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안에서는 피해자를 위해 싸우고
법정 밖에서는 제도의 빈틈을 기록한 변호사의 증언
범죄 피해자의 변호사는 오늘도 바쁘다. 법원에서, 검찰청에서, 경찰서에서, 병원에서 피해자를 만나고, 설명하고, 설득하며 함께 걸어야 한다. 으레 그렇듯 법조인은 감정을 절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피해자의 변호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렇다. 이 책의 저자 서혜진은 분노하는 변호사이다. 『법정 밖의 이름들』은 고은, 이윤택, 안희정, 텔레그램 N번방 등 한국 사회를 뒤흔든 사건에서 피해자의 옆에 섰던 변호사 서혜진의 첫 책이다. 하지만 단순한 판결 해설서는 아니다. 법의 언어로는 닿지 않았던 감정과 기록되지 않은 이름의 흔적을 따라가며, 우리와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정의 그리고 더는 지체되어서는 안 될 변화들이 무엇인지 말한다. 이 책은 우리가 외면해 온 고통에 질문한다. 사람이 바뀌면 법률도 바뀐다. 이 책은 그 시작이 고통에 응답하는 일이라는 걸 증명한다.
**추천의 글
책을 펼치며 성실하게 하루하루 버티듯이 피해자를 변호했을 뿐이라고 하는 서혜진의 말에 마음이 먼저 가닿았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기 일쑤인 사회에서 서혜진은 젠더폭력이나 아동학대 사건의 피해자를 주로 변호해 왔다. ‘피해자의 침묵을 열고, 정의가 닿지 못한 자리에서 그들을 지키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었겠는가. 한편으로는 그저 버텼다는 말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감당해 왔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고단함이 내 어깨에도 함께 얹히는 듯했다. 그동안 서혜진이 경험한 사례들 중에는 널리 알려진 것도 많지만, 알려지지 않을 만큼 흔한,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듣는 것들이 참 많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우리 사회에 성폭력이나 젠더폭력이 얼마나 흔한지를 다시금 확인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형법으로는 성폭력 범죄를 대처하기 힘들고,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 무렵 나는 국회 법사위원회에 출석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특별법과 관련한 가장 큰 쟁점은 ‘성폭력 범죄를 친고죄로 한 형법 규정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와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할 것인가?’였다. 1994년 1월 5일, 특별법은 출범했으나 친고죄와 비동의 강간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 후 친고죄는 대부분 사라지거나 반의사불벌죄로 대체되었지만, 비동의 강간죄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새 법이 출범하면서 처벌 규정이 강화되는 등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범죄 피해자를 보는 사회의 시각은 달라지지 않았고,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가해자를 고소하는 데는 여전히 크나큰 결단이 필요했다. 법정에 선 피해자는 피고인 측 변호사의 막말에 가까운 질문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답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행히 2013년부터 피해자를 위한 변호사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었다.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미래가 더 우선시되는 가해자 중심의 프레임이 여전히 견고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전 생애를 걸어야 하는데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이 만남에는 언제나 시작과 결말이 존재한다. 서혜진은 피해자 변호사로 겪었던 사례들을 피해자와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이야기하듯 풀어낸다. 거기에 더해 필요한 만큼의 관련 법률과 판례들을 덧붙이고 해설까지 곁들인다. 젠더폭력 등과 관련한 대표적인 사례들을 골고루 담고 있으므로 한 권의 친절한 교과서로 사용하기에도 충분하다.
이런 책 구성도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당장이라도 필사하고 싶어지는 서혜진의 무심한 독백이 곳곳에서 흘러나온다는 점이다. 언뜻 넘겨보아도 이런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삶이 한순간 잿빛이 된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잃어버린 색을 되찾아 주는 것”, “억울함을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보다 억울함을 드러낼 수조차 없는 사람의 편에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 “어떤 것도 당신을 파괴할 만큼의 가치는 없다.” “타인을 돌보는 일은 소진을 전제로 하지 않아야 한다.” “재판은 끝나도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천천히 곱씹고 싶은 문장이 끝이 없다. 그렇다. 『법정 밖의 이름들』은 지식이 되고, 지혜가 되고, 나아가 위로가 될 것이다.
— 김영란(전 대법관, 『판결 너머 자유』 저자)
나는 종종 법정에서, 병원에서, 때론 부검대 위에서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서혜진의 글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침묵 속의 존엄을 꺼내 보인다. 『법정 밖의 이름들』은 법의 이름이 미처 닿지 못한 자리에서, 침묵과 고통 속에서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서사를 조심스럽고도 정중하게 복원한다.
법의학자로 살아오며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마주한다. “죽음이 말해주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문득 반대로 되묻고 싶어졌다. “우리 사회는 살아 있는 고통 앞에서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는가?” 피해자의 목소리는 대개 너무 작고, 너무 멀리 있다. 그들의 말과 감정은 법정 안에서 ‘증거’라는 이름으로 변형되거나 소거되고, 법과 제도의 틀을 통과하기 위해 ‘피해자다움’이라는 이름의 좁은 문을 강요받는다.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의심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 이 책은 바로 그 이름 없는 고통들에 말을 건넨다.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요구는 때로 고통을 침묵하게 만든다. 그 침묵의 배후에는 복잡한 감정과 망설임, 말로 다하지 못한 진실들이 있다. 피해자가 자기 고통을 설명하고 증명해야만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서혜진의 글은 단순한 보호의 방식이 아닌 이해의 언어를 고민한다. 그 언어는 논리와 증거가 아니라, 공감과 책임의 윤리에서 비롯된다.
서혜진은 스스로 ‘인권 변호사’라는 호칭에 거리를 둔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기록과 시선,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과 상황을 복원하려는 치열한 태도는 그 어떤 선언보다도 깊은 윤리이자 연대의 증거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생의 흔적들이 문장으로 되살아나고, 사라졌던 이름들이 마침내 얼굴과 이야기를 되찾는다. 말할 수 없어 떠밀려야 했던 시간들이 이 글을 통해 마침내 주어와 목적어를 되찾는다. 피해자의 존재를 재현하는 동시에, 독자들이 피해자의 감정과 말 앞에 멈추어 서게 만든다.
그런 이유에서 『법정 밖의 이름들』은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다. 사람을 마주하는 태도, 말하는 방식, 무엇보다 ‘듣는 윤리’에 대한 책이다. 그 태도가 말의 무게를 바꾸고, 법이 닿는 거리와 방향을 바꾼다. 결국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누가 존중받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존중하려는 마음을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는가?’라고.
이 책은 피해자라는 단어 뒤에 감추어졌던, 그러나 누구보다 분명히 존재했던 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어야 하는 시대에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그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라고.
— 유성호(서울대학교 교수, 『법의학자 유성호의 유언 노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