렇듯 조선인의 일상에 스민 자본주의의 병폐를 문학작품 속에서 때론 직설적으로 때론 우회적으로 고발했다. 『모던의 욕망, 일상의 비애』는 이렇듯 다양한 현대문학 작품들을 통해 근대인의 고뇌를 오늘의 시각에서 다시금 새겨보고 있다.
문학의 볼록렌즈, 일상에 주목하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섹시하게. 현대인을 옥죄는 속도와 소유와 과시의 강박. 그 근원에 거대한 기술문명의 힘과 자본주의적 욕망이 뒤엉켜 역동하던 근대가 있다. 근대라는 단어와 동시에 우리는 일제, 식민지, 항일운동 등의 단어를 떠올리지만 격동하는 시대의 정치적 영웅들보다는 오히려 낯선 신세계에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 즉 오늘날 우리와 다름없는 평범한 소시민들이 당대의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신분사회가 종말을 고하고 누구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었던 기회의 시대, 하지만 소유가 존재를 말해주는 게임의 법칙이 지배하던 시대. 『모던의 욕망, 일상의 비애』에서는 그 시대 사람들이 동경하고 욕망했던 것, 좌절하면서도 끝끝내 희망했던 것의 자취를 현대문학 속에서 찾아보고 있다.
저자는 문학이란 사람들의 욕망과 갈등과 좌절을 담은 작품을 통해 오늘 우리 모습의 원형을 발견해내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굵직한 대작들에 치중한 사건 간추리기나 인물 분석 중심의 문학 연구보다는, 문학 속 소품이나 공간을 통해 당대 사람들의 정서를 발견하고 공감하는 데 문학 읽기의 즐거움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에서 문학작품을 바라보는 거대담론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작품이 품고 있는 일상을 볼록렌즈를 통해 세심히 관찰하려 하였다. 이광수, 염상섭, 박태원, 이상 등의 대표적인 현대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려한 근대적 외양 밑에 눌린 근대인의 일상과 비애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천민자본주의의 뿌리를 찾아서
1부 “화려한, 그러나 암울한 근대의 탄생”에서는 현대문학 속에 새로이 등장하면서 신문명을 상징하는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당대의 세태를 훑어본다. 기차나 자동차처럼 동경의 대상이던 기계문물이 신분의 척도로 기능하는 현실, 화려한 상품들과 백화점이 부추기는 소유욕, 온천, 카페, 병원 등 서구의 신문물이 가져다준 쾌적함 이면의 병폐, 서구화와 문명화에 대한 맹목적인 낙관의 함정 등을 생각해보도록 이끈다.
2부 “더 빨리, 더 많이, 더 에로틱하게”에서는 식민지 근대의 실상을 더욱 심층적으로 파고들어 욕망과 좌절, 탐욕과 실패로 일그러진 근대인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근대 조선의 지형도 속에서 삶의 비애를 관조하는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본 경성 거리는 씁쓸하고 스산하다. 우리가 막연히 당대 지상과제였으리라 생각해온 정치적 해방에 대한 갈증보다 허망한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했던 근대인들. 한 치 앞을 모를 만큼 질주하는 사회 속에서, 수많은 유혹과 자극에 노출되었던 근대인의 일상은 현대인과 너무도 닮아 있다. 그렇기에 권태와 허영과 갈증으로 휘청거리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기에 걷고 또 걸었던 그네들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를 둘러싼 허상과 맹목적으로 좇아온 환상을 걷고 일상과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는 저자의 제안이 남다르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