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 세대의 시인, 요절복통 소년기와 가슴 아픈 사춘기의 강을 건너 세상으로 나오다!
시인 정용주의 산문집 『고고춤이나 춥시다』가 도서출판 푸르메에서 출간되었다. 『고고춤이나 춥시다』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산문집은 70년대에 10대를 보낸 시인이 좌충우돌 쏘다니던 어린 시절과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시절의 에피소드들을 촌철살인의 표현으로 재미나게 그려냈다. 흡입력 있는 문장과 시인 특유의 짧은 사유가 한 편 한 편의 에피소드들을 영화처럼 부각시키는 게 특징이다.
정용주 시인은 2003년 여름부터 치악산 금대계곡 흙집에서 살고 있다. 시인은 마치 도인처럼 이곳에서 시도 쓰고 나무도 하고 벌도 키우고 글도 쓰면서 세월을 낚으면서 살지만, 젊은 시절에는 많은 방황과 도전을 하면서 풍운아로 살아왔다. 7남매의 막내이자 쉰둥이로 태어난 그는,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늙어 있던 아버지와 아버지뻘인 둘째 형님 부부 등으로 구성된 가족 사이에서, 방물장수인 어머니를 그리며 유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고 덤덤한 것들조차도 시인의 눈에는 유난히 의미가 부각되고 섬세하게 인식되는 것들이 많았다.
이 책 『고고춤이나 춥시다』는 그런 시인이 벼린 촉수를 가다듬어 꼼꼼히 적은 성장에세이이다. 여주의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경험한 것들과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와 겪는 사춘기 소년의 심적 변화, 그리고 이유 있는 반항 깃든 행동들이 글맛 뛰어나고 서정성 풍부한 문체로 소개되어 있다.
어느 날 문득, 가슴 아프게 그리운 그때 그 시절 이야기
총 3부로 구성된 이 산문집에서 1부 〈하루 해는 어떻게 가나〉는 시인의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들이다. 특히 소풍날 라면땅 한 봉지 사기도 전에 군것질할 용돈을 모두 야바위꾼 아저씨의 손장난에 날려버린 일이며, 겨울날 학교 가기보다는 새끼줄 기차놀이에 더 열중인 동네 아이들, 동네 대항 체육대회날은 당연히 학교 수업 빼먹는 날이고, 술 취한 엿장수의 리어카를 끌어주는 척하며 엿 훔쳐먹기나, 초등학교 졸업 후 집안 형편 때문에 바로 중학교로 진학을 못하고 어린 농사꾼으로 1년을 지내면서 겪는 마음의 상처 등……. 굳이 주인공이 정용주 시인이 아니어도 70년대 궁핍한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대부분의 40대 이후 세대라면 경험해봤음직한 이야기들이라 더욱 애틋하다.
2부 〈서울 물 좀 먹어보자〉에서는 1년을 어린 농군으로 지내고 중학교를 들어가고 보니 어느새 다른 또래보다는 조금 어른스러워진 주인공이 겪은 에피소드들이다. 생애 처음으로 맞은 여선생님께 드리려고 이른 새벽 진달래꽃을 꺾었다가 결국 버리고 만 일부터 동창 여자애들로부터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기도 하고, 난생 처음으로 자기 몸을 흔들어 고고춤이란 걸 추면서 야릇한 흥분도 경험하다가, 서울로 전학을 와 변두리 동네에서 살면서 시골 전학생으로서 겪는 여러 알력들이 애잔하게 그려져 있다. 마냥 즐겁기만 하던 어린 시절을 떠나보내고 서서히 이성에 눈을 떠가면서 자신이 처한 형편을 인식하고 조금씩 반항스레 변해가는 사춘기 소년의 마음이 그림으로 그린 듯 솔직하기만 하다.
3부 〈설익은 인생의 맛〉에서는 완전히 반항하는 10대의 이야기이다. 일탈을 하면서도 그리 과감하지는 못하고, 나름대로 남자들 사이의 멋진 우정도 키워나가면서, 드디어 첫사랑의 여학생을 만나 연애편지도 주고받고 첫 키스도 해보지만, 자신의 사랑이 너무나 초라해서 이별을 선언하기도 한다. 뭔가 변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길도 출구도 없는 상태에서 가출을 감행하는 10대의 모습이 바다 위에 출렁이는 조각배처럼 위태롭다.
앞만 보고 달려온 70, 80세대들에게 바치는 헌사
요즘 방송물을 보나 영화를 보나 복고가 대세이다. 아마도 그동안 우리 사회가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에 대한 회한과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많지만 인간미는 차고 넘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반영한 듯하다. 또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추적인 경제활동을 벌이는 40대들의 청춘기가 바로 70~80년도였기 때문에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더 강하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출간된 이 책 『고고춤이나 춥시다』의 장점은 우선 재미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어떤 화법으로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재미는 천지 차이. 정용주 시인은 어눌한 척하지만 사실은 매우 능숙한 나레이터처럼 독자를 웃기고 가슴 저리게 하다가 결국은 울게 만든다.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서술하되 장황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묘사와 감정 노출이 낱낱의 사건들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시인 특유의 서정적이면서도 거침없는 문체 때문이다.
시인은 이 글을 쓰면서 소년시절의 상처를 다시 만나 ?f제야 화해를 했다고 말한다.
“제법 긴 시간의 간극을 건너 한 소년이 흔들리며 커가는 날들을 되돌아보았다. 한 사람의 삶에서 그것이 아무리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어느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것은 곧 지금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비로소 내 안에 잠복해 있던 지난 시절의 모든 통증과 화해한다.”
이 책의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엄경희 씨 역시 “소년 시절을 추억하는 행위는 ‘나’ 자신에게 연서戀書를 보내는 일과 같다. 그것은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임을 긍정하는 일이다. 기원으로서 소년 시절은 슬프고 외롭고 비장하다. 그러나 그것을 추억하는 자는 이 최초의 경험들을 품어 안는 자일 것이다. 이 산문집을 통해 우리는 추억하는 일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젊은 날의 추억 회고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시인은, 조금은 부족하고 아쉬움이 많았던 시절에 젊은 날을 보낸 모든 성인들이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소년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희망하면서, 물질적인 것은 풍요롭되 그 내면은 훨씬 빈약하게 자라고 있는 지금의 신세대 사춘기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말한다.