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행복할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행복할 것인가
움켜쥐었던 것들을 놓아버리고
오늘도 깃털처럼 가볍게 사는 앙성댁 강분석의 봉화 산골 이야기
농사짓고 자연과 소통하는 삶을 더없이 사랑하는 귀농 13년차 농사꾼 ‘앙성댁’ 강분석의 산문집 『지금 이곳에서 행복하기』가 도서출판 푸르메에서 출간되었다. 2006년 출간된 첫 책 『씨앗은 힘이 세다』(푸르메)가 막연하게 귀농을 꿈꾸는 귀농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애정 어린 조언 같은 귀농에세이였다면, 이번 책은 농사, 사람, 우퍼, 음식, 히말라야 산행 등 다양한 면면에서 바라본 저자의 삶의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안의 진정한 행복을 깨우는 책이다.
이미 13년차 농사꾼이지만, 농사일에 관한 한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의 ‘아마추어’를 자처하는 저자는 자연과 더불어 농사짓고 사는 매일의 삶 속에서 느끼는 ‘지금 이대로’의 행복,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삶과 행복에 대한 거창한 철학적 담론이 아닌 그저 소박하고 단출한 삶의 이야기 속에서, 진정 행복하기를 소원하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나 선연하게 환기시켜주고 있다. 저자인 앙성댁의 삶이 그렇듯 움켜쥐었던 것들을 하나둘 놓아버리고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다독임과도 같은 책이다.
농사에는 ‘묘한 힘’이 있다
―순수함과 열정으로 다만, 최선을 다하는 삶
“여름의 끝자락에 결정타가 날아왔다. 비바람이었다. 하루 걸러 비가 내려 일찍 심은 기장이 쓰러질까 조바심을 치던 때였다. 밤새 사납게 불던 바람이 다음날 낮까지 이어지던 날, 거실에 누워 비바람에 넘어가는 기장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허리는 아프고 기장은 쓰러지는데, 창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비처럼 내 뺨 위에도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본문에서
저자가 남편과 함께 서울을 떠난 것은 지난 1997년의 일이다. 충북 앙성에 터를 잡고 유기농 복숭아 농사를 시작했지만, 준비 없이 뛰어든 농사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흐르고, 새로이 경북 봉화 산골로 자리를 옮긴 지도 벌써 3년째다. 수수와 기장을 비롯한 여덟 가지 곡물 농사를 짓고, 산골에 하나밖에 없다는 다랑논을 만들어 벼농사도 지어보지만 삶은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다.
“나도 40년 넘게 살던 서울을 떠나와서 10년 넘게 농사를 짓고 있지만, 지금도 내가 진짜 농부인지는 잘 모르겠어.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에 아무런 후회가 없지만, 아니 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도시 사람들 속에서도 그렇고 시골 사람들 속에서도 그렇고 가끔 낯설고 외로워. 그게 나의 한계이면서 또 출발점 같기도 해.” ―본문에서
하지만 농사에는 묘한 힘이 있어 바닥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을 떨쳐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힘을 저자는 ‘자연의 위로’라 부른다. 40년 넘게 살던 서울을 떠나와 10년 넘게 농사를 짓고 있지만, 도시 사람들 속에서도 시골 사람들 속에서도 가끔 낯설고 외롭다는 저자는 그래도 오래도록 농사지으며 사는 삶을 희망한다. 거대한 존재의 근원을 돌아보며 낮고 순한 마음으로 다만, 최선을 다하는 지금의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우퍼WWOOFER들과의 특별한 만남과
우리네 인생을 담은 음식 이야기
이 책 『지금 이곳에서 행복하기』에는 우프(WWOOF, 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s, 유기농 농장에서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를 운영하는 저자의 봉화 산골집을 찾은 젊은 우퍼(우프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태국, 일본, 베트남, 프랑스, 호주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들은 바쁜 농사철 귀한 일손이 되어주는 한편 서로의 문화를 나누고,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특별한 친구이기도 하다. 파란 눈의 우퍼들은 농사일이 서툴러도 함께 땀 흘려 벼를 베고, 고추를 따고, 사과나무도 심는다.
우퍼들 중에서도 사진작가 데니스의 사연이 특히 인상적이다. 어릴 적 프랑스로 입양된 데니스는 몇 년간의 수소문 끝에 자신을 낳아준 한국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저자는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이 어려운 모자를 위해 전화 통화를 거들기도 하고, 제주도에서 치러진 데니스의 전통혼례에 참석해 진행을 돕기도 한다. 저자와 우퍼들과의 짧지만 진솔한 만남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잠시 스쳐 지나거나 혹은 관계를 맺게 되는 수많은 이들과의 ‘만남’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한편「한국농어민신문」에 ‘앙성댁의 건강밥상’이라는 칼럼을 3년째 연재하고 있는 저자는 손수 재배하는 유기농 작물과 그것으로 만든 음식 속에 담겨 있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비탈 밭에 엎드려 고구마 모종을 심던 날에는 어릴 적 아궁이 불에 익힌 군고구마와 어머니가 사다주신 새 바지에 얽힌 쓰라리면서도 달착지근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떫고 차진 도토리묵 앞에서는 평소 눈인사만 하고 지내던 직장 동료가 뜻밖에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도토리묵을 내놓고서 굴곡 많은 가정사를 들려주던 일을 추억한다. 이렇듯 유년의 한 장면이나 옛 사람과의 잊지 못할 만남을 불러오는 음식에는 다름 아닌 우리네 인생이 담겨 있다.
삶은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
―히말라야, 나를 부르는 곳으로의 회귀
“내게 산행과 농사, 그리고 산과 밭은 서로 동의어이다. 시골에 내려와서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 왜 귀농했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내려왔다는 내 말에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40년 넘게 살았던 서울을 어느 날 갑자기 그냥 떠나왔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거였다. 귀농 13년 차, 나는 이제 이렇게 대답한다. ‘귀농이란 말 그대로, 돌아온 거지요.’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에게 나는 덧붙인다. ‘나를 부르는 곳으로요.’”
―본문에서
저자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히말라야’다. ‘나는 왜 산에 가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하는 저자는 그곳에 가면 ‘돌아왔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나를 부르는 곳으로의 회귀, 그것은 이 책 『지금 이곳에서 행복하기』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는 ‘귀농’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게다가 저자가 살고 있는 봉화 산골은 유난한 겨울 추위를 비롯한 많은 것들이 히말라야와 닮아 있다.
저자는 자신들의 키보다 더 높은 짐을 지고 가파른 산을 오르면서도 행복한 얼굴로 노래를 흥얼거리던 히말라야 사람들에게서 삶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내일은 없고 오직 오늘뿐인 것처럼 ‘지금 이곳에서’ 사는 것을 즐기는 모습들이었다. 수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도 산이라 부르지 않고 언덕이라 부르며 가볍게 올랐다 웃으며 내려오는 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삶은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라는 사실을 히말라야에서 다시금 깨달은 저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그 삶의 신비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