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애정, 헌신, 이것이 과연 사랑인가?
우리가 믿어온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지적 탐구자 조중걸 교수의 사랑에 관한 아주 특별한 정의
죽음과 예술, 종교, 철학, 논리학 등을 탐구해온 조중걸 교수의 신작 『러브 온톨로지』가 세종서적에서 출간되었다.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끊임없이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저자는 이번에 ‘사랑’에 관해 날카로운 통찰을 펼쳤다. ‘사랑’은 매우 중요하지만 누구나 그것을 말할 정도로 쉬운 주제인 듯하다. 그러나 실상 다루기 매우 까다로운 것이며, 아무도 그 실체에 관해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조중걸 교수가 ‘사랑’에 대해 무엇인가를 쓴다는 사실이 놀라운 까닭은 이런 점 때문이 아니라, 그가 차갑고 냉소적이고 까다롭고 건조하다고 평가받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유보적이지 않다. ‘내 생각으로는’이나 ‘~라고 생각된다’ 등의 어구를 쓰지 않는다. 그의 글은 참과 거짓을 판명해낼 수 있는 언명, 즉 명제인 셈이다. 이 점에 있어 그는 초연하다. 아마도 저자는 자신의 논증이 참으로 드러날 경우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릴 것 같고,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경우 역시 이마를 찌푸리지만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그러나 피해갈 도피처를 미리 마련해두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개성이다.
저자는 예술사와 철학, 소설 등에서 이미 냉정하고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몇 명의 독자들에게는 열정적으로 사랑받는 작가이다. 이 책은 그런 그가 사랑에 관해 무엇을 썼는지, 사랑에 대해서도 저자 특유의 면도날을 작동시켰는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사랑의 달콤함과 슬픔이 무엇인지, 달콤함과 두근거림이 환상에 덮인 것은 아닌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존재론(온톨로지, ontology)과 인식론을 통해 사랑의 본질, 의미, 형태, 한계 등에 대해 철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이 책은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해 ‘오컴의 면도날’을 작동시키며 시작된다. 그는 우리가 보통 사랑이라고 말해온 것들을 분석하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형이상학과 특유의 ‘인간론’을 통한 논증은 너무도 적확하고 치밀해서 반박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그는 먼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어떤 것도 그의 날카로운 논증을 피해 나가지 못한다. 섹스, 혈연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애정 등의 실체와 기원과 현존에 대해 그 실태와 거짓과 독선에 대해 모든 것을 폭로한다.
어떤 독자에게는 솔직하고 적나라한 내용이 불유쾌할 수도 있다. 또한 이 글을 다 읽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 모두 그의 분석을 통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심지어 얼굴이 화끈거리는 자기 폭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사랑이라는 환각을 부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진실한 사랑을 논하기 위한 예비 과정일 뿐이다. 그는 사랑이라는 실체는 없고, 단지 거기에 다가가려는 노력만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신선하고 탁월한 통찰을 제시한다.
이 책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의 교과서’이다. 거짓사랑과 참사랑을 말하고, 악덕과 동시에 미덕의 가능성을 말한다. 사랑에 관한 저자의 글을 통해 독자는 그 통찰을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조중걸 특유의 간결하지만 우아한 문체를 즐길 수 있다. 그의 글은 꾸밈과 감상과 겉멋에 지나지 않는, 전형적인 의미에서의 미문은 아니나 군더더기나 장황한 꾸밈이 없고 간결하다. 주로 우아하고 때때로 유머러스하다. 사랑에 대해 말하기를 기피해왔던 저자가 힘겹게 두려움을 이겨내고 펼친 ‘사랑론’을 이해하는 데에는 출간을 앞두고 쓴 그의 편지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편지는 은둔하는 저자와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이 편지글은 어떤 글보다도 그 자신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편지
사랑은 제게 큰 숙제였습니다. 그것은 이중으로 그랬습니다. 먼저 실천적인 이유에 있어서 그러했습니다. 제가 진정한 사랑을 품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저 자신이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푼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제가 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또 삶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사랑하긴 했습니다. 열정적으로 살고 순간을 살고 있으니까요.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것으로 나의 사랑이 충분한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숙제의 두 번째 것은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에서 사랑에 대해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있습니다. 조용히 내 마음을 느껴보려 애쓰면 거기에 사랑에 대한 나의 요구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거기에 그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 나를 불쌍히 여기듯이 남도 불쌍히 여기게 되는 측은지심, 운명을 같이할 때 느끼게 될 충족감 등, 이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과제는 아닙니다. 막연한 것들에는 언어를 투입하면 안 됩니다. 더구나 그 막연한 것들이 소중한 것들이면 더욱 안 됩니다. 우리 언어가 고귀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망쳤나요?
따라서 저는 언어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을 통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합니다. 먼저 쓰레기를 철거하는 것이 저의 첫 번째 과제였습니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있지만 사랑은 아닌 것들을 철거하기로 했습니다. 칸트는 순수 이성을 비판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비판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사랑’을 비판하려 합니다. 그 자체로서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기 때문에 사랑이 될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냐 아니냐는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떻게’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이기심과 탐욕, 허영과 독선 위에 기초할 때 사랑이라는 미명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일말의 사랑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 불꽃을 되살려보려 합니다.
섹스도, 혈연 간의 연도, 남녀 간의 애정도, 모두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단지 이것들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행사되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지독한 이기심과 집착에 물들어 있는가를. 다행히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것들이 세계에 대한 사랑 가운데 존재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것들만이 특별히 사랑일 수는 없습니다. 다른 많은 것들이 사랑이듯이 그것도 하나의 사랑일 뿐입니다. 배타적이라면 그것은 사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독자가 이 책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사랑과 관련해 다른 글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이라고 말해지는 인간 희극에 긍정적일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내면의 폭로입니다. 여기에 대해 저는 권두언에 마르크스의 말을 통해 이미 말했습니다. 환상과 기만 가운데의 삶은 결국 삶 자체를 망칩니다. 그것은 혼란과 몰락을 부를 뿐입니다. 이것이 저의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