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바라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내가 지은 감옥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이므로.
작가 한승원이 신명나게 풀어놓는 치유와 회복의 공간 남도의 문화와 풍경 이야기
신화와 생명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작가 한승원이 쓴 고향 남도의 풍경과 문화에 대한 산문집 《시방 여그가 그 꽃자리여》가 출간되었다. 1997년 서울을 등지고 40년 만에 고향을 다시 찾은 저자는 대밭에 미역냄새 어린 바닷바람이 부는 장흥 바닷가에 토굴을 짓고 작품 집필을 하고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의 소망이었던 고향 문화와 풍경의 속살을 읽기 위해 틈틈이 광양, 순천, 여수, 목포, 해남, 완도, 진도, 영광, 화순 등 남도 땅 곳곳을 돌아다니며 글을 썼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나 남도의 풍경 좋은 장소들을 소개하는 관광서가 아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요즘 한창 일고 있는 웰빙 관광 바람 속에서 이 책이 올바르게 깊이 관광하는 눈을 기르는 데 기여하고, 우리 국토를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찬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집필했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을 가두는 지혜와 풀어놓는 지혜를 배우는 강진 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이 오솔길, 멋과 낭만의 미항 여수, 참다운 고독을 알려주는 순천 갈대밭, 가슴속을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과 매화꽃 마을, 꿈꿀 수 있는 자의 행복을 깨우쳐주는 흑산도와 다도해의 섬들 등 남도는 둘이 아니라 혼자 떠나야 하는 땅이자 마음의 지도 한 장을 품고 떠나는 땅이며 길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이 시작되는 땅이다. 작가 한승원이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며 꿈꾸듯이 신명나게 읽은 고향 남도의 깊은 속살을 이 책에서 마음껏 맛볼 수 있다.
내 고향 풍경, 깨달은 마음으로 읽기悟讀
잘못 읽는다는 뜻의 ‘오독誤讀’과 깨달은 마음으로 읽는다는 뜻의 ‘오독悟讀’은 발음이 같다. 저자는 남도 풍경을 역사나 철학, 민속학, 정신분석학 등 여러 학문과 예수와 석가모니 등 다양한 종교의 눈을 빌어 보았다. 그런 중에 저자는 고향 풍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로이 해석하려 했다. 그것은 신명나는 발견이었고 깨달음의 눈으로 찬양하며 오독하기였다.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장흥의 억불산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했다. 억불산이란 이름이 ‘세상을 구제하려는 인민 부처, 즉 미륵 부처가 있는 산’이기 때문에 억불산億佛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億’은 숫자로서의 뜻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억불산에는 목탁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승려들의 순례지였다. 목탁골에서 산 위의 바위를 쳐다보면 그것은 틀림없는 미륵부처이므로 불제자라면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앉아 부처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네가 앉은 그 자리가 꽃자리다
저자가 서울을 등지고 고향으로 내려온 것은 바다와 함께 살려는 것이었다. 저자는 ‘젊어서 원양어선을 타고 세계 곳곳의 항구를 누비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배를 타지 못’하고 슬프게 늙어왔다. ‘자존심은 있어서 낡아가지 않고 늙어간다고 변명한다. 낡아가는 것은 썩고 녹슬어 소멸되어 가는 것이지만, 늙어가는 것은 흰 머리와 주름살 속에 보석 같은 지혜의 사리를 앙금지게’ 한다며 담담하게 고백한다.(본문 참조)
‘삶이 산처럼 무거운 것은 탐욕으로 말미암아서다.’ 저자는 이 탐욕을 ‘철군화’에 빗대며 ‘곽시쌍부’를 떠올린다.(본문 참조) 순천 선암사의 입구에는 ‘여기 들어오는 자는 알음알이를 버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속세에서 익힌 섣부른 지혜를 버리고 참지혜를 배우라는 의미다. 참지혜, 그 깨달음이야말로 석가모니가 가섭에게 내보인 맨발 곽시쌍부에 담긴 의미일 것이다. 철군화를 신고 있는 ‘나’, 그 ‘나’가 진짜 ‘나’의 모습인가? 명예와 돈과 자부심과 자긍심과 같은 철군화를 잠시 감추어놓고 맨발로 사는 체하며 어떻게 진실로 참회하고 진짜 맨발이 되어 돌아갈 수 있겠는가.
여수 향일암에 해를 맞이하러 가는 것도 새 각오와 희망을 스스로의 가슴에 각인하기 위해서다.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공이 마음이 바라는 대로 날아가 주지 않을 때 처음에 배웠던 기본으로 되돌아가 몸과 마음,을 점검하듯이 우리는 늘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구례 화엄사 효대(4층 석탑)는 머리에 석등을 이고 있는 연기緣起 스님이 왼손에 찻잔을 들고 그 위에 여의주를 받쳐 올리고 있는 형상이다. 어머니에게는 진리를 공양하고 부처님에게는 차 공양을 올린다는 의미로,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님[不二]의 경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탑을 세 바퀴 돌고 나서 고개를 들고 나니 어머니가 웃고 계신다. 그 어머니는 천오백 여년 전 연기 스님의 어머니, 저자의 아흔 살 노모의 모습과도 겹친다.(본문 중)
우리가 잠시라도 여행길에 오르는 것은 쇠사슬과 동아줄로 칭칭 엮인 마음의 감옥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못내 벗어나고 싶은 그 고통이 바로 자기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이자 ‘안양安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은 존재의 원형, 처음 모습을 돌아보는 치유와 회복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마음을 비우고 사는 삶, 깨끗하고 순수한 삶을 꿈꾸며 오르는 고향 남도 여행길
저자는 ‘나 죽어 화장시키면 산화되어 훨훨 하늘로 날아가버릴 것이다. 구름이 되어 떠돌다가 비나 안개나 눈이 되어 내릴 것이다. 푸나무 속으로 들어가고 강물이 되어 흘러 바다로 갈 것이다. 나 날아간 자리가 바로 여기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이것을 무덤이라 여기고 여기에 꽃 한 송이만 놓고 하늘을 쳐다보든지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든지 바다를 내려다보든지 산의 숲을 바라보든지 피고 있는 들꽃을 들여다 보든지 하거라. 너희들 눈길이 뻗어간 곳이면 어디든지 이 아비가 존재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는 연꽃 한 송이에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보고, 갈대에서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을 보며, 몽돌에서 공동체의 삶을 보는 화엄 사상(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가운데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이다. 한 티끌이 자기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고, 모든 것의 티끌 속도 영원의 참세계를 머금고 있다. 끝이 없는 영원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끝이 없는 영원이다,- 의상대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삶이 답답하고 짜증날 때 우리 자신이 오래지 않아 멀리 떠날 나그네라는 사실을 알면 마음을 비우게 되고, 마음을 비우게 되면 너그러워지고 너그러워지게 되면 착해지고, 착해지면,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고 거침없이 삶을 사는 자신감을 얻는다.(본문 중) 다도해에 뿌려지듯 흩어진 섬으로 홀로 떠나는 여행에서 얻는 ‘갇혀 사는 사람은 꿈꿀 수 있으므로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깨달음은 각박한 삶에 파김치처럼 지치고 기갈 들린 현대인에게 시원한 감로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