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이 드문드문한 고기를 얹은 시커먼 맨모밀국수, 흰밥과 가재미, 진장에 꼿꼿이 지진 달재 생선……. 지금까지 알려진 백석 시 100여 편 가운데 음식이 나오는 시는 60여 편에 이르며, 등장하는 음식의 가짓수는 110여 가지에 달한다. 배척한, 비릿한, 구릿한, 달큼한, 시금털털한 등 맛을 표현하는 미각 형용사도 23회나 나온다. 백석으로 인해 비로소 음식은 우리 시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맛을 즐기는 단순한 경험에 사유의 깊이를 더할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구수한 즐거움에 싸여, ‘흥성흥성’ 들뜨게 하는 백석의 음식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이 백석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아직까지 그의 시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백석 시 읽기의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길 바란다.
‘맛’의 시인 백석을 만나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미식예찬』의 저자 브리야사바랭은 음식이 단지 식욕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통찰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은 백석이라는 시인을 설명하는 가장 효과적인 말이기도 하다. 백석만큼 음식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보여준 시인은 없다. 늘 떠나온 고향과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던 그는 사소하다면 사소한 음식을 예술적 가치로 빛낸 최초의 시인이다. 비록 ‘월북시인’으로 낙인 찍혀 오랫동안 우리 시사에 빈장으로 남아 있었지만 ‘미각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그의 시가 펼쳐내는 참신한 세계는 김소월이나 서정주 못지않은 시적 경지를 이루었다. 『백석의 맛』은 문학적, 민속학적, 철학적 보고(寶庫)라 할 수 있는 백석 음식 시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책이다. 백석 시 연구는 월북시인들의 작품이 해금된 1987년 이후 많은 진전을 이루었지만, ‘음식’이라는 단일 주제를 다층적 관점에서 다룬 저작으로는 이 책이 최초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백석의 음식 인식의 심층적 의미를 밝혀내고, 영양학적 관점과 욕망의 기호 속에 갇힌 근대의 음식 인식과 그로 인한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단순한 시 해석의 차원을 넘어 음식 문화의 다양한 측면과 미각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루고자 한 이 책의 시도가 ‘죽음의 밥상’으로 표상되는 현대의 음식 문화가 잃어버린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란다.
7편의 시로 만나는 백석 시의 세계
『백석의 맛』은 전체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을 제외한 나머지 7장에서는 백석이 언급한 음식들 중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음식이 등장하는 작품을 중심으로 백석의 생각을 옮겨보았다. 메밀국수, 청배, 가자미, 수박씨?호박씨, 무이징게국, 달재 생선, 떡국이 그 음식들로 독자들은 이 평범한 음식들 속에 백석이 담아내고자 했던 세계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수단이나 교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존재의 차원에서 음식을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지배적 문화에 대한 저항을 드러낸 「국수」, 근대의 경계에 놓인 음식들의 운명을 보여준 「정주성」, 모든 동식물을 친구나 친척관계로 인식하는 샤머니즘적 사유를 담은 「선우사」, 개인의 주관적 체험인 미각경험을 공동체의 경험 혹은 신성성의 체험으로 제시한「수박씨, 호박씨」, 음식이 ‘기억의 거대한 구조’를 되살려낼 수 있음을 보여준 「여우난골족」,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음식의 역할을 탐구한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전통의 존재방식에 대한 고민이 묻어나는「두보나 이백같이」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백석의 주요한 시들이다. 이들 시 외에도 백석의 숨겨진 보석 같은 작품들이 갈피마다 소개되고 있어 글 읽기의 즐거움을 더한다. 각 장 말미에 붙인 백석여담과 음식소사는 본문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았다. 백석여담에서는 시만큼이나 유별난 백석의 삶에 얽힌 이야기들을 주제별로 소개했으며 음식소사에서는 1920~30년대 음식에 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선별해 백석이 살았던 시대와 그가 왜 음식에 천착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지렁이를 닮은 자화상
대부분의 화가가 한 번쯤 자화상을 남기는 것처럼 시인들도 자화상을 남긴다. 백석의 시 중에서도 그의 자화상이라 할 만한 시가 있다. 1935년에 『조광』에 발표한 「나와 지렝이」가 바로 그 시다. 감각기관이라고는 입과 피부뿐이어서 맛이나 냄새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지렁이는 찰스 다윈의 지적처럼 “특정한 종류의 먹이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고 “먹는 기쁨”을 즐기는 존재다. 마치 미각만이 존재하는 감각의 모든 것인 양 과거와 현재, 인간과 세계를 미각 중심으로 인식했던 백석에게 이보다 더 좋은 분신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시 속에서 백석은 지렁이의 ‘눈’이 보고 싶다고 말한다. 왜 그에게 ‘눈’이 필요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가 원한 눈은 가시적인 세계를 보기 위한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 즉 심안(心眼)이었을 것이다. 우리 전통에서 음식 섭취는 단순히 음식의 영양분을 얻는 것을 넘어 그 음식이 지닌 영혼이나 정신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먹을 음식에서 더 높은 정신적 가치를 알아 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백석이 눈을 원한 이유다. 따라서 백석이 선호한 음식들은 맛뿐 아니라 고고한 정신성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어진 마음을 가진 꼴뚜기, 욕심 없고 착하고 정갈한 흰밥, 향이 ‘높은’ 취향리 돌배, 고담하고 소박한 국수 등 백석은 주관적인 미각 경험에서 보편적인 마음의 영역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먹음으로써 그 정신의 영역에 도달하고자 했다. 이처럼 ‘권장 영양소’로 대표되는 근대 영양학이 잃어버린 음식문화의 한 단면이 그의 시 속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실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산한 삶을 위로하는 ‘소울 푸드’
‘고향은 열 살 때 먹던 음식’이라고 했던가. 어린 시절 먹던 음식의 맛은 채워질 수 없는 욕망으로 남아 다시금 우리 입안으로 도래한다. 월남한 실향민들을 대상으로 한 이북식 면옥집들의 흥성은 ‘수수한고 슴슴한’ 메밀 면발을 후르륵거리며 먹던 기억이 이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는지 보여준다. 오랫동안 타향을 떠돈 백석 또한 고향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시 이곳저곳에 풀어놓았다. 붕어곰, 송구떡, 섞박지, 매감탕 등 토속적인 평안도 음식들은 비단 그 맛뿐 아니라 음식을 함께 나누던 즐거운 추억,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담고 있다. 백석이 사랑했던 음식들 가운데 단연 으뜸은 ‘모밀국수’다. ‘모밀국수’는 「국수」에서는 ‘고담하고 소박한 것’으로, 「북신」에서는 소수림왕과 광개토대왕의 기개를 담은 음식으로, 「산숙」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가 된다. 백석은 과거는 물론 민족의 역사와 함께 지속되어 온 ‘모밀국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오랜 역사를 발견하고 그 정신들을 내면화하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국수는 각박한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에서 벗어나 고담하고 소박한 삶의 경지를 일깨우는 존재이며, 외롭고 쓸쓸하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의지를 키우는 특별한 음식이다. 이처럼 백석의 시 속에 등장하는 음식은 오롯이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며 그라는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단순한 ‘맛’ 속에서 삶의 ‘멋’을 찾고자한 그에게 음식들은 그가 지향하는 삶 그 자체였다. 그가 끊임없이 음식 이름을 나열할 때 그것이 전혀 다른 울림을 가지고 다가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